남궁마제
참 진(眞) 꽃 화(花) : 여론(輿論)이란(4)
준결승전이 시작되자 대연무장엔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전 대회와 달리 명사석이 더 늘어났고, 거기에 가림막을 하고 모습을 감춘 명가의 여인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여인들이 움직이자 이전보다 관중이 삼 할 이상 늘었다.
또한 관중석에는 붉은 현수막이 빼곡하게 내걸렸다.
다른 때에도 문파 소속 제자를 위해 현수막이 걸리긴 했지만, 올해만큼 압도적이진 않았으니. 소천회의 이름으로 ‘신청룡(新靑龍) 진화(珍花)’ 혹은 ‘남궁소공자(南宮小公子) 건승(健勝)’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진화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모르는 척, 시합에 집중하는 척했다.
하지만 푸르고 깨끗한 천풍무의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눈에 띄었으니.
진화의 상대인 관서겸은 그걸 모르는 척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두 사람을 보며 시합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 올렸다.
첫 번째 시합은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시합이었다.
“사전에 허락된 무기 이외의 것은 쓸 수 없다. 고의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경우, 중간에 시합을 중지하거나 이후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심판은 제왕무적단 부단주 소격패검 남궁해였다.
본래 준결승부터는 시합의 수준을 고려하여 남궁세가 오 대 무단의 고수들이 나서서 심판을 보는 전통이 있었기에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남궁경옥은 남궁해가 제왕무적단 소속이라는 것이 불안했다.
출전자와 눈을 마주치며 확인하는 절차 하나에도, 남궁해가 남궁구와 더 오래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역시 가주가 뭔가 손을 쓴 건가?’
남궁경옥이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남궁해가 지체하지 않고 시합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시작하라!”
남궁해의 말과 함께 남궁교명이 순식간에 검을 들고 남궁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챙-!
서로 맞부딪힌 검끼리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서로의 힘에 의해 물러났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부딪혔다.
챙! 챙! 쉐에엑-!
남궁교명의 검세는 날카로운 동시에 급소를 향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이 새끼,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인데.’
의천무학관 소속 검수들은 대개 그러했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의 급소를 향해 위협적인 검로로 검을 휘둘렀는데, 이제까진 그것을 의천을 향한 단호한 검세라 평가받았지만, 다 알고 보자니 확실히 달랐다.
“의천관주께선 검수가 아니라 살수를 키우고 계신 건가?”
“……!”
“아, 그렇다고 망설이진 마라. 상대가 너라면 나도 충분히 어울려 줄 생각이니까.”
자신의 말에 멈칫하는 남궁교명에게 남궁구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청풍신법으로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남궁교명의 검을 모두 흘려버렸다.
“나도 원래 그런 거 잘해.”
돌풍이 불듯, 남궁구의 검이 회전하며 남궁교명의 심장을 찔러 갔다.
“흣!”
남궁교명이 급히 몸을 피하며 남궁구의 검이 그의 심장이 아닌 어깨를 비켜 갔다.
거리가 벌어진 남궁교명과 남궁구.
남궁구는 자잘한 상처가 있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남궁교명은 왼쪽 어깨에 제법 출혈이 있었다.
“너……!”
검사의 성향과 수준에 따라, 같은 무공이라도 내공을 움직이는 방식과 검의 위력, 초식의 전개가 천차만별이었으니.
남궁교명은 남궁구가 그와 비교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 혼란스러운 듯 눈빛이 흔들렸다.
“이만 끝내자고.”
남궁교명에게 싸늘하게 내뱉은 남궁구가 남궁교명을 향해 검을 찔렀다.
남궁교명 또한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매섭게 움직였다.
챙-! 챙챙!
남궁교명과 남궁구의 검이 불꽃을 튀며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그들의 검에서 몸 전체로 푸르스름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선발대회 준결승에서 이토록 수준 높은 공방을 볼 줄 몰랐던 무림 인사들이 눈을 빛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도 남궁구가 먼저 강한 바람을 몰았다.
남궁교명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꼈다.
“천풍검법 산개여야(散開黎夜)-!”
“제왕무적검 일휘천낙(一麾天落)-!”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를 밝히며 부딪쳤다.
