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넉넉할 진(賑) 될 화(化) : 입관 시험 중 소소하게(2)
정의무학관은 전대 정의맹주 금룡무제(金龍武帝) 나윤천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십이좌회(十二座會)라 불리는 걸출한 영웅들 덕분에 귀천성의 무서운 기세를 막아 내기는 했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귀천성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고, 지켜야 할 중원은 여전히 넓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시간과 사람이었다.
전쟁은 곧 닥칠 것이고, 무림엔 전쟁을 이끌어 갈 인재가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정의무학관이었다.
강한 무인을 만들어 낼 시간은 없지만, 강한 무인들을 전쟁에 맞게 키워 낼 순 있으니까.
그래서 정의무학관은 귀천성과의 전쟁을 이끌어 갈 인재를 선별하기 위한 선별기관(選別器官)이자, 정의맹의 체계를 익혀 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적응기관(適應器官)인 것이다.
정의무학관의 입관 조건은 단 하나였다.
서른 이하의 ‘강한’ 무인일 것.
* * *
숭산 연희봉(延熹峰).
중원 오악 중 가장 성하다는 숭산에서도 밝은 빛이 모이는 곳이라.
연희봉 끝자락에 정의무학관을 설립하고, 그 입구에서 매년 신입 관도를 선발하는 입관 시험이 치러졌다.
“와, 올해는 사람이 진짜 많은 것 같은데?”
“네가 오 년 전에 와 봤냐?”
“현기 형님한테 들었지. 그런데 척 봐도, 오백 명은 되어 보이지 않아?”
“그렇긴 하네.”
뒤에서 호명기와 유경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진화도 눈앞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 모두가, 이번 해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본거지를 거점으로 열리는 선발대회를 통해 뽑힌 이들이었다.
본거지를 잃은 아미, 청성, 점창과 당문 출신들도 모두 정주와 낙양에서 따로 선발대회를 열었다.
“저기, 소림 선발대회 출신들인가? 다 스님은 아니네?”
“속가제자들도 있고, 군부 쪽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 정주와 낙양에서 선발대회가 많이 열리는데, 그중에서도 소림대회가 제일 유명하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들이 눈에 띄었지만, 그건 오로지 명문의 힘일 뿐.
선발대회 자체는 문파와는 상관이 없었다.
입관 시험의 통과 정원은 단 일백(一白) 명으로, 선발된 지원자들의 오분지 일에 불과했다.
“명문이 좋긴 좋네.”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명문 출신들에겐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등신들, 모르는 소리 하네.”
남궁구가 그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진짜 중소 문파의 자부심은 남을 깎아내리고 얻는 것이 아닌데……. 저건 그저 열등감에 불과하다.”
같은 중소 문파 출신인 관서겸이 눈살을 찌푸리며 동의했다.
관서겸의 말에 진화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자, 옆에서 남궁교명이 설명을 곁들였다.
“실력도 안 되는 제자를 보내서 망신을 자처하는 명문은 없으니까.”
“아아…… 그럼 저건 뭐야?”
남궁교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진화가, 다른 한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갈색 무복을 입은 모습이, 제갈세가였다.
그들 중에서도 진화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그곳엔, 제갈소현이 있었다.
“……영 편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색 무복 속에 혼자 화려한 옷을 입은 제갈소현을 보며, 남궁교명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선발대회를 통과한 걸 보면, 무공이 나쁘진 않을 거야. 실전에서 검을 들지 못하든, 어떻든 말이야. 큭큭큭!”
남궁구가 남궁교명의 표정을 보며 낄낄거렸다.
“낯짝도 뻔뻔하군.”
제갈소현에 대한 남궁교명의 평가는, 진화보다 박했다.
제갈소현은 남궁교명이 가장 경멸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명예도 모르고, 싸우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무인이라고!”
남궁교명의 말에, 진화가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
‘이전 생엔 네놈도 딱히…….’
진화는 남궁교명이 퍽 괜찮은 무인인 듯 말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때, 일행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어? 저기 제갈 놈들. 그때 본 놈들이랑 다르지 않아?”
제갈세가 일행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 시작이었다.
“맞네! 그때 나한테 밟힌 놈은 아예 안 보이네! 미친! 제갈소천대 소속으로 죄다 갈아 치웠구먼!”
“뭐? 그건 규칙 위반 아니야?”
“그건 아니야. 선발대회를 다시 열면 되니까. 한 번 열든, 두 번 열든, 주관하는 쪽 마음이거든. 권력이 더럽지!”
“제갈 놈들이 더러운 거지! 비열한 자식들! 지들 자존심 챙기겠다고, 우리 소공자님한테 사과도 미뤘잖아!”
