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진짜 진(眞) 재앙 화(禍) : 이 구역의 진짜 미친년은 놈이다(1)
잠삼현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진화와 일행은 여남현에 도착했다.
노숙 시 마차의 중요성을 깨달은 남궁세가의 지원자들은, 서로 의논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마차가 다닐 만한 관도와 큰길로만 지나왔다.
그 바람에 일정이 조금 늦어졌지만, 말과 마차를 보존했으니 여남현부터 남은 길에서 만회할 수 있을 터였다.
여남현은 사주의 관문과도 같은 곳으로, 여기서부터 낙양까지 잘 닦인 길과 큰 고을들이 즐비했다.
“소공자님, 오늘은 여남객잔에서 묶게 될 겁니다. 우리가 조금 늦어서 다른 객잔을 다 찼다고 합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객잔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소찬회 회원 천 번쯤 되어 버린 길잡이 표사가 공손한 목소리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알려 왔다.
정의무학관 입관 시험 시기인지라, 늦게 온 진화와 일행에겐 객잔이 남은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근 열흘을 계속해서 말 위와 노상에서 보낸 일행은 물론, 마차에서의 무료한 일상에 지쳐 있던 진화도 뜨끈한 목욕물과 몸을 쭉 펴고 잘 수 있는 침상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 인사와 함께 남궁세가 일행이 여남객잔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그들, 아니 그중에서도 특히 한 소년에게 쏠렸다.
“와……!”
저마다 탄성이 새어 나와 객잔 전체에 울렸다.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잘생긴 소년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놀란 듯, 소년의 선한 눈매가 동그랗게 변하고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자, 여남객잔이 다시 술렁였다.
“왜, 왜 그러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시선에 진화가 당황한 것과 달리, 일행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달아 여남객잔에 들어섰다.
원수는 하나 남은 객잔에서 만난다고 해야 할까.
한 여인을 호위하듯 들어온 그들 중 일부는 당당하게 제갈소천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 도도하게 앞으로 걸어 나오자, 진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화는 한눈에 여인을 알아보았다.
알밤같이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
그쪽 가문 특유의 차분하게 처진 눈매가 띄었다.
‘제갈소현……!’
제갈소현이 진화에게 다가오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화와 제갈소현에게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구가 일행에게 속삭였다.
“됐어. 우리가 이겼어.”
진화가 의아한 듯 남궁구를 보았지만, 다른 일행은 모두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궁세가에서 온 사람들인가요?”
“남궁진화라 합니다.”
진화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제갈소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
‘귀천비지에서 꺼내 왔다는 그 양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십여 년 전, 남궁세가에서 출신도 모르는 남아를 양자로 들였다는 소문이 전 무림을 강타했었다.
하물며 그 아이가 귀천비지에서 주워 온 아이라니!
많은 명문 문파, 특히 혈연을 중시하는 세가들에서 크게 반발했지만, 남궁세가에서 묵살했다.
그 뒤로도 정의무학관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남궁진휘, 남궁진혜 남매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들 사이에 입양된 양자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명문가 사람들은 남궁세가의 양자를 그들 사이에 낀 불순물처럼 말했다.
제갈소현은 소처럼 순한 눈을 마주하곤 슬쩍 실소를 흘렸다.
“본녀는 제갈소현이라고 해요. 우린 정의무학관 입관을 위해 가고 있는 제갈세가 사람들이에요.”
‘본녀? 헛, 웃기는군!’
진화는 그만 코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진화가 알기로 제갈세가의 막내인 제갈소현은 자신보다 겨우 두 살 많을뿐더러, 지금은 진화와 마찬가지로 어떤 명성도 없는 강호초출이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스스로를 본녀라 칭할 만한 명성을 얻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제갈세가의 재녀라 불렸지만, 황보세가의 망나니와 정략혼을 하며 영영 무림에선 존재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 정의무학관 입관 시험을 응시하기 위해 가는 제갈세가분들이시군요.”
진화는 반갑게 웃으면서, 벌써 입관 시험에 통과한 듯이 말하는 제갈소현의 실수 아닌 실수를 자연스럽게 고쳐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즈음.