비무에서 마지막 초식을 밝히는 건 상대를 인정한다는 일반적인 존중의 표시였다.
매사 서로를 비꼬고 헐뜯던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서로에게 그런 인정을 보낸 건, 놀라운 모습이었다.
퍼-엉!
검에 실린 위력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때.
쉐에엑-!
청백색의 검기(劍氣)가 마치 철퇴처럼 남궁구를 때리며 그를 더 멀리 밀어냈다.
뒤로 밀려나던 남궁교명이 이를 악물고 진짜 마지막 검을 휘둘렀고, 그것이 그를 연무장 안쪽, 남궁구를 연무장 바깥쪽에 있게 한 것이다.
“남궁교명, 승(勝)-!”
“와아아아아-!”
위험하고 아슬아슬해서 더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비무의 승자가 결정되고, 지금만큼은 모든 환호가 온전히 남궁교명에게 쏟아졌다.
“젠장! 아무리 그래도 저 자식에게 지니까 기분이 더럽잖아.”
연무장 밖에서 몸을 일으킨 남궁구가 얼굴을 찌푸린 채 남궁진화를 보았다.
‘자, 원하는 대로 해 줬는데, 넌 대체 이걸 어떻게 사람들이 기억도 못 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거냐?’
남궁구의 시선을 받은 진화는 벌써 다음 비무를 위해 연무장에 올라 있었다.
* * *
“허허, 미인계가 통했나 보구나.”
“혹시나 해서 남궁해에게 심판을 맡겼는데…….”
화통하게 웃는 남궁가주에 비해 남궁경의 표정은 그보다 복잡 미묘해 보였다.
지난밤 본 광경에 대해, 진화는 남궁교명과의 결승행이 필요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남궁교명이 남궁구에게 진다면, 남궁도가 일찌감치 남궁경옥과 남궁교명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가주와 남궁경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남궁구를 회유할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진화가 옳았다.
남궁구는 남궁교명과 우위를 점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무위를 보였고, 미리 알지 못했더라면 남궁가주와 남궁경도 속았을 정도로 비무의 수준도 높았다.
남궁구를 회유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남궁구가 이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진화의 방법이 통했다는 것 그 자체랄까.
“저 아이가 정말 진화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구나.”
“창서각주의 아들이니,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겠죠.”
“아니면 진짜 미인계가 통했거나…….”
“형님!”
남궁가주의 농담에 남궁경이 듣기도 끔찍하다는 듯 정색했다.
그에 남궁가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남궁가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천리호정단의 작업이 모두 끝났다. 아들 비무에 정신이 팔려서 바로 근처에 있는 측근들까지 전부 끌려가는 것도 모르고 있더구나. 이제 슬슬 본인들도 잡아들여 볼까.”
남궁가주의 시선에 남궁교명의 승리를 좋아하고 있는 남궁경옥과 남궁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 숨통을 조일 순간만 남기고 신이 난 남궁가주를 보며, 남궁경은 차라리 남궁경옥에게 동정이 갈 정도였다.
* * *
새로 환기된 분위기 속에, 진화와 관서겸이 연무장에 올랐다.
진화는 앞에 선 관서겸을 보며 이전 생을 떠올렸다.
‘절창문주 귀룡창(鬼龍槍) 관서겸.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개천의 용, 뜬금없이 나타난 기재지. 중소 문파 출신으로 정의무학관에 진출, 정의맹 비호단주까지 올라 활약하다가 절창문을 이어받은……. 명문의 전통과 비호, 영약의 도움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나이 오십에 경지를 넘어선 무력을 드러내며 창왕(槍王)이라 불렸다.’
잠시 감회에 젖을 정도로, 돌아오기 전 진화가 몹시도 부러워했던 사내였다.
그는 한미한 문파 출신이라 무시당하면서도 당당했고, 주변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이전 생에서 이 사람은 끝까지 주변의 사람들을 지켜 냈을까?’
문득 궁금함이 일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물어볼 수도 없고, 알아낼 수도 없는 의문이었다.
그건 이제 먼 훗날의 이야기였으니까.
진화는 과거로 돌아와 조금씩 현재를 바꿔 가며, 이전과는 다른 미래를 꿈꿔 왔다.