“흥, 저런 놈들로 되겠어? 우릴 이기려면 소천대 정도는 넣었어야지!”
“그래, 우리가 이긴다! 소공자님을 위해서도!”
“으쌰!”
제갈 선발대회 입관 지원자들의 모습을 알아본 남궁 선발대회 입관 지원자들이, 절대 지지 않겠다며 서로 투지를 불태웠다.
남궁조가 건 채찍 작전은 남궁진휘의 예상대로 실패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동기부여가 나타난 것이다.
“명예를 모르는 건, 제갈소현만이 아닌 듯하군.”
진화의 싸늘한 평가에, 남궁구와 남궁교명, 관서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화와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은 당당하게 대기자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저기, 남궁세가 출신들이다!”
“오-!”
“올해는 또 다른 직계가 온다지? 양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입관 시험장 앞에 모인 모두가 명문 세가의 선발대회 출신이지만,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은 그들 중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첫째, 남궁세가 출신이나 비출신 상관없이 모두 푸른색 남궁세가의 무복으로 차려입은 것이 그러했다.
남궁의 무복을 모두에게 차별 없이 지급한 남궁세가의 배려와 그걸 입은 양주 무인들의 남궁세가에 대한 존경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특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는, 오 년 전과 마찬가지로 남궁세가의 직계가 입관 시험에 도전하는 해였다.
남궁세가의 입관 지원자들의 선두에서, 신비로운 천풍무의를 입은 진화가 등장하자 시험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허!”
모두 진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존심 높은 명가 출신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진화의 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런 이들의 모습에 남궁세가 입관 지원자들의 어깨가 한층 더 우람해졌다.
진화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알았지만, 이젠 그것에 대해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외모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주목 자체는 이전 생에서도 많이 느껴 보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뇌왕이라 불리던 그때처럼.
진화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진화가 한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갈 선발대회 입관 지원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이미 남궁조가 제갈가주의 집무실을 엎어 놓으면서, 웬만큼 귀가 열린 사람들은 진화와 제갈소현 사이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봉 입구에 있던 이들이 호기심 혹은 흥미 어린 눈으로 진화와 제갈소현을 보았다.
그러나 진화는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일전에 보았던 제갈상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전에 보았던 입관 지원자들과 구성이 다르군요.”
“그, 그들은 임시 선발자들 중 일부였습니다.”
“아, 그래요? 어쩐지……. 그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진화의 ‘어쩐지’라는 단어 하나에, 제갈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제갈세가 입관 지원자들의 눈초리도 대번에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갈소현의 안색이 가장 좋지 못했으니.
진화가 제갈소현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제갈상에게만 말을 걸고 그냥 가 버린 것이다.
‘건방진……!’
제갈소현의 얼굴이 수치심에 일그러졌다.
동시에 전날 아버지에게 맞았던 왼쪽 뺨이 아려 오는 듯했다.
남궁의 양자에게 무시당한 제갈세가의 여식이라니!
진화가 지나가고 사방에서 일제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제갈소현은 그것들 모두 자신을 향한 비웃음과 수군거림으로 들리는 듯했다.
‘두고 봐! 반드시 가만두지 않겠어!’
제갈소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잠시 뒤, 적삼을 걸친 스님이 산에서 내려왔다.
퉁. 퉁!
적삼 아래로 승복이 아닌, 우람한 가슴근육이 좌우로 꿈틀거렸다.
입관 지원자들은 소처럼 두꺼운 근육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마라승(摩羅僧) 각우!”
마라승 각우는 정의무학관 수석 무사부 중 하나로, 소림에서도 손에 꼽히는 무승이었다.
무려 이십 년 동안 철사장만을 연마했다 하여 마라승이라는 특이한 별호가 붙었지만, 귀천성과의 전쟁 중에 각우가 보여 준 대력금강장의 위력을 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별호를 비웃지 못했다.
또한 그는, 현재 소림금동백팔나한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모두 알겠지만, 첫 번째 시험은 금동십팔나한들을 뚫고 연희봉의 첫 관문을 오르는 것이다! 한 명씩, 금동십팔나한들을 뚫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단, 제한 시간은 일 다경이다! 본래는 앞에 있는 제비를 뽑아 첫 번째 관문으로 들어가지만, 먼저 도전하고 싶은 자는 앞으로 나서도 좋다!”
우람한 근육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가 입구 가득 울려 퍼졌다.
입관 지원자들의 눈이 일제히, 연희봉 입구 석문의 옆으로 보이는 동굴의 입구를 보았다.
첫 번째 입관 시험!
지원자의 오분지 일이 떨어지는 어려운 시험의 첫걸음.
긴장감이 맴도는 그때.
“우리 팽가 선발대회 지원자들이 먼저 나서겠습니다!”