뒤에서 ‘풋’ 하고 터진 남궁구의 웃음소리에 제갈소현의 미간이 그대로 구겨졌다.
그리고 표독스럽게 눈을 뜨며 남궁구와 진화를 노려보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하필 만난 사람이 제갈세가라니.’
진화는 노려보는 제갈소현의 눈길에 아랑곳 않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대화를 이어 갈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결국, 제갈소현이 억지로 먼저 말을 꺼냈다.
“그, 그래요. 정의무학관 입관 시험을 위해 이동하는 중에, 남은 객잔이 이곳뿐이라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객잔의 남은 방들을 저희가 썼으면 해요. 사례는 충분히 하죠.”
제갈소현의 말에 진화 일행의 얼굴이 그대로 구겨졌다.
당연한 듯 양보를 바라는 것도 기가 찬데, 감히 남궁세가에 사례를 말하는 제갈소현의 오만함에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남궁구나 남궁교명이 나서서 뭐라 하려고 하기도 전에, 제갈소현의 얼굴이 먼저 구겨졌다.
“싫습니다.”
“그래…… 뭐?”
별다른 변명도 없이, 미안하다는 의례적인 수직어도 하나 없이.
진화가 단숨에 제갈소현의 부탁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바, 방금 뭐라고 했죠?”
제갈소현은 자신의 부탁이 거절될 줄은 몰랐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녀의 뒤에 있던 제갈세가 일행도 진심으로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놀라는 거야?’
진화는 그들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부탁은 거절하겠습니다. 열흘을 노상에서 지내는 바람에, 우리도 많이 피곤하거든요.”
진화는 단호하게 다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제갈소현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곧 폭발할 듯 진화를 노려보았다.
‘아! 제갈답지 않게 다혈질이라고 했었지? 사천당문 핏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만하고 안하무인하다고.’
사실 진화는 제갈소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제갈소현과 하하 호호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지, 지금 감히 내 부탁을 거절한 거야?”
제갈소현은 존대마저 잊어버렸다.
하지만 진화는 개의치 않았다.
개가 멍멍 짓든, 월월 짓든 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예! 저희도 피곤해서요. 아, 이 근방에 이만한 일행이 모두 묶을 만한 객잔은 다 찼다고 하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각자 묶을 방을 찾아 보셔야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 할 말을 다 한 진화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허!”
제갈소현은 어이가 없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감히 남궁세가의 양자 따위가, 제 부탁을 거절하더니, 이제는 허락도 없이 돌아서 간다고?
태어나 지금껏, 누구에게 면전에서 거절당해 본 일이 있던가.
아니,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누구라도 부릴 수 있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위.
당금 무림에서 제갈세가의 직계가 누리는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명성을 보아 예의를 차려 주었건만, 양자 따위가 감히 날 무시해?’
제갈소현은 큰 모욕을 당한 듯 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객잔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제갈소현과 진화를 보았다.
하지만 진화는 벌써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고, 남궁세가 일행도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망설임 없는 뒷모습에, 결국 화가 폭발한 제갈소현의 고함이 객잔을 뚫을 듯 울려 퍼졌다.
“야아-!”
갑작스러운 고성에 모든 사람들, 심지어 제갈세가 일행마저도 놀란 눈을 뜨고 제갈소현을 보았다
하지만 정작 진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진화가 그렇게 가 버리자, 다른 남궁세가 일행도 황당한 표정으로 제갈소현을 보고는 진화를 따라서 올라가 버렸다.
이것으로 하나는 명확해졌다.
저 미친놈이 일부러 저를 무시한 것이라!
제갈소현이 죽일 듯한 눈으로 진화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 천한 양자 따위가 감히 나를 무시해? 끌고 와!”
“아, 아가씨?”
“당장 끌고 오라고!”
제갈소현의 명에 곁에 있던 제갈소천대원이 당혹스러워하며 절절맸다.
결국 호위 무사인 제갈상이 나섰다.