기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서겸과 마주하고 처음으로, 진화는 이전 생과는 다르게 현재와 미래를 바꿔 간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일었다.
‘어쩌면 당신은 성공했을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당신의 미래를 망치는 거라면…….’
진화가 씁쓸한 눈빛으로 관서겸을 보았다.
육 척 장신에 건장한 체격을 한 호남자가 창을 쥔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화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은 외모에 미숙한 자세.
진화는 그런 관서겸을 보며, 자신으로 인해 달라질지 모를 그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불현듯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바꾸는 미래가 당신이 일군 미래보다 더 나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미리 사과한다. 어쨌든 나는 바꿔야만 하니까.’
짧은 순간.
진화는 두려움을 버리고 죄책감은 끌어안기로 결정했다.
‘나는 오늘 당신의 승리를 빼앗는다!’
복수니, 남궁이니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라.
스스로를 인정한 후 진화는 더 단호해졌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타-앗!”
관서겸이 귀룡창이라 불린 데에는, 귀신에 홀린 듯 창의 간극을 조절한다 하여 붙은 별호였다.
그래서 진화는 먼저 관서겸이 가진 장점을 없애기로 했다.
채-앵!
캉-! 캉!
진화의 검이 창촉과 창대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진화가 보내는 뇌전의 기운이 창대에 충격을 주었다.
창왕일 때 쓰던 귀창과 달리, 지금의 나무 창대로는 진화의 검세를 견딜 수 없었다.
파—앗!
위태롭던 창대가 결국 진화의 발 차기에 부러졌다.
그리고 진화가 부서지는 창대 사이로 검을 뻗었다.
카-앙!
“헛!”
‘남궁은, 이런 작은 공자마저도 이런 힘을 보인단 말인가!’
관서겸은 당황하면서도 한 손엔 단봉처럼 창대를 잡고, 짧아진 창으로 진화의 검을 막았다.
더 이상 진화와 거리를 벌리지 못하게 된 관서겸은,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도 진화의 검이 거두어지는 순간을 노려 공격에 들어갔다.
쉐에에엑-!
창끝이 회전하며 만들어 낸 파동에 진화의 검이 비켜나고, 오히려 관서겸의 창이 진화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엇!”
결정적인 장면에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진화는 냉정한 눈으로 관서겸과 그의 창을 보며 피하지 않았다.
진화는 방금 검을 거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뭐지?’
관서겸이 의아함을 느끼는 찰나, 진화가 비켜나는 검에 끌려가듯 몸을 회전했다.
그리고 창의 옆면을 때렸다.
번-쩍!
순간 푸른 번개가 번뜩이는 걸 보았을까.
퍼-엉!
“읏!”
관서겸은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튕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크헉!”
관서겸이 창을 놓쳤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뇌기에 남은 창대마저 부서졌다.
결국 관서겸은 일어나기를 포기했다.
“나, 남궁진화, 승(勝)-!”
진화와 관서겸의 비무 심판은 이전 생에서 진화의 스승이었던 한령신검 남궁위였다.
진화 자신과 함께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남궁위가 지금은 놀랍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에, 진화는 관서겸에게 이긴 것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우아아아아아-!”
당당하게 포권 하고 내려가는 진화의 뒤로 어마어마한 환호가 이어졌다.
* * *
한편.
그렇게 귀가 아플 정도로 큰 환호성 속에서, 남궁경옥과 남궁필은 자신들의 뒤에 검을 댄 제왕무적단원들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알아채기 전에 조용히 일어나라.”
“뭐, 뭐야?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청해상단주 남궁경옥, 상단의 자금을 횡령한 것으로 모자라 상단 상인과 하인, 무사 들의 임금을 착복하고 휘하 소문파들과 이면 계약을 한 혐의로, 가주님의 명에 따라 일신을 구속한다.”
“뭐, 뭐?”
“조용히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필요에 따라 즉참할 것이다.”
제왕무적단의 또 다른 부단주, 거력패검 남궁회가 살기를 드러내자, 남궁경옥과 남궁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곁에 다른 장로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앞만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대회장 전체에 남궁경옥이 잡혀가는 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잠시 후, 육장로와 칠장로가 조용히 자리를 뜨고, 그들을 힐끗 본 다른 장로들도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