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넉넉할 진(賑) 될 화(化) : 입관 시험 중 소소하게(1)
흔히들, 무림이 약육강식의 세상이라지만, 어디 그렇지 않은 인간 세상도 있던가.
힘[力]이라는 것이 단지 신체적 우위나 무력만 아니라 부나 권력, 신분이 될 수도 있는 한, 약육강식은 어디에서든 통하는 진리였다.
인간의 도리와 정의를 부르짖는 정의맹에서조차 말이다.
* * *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석 달이 조금 안 되는 여정으로, 정의맹이 있는 양청현에 도착한 것이다.
잠삼현만큼은 아니었지만, 남궁세가의 명성은 양청현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남궁세가인가?”
“남궁세가 영애는 이전에 입관하지 않았어?”
물론, 진화의 꽃마차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좋은 것도 있었다.
이곳에선 따로 객잔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남궁세가는 양청현에 따로 정의맹 파견 무사들을 위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수련을 점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곳엔 제왕무적단 부단주 출신의 뇌선검(雷善劍) 남궁조가 무사부로 있기에, 입관 지원자들은 잠깐이라도 그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데에 기대가 컸다.
잠시 뒤, 일행은 양청현의 부촌이 형성된 곳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장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대문 앞엔 반가운 푸른색 창궁무애단의 무복을 입은 단원들이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단원들이 수군거렸다.
“……소공자가 온다고 하지 않았어?”
“글쎄. 확실한 건, 진혜 아가씨는 아니라는 거야.”
창궁무애단원들의 눈에도 꽃마차는 남달라 보인 듯했다.
하지만 꽃마차에서 내리는 진화를 보는 순간.
“와아……!”
창궁무애단원들은 본가에서 소공자를 마차에 태워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왕무적단주 남궁경과 직계들이 뒤늦게 얻은 양자를 꽃같이 대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진화를 보는 순간 ‘저건 그냥 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이제 열다섯이 되었다고 했던가.
건장한 사내들 속에 유달리 어린 태가 나는 소년의 모습에 창궁무애단원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소년을 둘러쌌다.
“소공자님, 조심해서 내리십시오!”
“발 받침대를 놓아 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부정할 수도 없는 소찬회 회원들의 모습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창궁무애단원들이 진화의 앞에 섰다.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입관 지원자 여러분도 먼 길, 수고하셨습니다. 안에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창궁무애단원들은 이곳의 책임자로 있는 남궁조를 향해 ‘지부장’이라고 불렀다.
정식 직함은 아니었지만, 남궁세가는 정의무학관에 파견되는 무사부와 정의맹 대리자를 한 사람으로 지정해 버렸기에, 사실상 남궁조가 남궁세가의 정의맹 지부 책임자이기는 했다.
“오, 진화야-! 어서 와라!”
큰 체구에 넉넉한 풍채, 맘씨 좋은 아저씨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오는 사내.
맹세코 진화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진화가 당황한 사이, 남궁조는 어느새 진화를 끌어안고 등까지 두드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어서 와라!”
“가, 감사합니다.”
너무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인사에, 이젠 진화까지 헷갈릴 것 같았다.
남궁조는 아버지 남궁경과 의형제나 마찬가지인 관계로, 이전 생에도 진화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이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진화가 천뢰제왕신공을 익힐 땐 자진해서 스승이 되겠다고 나서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귀천성의 정의맹 습격이 있던 때에 전사하고 말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마웠던 사람이라, 진화는 그의 인사를 군말 없이 받았다.
“오, 이런! 내가 하도 남궁경 그놈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더니, 너무 친근하게 인사해 버렸구나!”
역시, 이번 생에 처음 보는 것이 맞았다.
“어휴, 어쩌면 이렇게 잘생겼는지, 가주님께서 신신당부를 하고, 경이 놈이 애지중지할 만도 하구나! 그래, 천뢰제왕신공을 익혔다고?”
“예.”
“하하하! 기특도 하지! 그래,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고?”
“예.”
“하긴, 의천검주 자체가 특별히 어렵지. 처음에 의천검주의 제자라 듣고, 웬 떡인가 싶더구나. 하하하하! 나는 네 아비와는 불알친구, 의형제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너도 나를 숙부라 부르거라.”