“아가씨, 지금은 자중하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보는 눈? 보는 눈이 뭐! 저까짓 것들이 보면 뭐 어떻다고!”
제갈상의 만류에도 제갈소현의 분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혹여 제갈소현과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돌렸지만, 분명 시선이 곱지 못했다.
“아가씨, 제갈세가의 위신이 손상되면, 가주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이이…… 으득!”
보다 못한 제갈상이 제갈가주까지 들먹이자, 그제야 제갈소현의 억지가 멈췄다.
가주가 직접 붙여 준 호위의 말인 터라, 그것까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 방 찾아와! 지금 당장!”
결국 제갈소현이 물러섰다.
사실, 방금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상황상, 남자인 진화가 양보를 해 줄 줄 알았던 것이다.
“어이, 도련님, 이래도 괜찮겠어?”
남궁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뭐가?”
“제갈세가 영애라잖아! 보니까 성격도 보통이 아니던데.”
“알아. 분명 구, 너와 같은 나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이더군.”
남궁구의 물음에 진화가 여상한 듯 대답했다.
‘훨씬 철도 없었고. 큭!’
진화가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제갈소현은 진화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혈질에, 철부지였다.
하지만 세가에서 제멋대로 하고 살다가 겨우 세상에 나온 철부지만큼 다루기 쉬운 것도 없으니.
진화는 일이 너무 쉬워서 함정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함정인가 걱정되는 사람은 남궁구와 일행이었다.
“지금 그 여자가 동안인 게 문제야? 저 성격 나쁜 제갈가 공주님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거 괜찮겠냐고 묻는 거잖아.”
남궁구의 말에 다른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화의 대답은 남궁구와 일행의 예상을 빗나갔다.
“안 괜찮아도 좋지. 거기 사람 수도 많아 보이던데, 입관 시험에서 제갈 군사님이 나서기 전에 경쟁자를 줄일 수 있으면 좋잖아?”
“……혹시 일부러 시비 걸었냐?”
진화와 남궁구의 대화에, 일행의 표정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우, 우리 소공자님이 여자에게 시비를 걸다니…….’
하지만 곧 진화가 환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혼란 따윈 전부 날아가 버렸다.
“제갈이 실수를 하면 우리는 좋지. 잘 풀려서 다 함께 입관하면 참 좋겠습니다.”
“오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참지 말고 다 날려 버릴 걸 그랬습니다.”
진화는 이제 제 얼굴을 어떻게 이용할지, 완전히 알아 버린 듯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지. 얼굴이든, 우연이든. 제갈가주가 나서기 전에 손을 쓸 수 있으면 딱 좋겠군.’
진화가 웃자, 일행이 따라 웃고.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열렬한 소찬회 같은 일행의 모습을 질색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 * *
쨍그랑-!
“감히! 나를 무시해? 싫-어? 출신도 모르는 천한 양자 따위가 감히 천기제갈의 영애인 나를? 아아악-! 건방진 놈!”
제갈소현은 앞서 있던 굴욕을 되뇌다, 결국 손에 든 찻잔을 내던지고 말았다.
“거기서 너흰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놈이 도망가기 전에, 천한 양자 놈의 무릎을 꿇렸어야지!”
제갈소현은 분노는 애먼 호위 무사들에게까지 뻗쳤다.
“하! 미친놈! 으으으! 망할 새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진화를 향해 욕을 퍼붓던 제갈소현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호위 무사 중 하나를 다그쳤다.
“예?”
“멍청하게 뭘 되묻는 거야! 아까 그놈을 놓쳤잖아! 그럼, 이제 어떻게 그놈을 내 앞에 꿇릴지 생각해 와야 할 거 아니야!”
정확하게, 아까 그 남궁공자는 도망친 적이 없었다.
제갈소천대도 그들을 놓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제갈세가의 작은 폭군이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호위 책임자이자 제갈소천대 부대주인 제갈상은 이 일을 곱게 넘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귀찮게 됐군. 그렇다고 제갈세가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게 둘 수도 없고.’
제갈소천대 최연소 부대주인 제갈상이 곤란한 눈빛으로 제갈소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