당당하고 패기 넘치는 목소리.
무인들 속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솟아 나온 듯 거구의 두 남자가, 팽가 선발대회 지원자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저들이 팽가 쌍생형제 혼원권 팽수와 거력권 팽신인가 보네. 위로 큰 쪽이 형 팽수, 옆으로 큰 쪽이 동생 팽신이다.”
남궁구가 진화의 옆에서 그들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정보의 출처는 비밀이었다.
“벌써 별호가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진화의 모습에 남궁구는 조금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가끔은 진짜 순진한 것도 같은데…….”
“뭐라고?”
“아니야. 뭐, 연주나 기주, 사주 쪽은 워낙 입도 많고, 정의맹과 가까우니까. 선발대회를 통해서 소문이 나는 경우가 많아.”
“흐음.”
사실 진화가 놀란 건 다른 쪽이었지만, 남궁구의 설명에 납득이 갔다.
첫 번째 관문으로 들어가는 팽가 형제를 보는 진화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저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다른 세가 후기지수들의 수준을 알 수 있겠군.’
먼저 제갈소현을 만났지만, 진화는 그녀를 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른 후기지수들은 누가 있는지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남궁 선발대회 우승자로 사실상 일행의 대표였기에 순서 정도야 진화가 얼마든지 정할 수 있었지만, 진화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그런 양해는 구하지 않아도, 남궁세가 일행은 무엇이든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놈들을 앞으로 밀어 넣어서라도 마지막 순서로 하겠습니다!”
호명기의 대답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대-앵!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잠깐 후에 다시 대-앵!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첫 번째 관문을 열고 통과의 종을 친 것이었다.
“간격이 짧은 걸 보면 팽가 형제가 연이어 들어간 모양이네.”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종소리가 이어졌다.
스무 번의 종소리가 연달아 이어지고, 더 이상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 뒤로 나선 것은 소림선발대회 지원자들이었다.
“마소승(磨小僧) 현오로군.”
“정보력이 좋군.”
“……너 진짜 아는 거지?”
진화의 한마디에 남궁구가 괜히 뜨끔했다.
“어, 어쨌든 현오는 유명해. 소림 장문은 물론이고 마라승 각우의 공동제자니까. 소림이 키우는 비밀 병기 같은 거지.”
“오, 대단하네.”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기계적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반각 정도 시간이 흐르고.
소림의 종소리는 서른 번이 울리며, 가장 강력한 선발대회라는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게 하나, 둘 대부분의 문파들이 도전하고.
당문과 제갈세가, 남궁세가 출신들만이 남았을 때, 먼저 나선 것은 제갈세가 선발대회 지원자들이었다.
그들은 길을 지나며 남궁세가 일행을 한 번씩 노려보거나 비웃음을 흘렸는데, 그들의 도발에 남궁세가 일행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
“가소로운 놈들! 이때까지 개기고 있다가 조금 먼저 들어간다고 의기양양하기는.”
“내버려 둬. 어차피 얼마 못 버틸 텐데.”
하지만 일행의 희망과 달리, 제갈세가 역시 스무 명의 지원자가 관문을 통과했다.
다음 순서를 두고 당문의 한 여인과 진화의 눈이 마주쳤다.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이목구비를 한 것과 달리, 착 가라앉은 눈빛에 창백한 안색을 가진 여인이었다.
“독심화 당혜군이네. 당문이 귀천성에 성도를 빼앗기고 피난하긴 했지만, 다른 문파들과 달리 세가의 전력은 온전히 보존했다고 전해졌어. 실제로 정주에서 당문의 위세가 소림에 버금갈 정도라고 하니까.”
남궁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화가 독심화 당혜군을 보았다.
말똥말똥한 진화와 눈이 마주친 당혜군은, 한참 진화를 살피듯 보다가 일행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그때, 남궁구가 그답지 않게 흥분해서 한곳을 가리켰다.
“어, 저기!”
“응?”
“저기 홍색 무복의 여인. 용수권(龍手拳) 나하연이다! 현 정의무학관 관주 금룡일권(金龍一拳) 나무열의 딸로, 정주의 후기지수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천재라지. 하지만 나하연의 가장 큰 장점은, 두 살 위의 언니가 무림 최고의 미녀로 불리는 천상화(天上花) 나하린이라는 거지!”
“오오!”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아닌 다른 일행이 들뜬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진화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으니.
‘참 이상도 하지……. 어째서 이 이름들 전부, 이전 생에서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까.’
진화의 흑요석 같은 두 눈동자가 싸늘한 이채를 발했다.
반각을 조금 더 넘겨, 당문 선발대회 출신들은 열 명이 통과했다.
그리고 진화와 남궁세가 선발대회 입관 지원자들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