“예.”
“이곳에 있는 동안, 이 숙부만 믿으면 된다!”
“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진화가 하는 거라곤, 그저 남궁조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이상한 기분에 돌아보니.
남궁조는 물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자신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왜 그러지?’
진화가 당황하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옆에 선 남궁조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이리 순해 빠졌으니, 경이 그 녀석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예?”
아무래도 이상한 오해를 한 듯했다.
“들어라! 요즘 순진하고 얼굴 반반한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납치가 성행하고 있으니, 소공자의 주변 경계에 각별히 유념해라! 아니, 따로 접근하는 이나 말을 거는 자는 모조리 내게 보고해!”
“충!”
남궁조의 명에 창궁무애단원들이 다부지게 대답하고.
“순진?”
“놀라운 오해로군.”
한쪽에서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사이좋게 고개를 저었다.
* * *
모두 숙소에 간 동안, 진화는 남궁조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칠산가의 비약’에 대해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남궁조가 크게 화를 내었다.
“남궁경옥 그 돼지 새끼가, 머리 속까지 똥이 들어찬 모양이군! 배때기를 뒤집어 튀겨 죽일 놈 같으니!”
남궁조의 걸출한 욕지거리에 진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남궁경의 의형제였던가.
정파 고수답지 않은 언사가 퍽 닮았다.
“아니,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일을 어린 네게 전하라 했단 말이냐?”
저를 걱정하는 모습조차 남궁경과 닮아, 진화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 약의 효과라는 것이 자칫 무림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것이라, 두 분께서도 세간의 눈을 피하느라 어쩔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니! 그러다가 네가 위험해지면 어찌하려고!”
“저는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진화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남궁조가 다시 불을 뿜었다.
대체 남궁경은 너를 어떻게 키운 거냐부터, 남궁성 그 형님이 꼭 그렇게 음흉하고 은근히 간땡이가 부은 작자라느니까지…….
차마 듣기 황망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결국엔 ‘숙부만 믿거라!’ 하는 말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진화가 제갈소현과의 일을 전해 주었을 때, 진화는 사람이 진짜 입으로 불을 뿜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있나! 감히 네게 그딴 개소리를 지껄였단 말이냐! 제갈성진 그놈은 대체 자식을 어찌 키워 놓은 것이야!”
“수, 숙부님?”
“내 당장 그년의 옥수수를 죄다 털어서, 제갈성진 그놈의 면전에 던져 줄 것이야-!”
“숙부님-! 차, 참으십시오!”
계획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한 진화가 최선을 다해 남궁조를 붙잡았다.
그때.
콰-앙!
제왕무적단원들이 지키고 있어야 할 문이 떨어져 나갈 듯 활짝 열리고, 거기엔 반가운 얼굴이 진화를 향해 웃고 있었다.
정확하게 입만.
“우리 진화, 방금 그 이야기, 이 형님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느냐?”
첩첩산중에 점입가경, 그리고 진퇴양난이 한 번에 닥쳤으니.
살벌한 눈빛을 한 남궁진휘가 다정하게 물었다.
* * *
남궁진휘를 보는 것은 실로 이 년 만이었다.
정의무학관에서 후기지수 중 월등한 명성을 획득한 남궁진휘는, 삼 년 기본 교육을 마친 후 청룡단을 따라 종남외전에 참가하느라 첫 휴가를 제외하곤 본가에 오질 못했다.
지금 그곳에는 남궁진혜가 가 있었다.
“올해는 형님이 관도회 회주로 있느라, 우리 진화의 첫해를 함께할 수 있겠구나.”
남궁진휘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궁진혜처럼 숨이 막힐 정도의 애정 표현은 아니지만, 그녀와 경쟁하듯 진화를 아꼈던 남궁진휘였다.
“정말 많이 컸구나…….”
바른말로, 진화는 열다섯치고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환골탈태를 한 것과 관계없이, 어릴 때의 영향인지 성장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진화의 외양은 이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남궁진휘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보다는 형님이 더 많이 성장하신 듯한데.’
남궁경만큼 자란 체격도 그렇지만, 남궁진휘의 눈에서 형형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그러했다.
진화는 한층 무르익은 남궁진휘를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회포를 푼 남궁진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했다.
“제갈세가에 대한 항의는 이곳 지부에서 하는 것보다 본가에 전서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락을 얻어 인장을 찍어서 정식으로 항의하는 것이 효과적이겠죠.”
“음, 그편이 약발이 잘 먹힐 듯한데, 그 전에 제갈가주가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필시 수작을 부려도 더럽게 부릴 놈이다. 이런 일은 속전속결이니, 일단 그냥 지부 인장을 찍어서 항의하고, 그 뒤에 본가에서 다시 항의하도록 하지.”
두 사람이 신중하게 의견을 나누는 가운데.
제갈가주에 대한 신뢰도가 벌써부터 이렇게 바닥일 줄은 몰랐지만, 정작 진화를 당황스럽게 하는 건 다른 부문이었다.
“저기, 지부장님, 소가주님…….”
“어허! 숙부님!”
“진화야, 소가주님이라니. 이 형아가 서운하구나!”
결단코 ‘형아’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어쨌든 이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쓸데없이 단호한 남궁조와 남궁진휘에, 결국 진화가 물러섰다.
“숙부님, 형님, 지금 그걸 의논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때를 잘 보아 맹주님께 가주님의 전언을 올리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지 않겠습니까.”
“아, 그런 거야 내일 당장 본부에 들어가면 되니까.”
“그러고 보니! 무학관 내에도 수상쩍은 것이 나돈다는 소문이 있어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 그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은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학관 내에 수상쩍은 것이 돈다고? 무슨 내용이지?’
이전 생에서 진화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일들이라.
진화는 혹시 그것이 남궁진휘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까 봐,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남궁진휘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보다 제갈소현, 그 소저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제갈성진, 그놈이 제 성질에 먼저 가만두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일이 커졌으니 마무리는 지어야지!”
“제갈소현이 언제 도착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됐다! 손쓰기 전에 먼저 선빵을 날려야지! 내 이 망할 놈의 집구석을 그냥 두나 봐라!”
“저기, 숙부님, 형님……!”
진화의 마음과 달리, 남궁조와 남궁진휘는 도무지 그 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칠산가의 비약’ 문제를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제갈세가를 압박하기 위해 벌인 일이건만, 진화는 자신의 계획에서 점점 벗어나는 대화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보다 무학관 내에 수상쩍은 것이라니…….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구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생긴 것뿐이라.
진화가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 * *
드디어, 입관 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진화가 경지를 넘어선 것은 가문 어른들과 진화만 알고 있는 극비였기에, 그동안 남궁조의 보호 속에서 꽤나 답답하던 차였다.
게다가 남궁진휘는 그때 이후로, 정의무학관의 수상쩍은 일에 대해 진화에게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뭔가를 알아내려면, 정의무학관에 입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제갈성진 그놈도 이번에는 별수가 없었는지, 제갈세가에서 입관 시험 이후에 정식으로 사과를 온다고 하는구나. 제갈소현에 대해선 가법에 따라 따로 처결하겠다는데, 알 게 뭐람.”
남궁조가 제갈세가의 서신을 들고 빈정거렸다.
함께 듣고 있던 남궁진휘도 뭔가가 걸리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입관 시험 후라고 합니까?”
“그놈들 생각이야 뻔하지. 입관 시험에서 우리 애들 기를 죽여 자존심이라도 챙기겠다는 거지. 간사스러운 놈들!”
남궁조의 눈이 진화를 향했다.
진화가 선발대회를 우승하고 왔다는 것을 들었지만, 진화를 보는 남궁조의 눈은 영 미덥지 못했다.
남궁진휘 또한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 진짜 강하다’ 말도 할 수 없고, 진화로선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때, 남궁조가 결의에 찬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제갈세가 놈들보다 한 놈이라도 더 입관해야 한다!”
“……이제 와서요?”
“그러니까! 당근은 줄 수 없으니 채찍을 써야지! 떨어지는 놈들은 내 밑에서 한 달간 더 수련받다 가는 걸로!”
“…….”
남궁진휘는 크게 효과가 없을 걸 직감했다.
지금도 받고 있는 훈련을 조금 더 받는 게 뭐 그리 큰 차이가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남궁진휘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