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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42)화 (42/425)

남궁마제

누를 진(鎭) 액화 화(禍) : 서열 정리(1)

정의무학관 입관 날짜가 다가오자, 남궁세가 장원에는 하얀 백의 무복 스물두 벌이 도착했다.

“정의무학관은 무복의 색깔로 연차를 구분하지. 육 년 차부터 일 년 차까지, 금은동청홍백, 각각 다른 색의 무복이 지급된다. 지금 너희들은 무명 백지 상태, 그래서 백지 무명 무복이지. 흐흐흐흐!”

남궁조가 이제는 입관 대기자, 신입 관도가 된 이들에게 무복을 나눠 주었다.

다들 남궁조의 어설픈 말장난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심지어 신입 관도 무복이 평소 입던 옷보다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들뜬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진화도 정의무학관이 새겨진 무복을 들고 감회에 빠졌다.

‘이게 관도복이라는 거지? 이전 생에서 가주님과 누님이 그토록 가라고 하는 걸 사양했었는데…….’

정의무학관에 온 것은 남궁진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막상 관복을 쥐자니 느낌이 달랐다.

진화 한 개인으로 남궁이 아닌 다른 곳에 소속되기는 처음이었다.

이전 생에서 진화는 귀천성 출신이라는 편견에 스스로가 너무 많이 휘둘렸다.

어쩌면 열등감 하나에 그의 삶 자체를 휘둘렸는지도 몰랐다.

‘이전 생에도 분명 이걸 내 손에 쥘 수도 있었는데, 지레 포기했던 거지.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들까지……!’

진화가 관복을 꼭 쥐었다.

많은 이들이 진화와 비슷한 얼굴로 관복을 끌어안고 있었다.

감동에 젖어서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도 있었고, 각오를 다잡는 이들도 있었다.

다들 저마다 꿈을 꾸며 정의무학관 입관을 지원했을 테니,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라.

그 모습을 남궁조와 선배 관도들이 흐뭇하게 보았다.

“어이쿠, 지금 너무 감동하지 말거라. 이제 시작일 뿐이야.”

남궁조의 말에 신입 관도들이 의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남궁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심이다.”

“……?”

“앞으로 삼 년 동안 기숙관에서 생활하게 되겠지만, 남궁 선발대회 출신들은 그대로 내게 무공 수련을 받게 될 테니까. 전원 통과한 기념으로 쓸 만한 무인으로 재탄생시켜 주마! 하하하하하!”

남궁조의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일전에 남궁진휘가 예상했던 그 광경이었다.

어쨌든 백색 무복이 전해지는 것으로, 정의무학관은 신입 관도를 받을 준비를 모두 끝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좋은 일은 미루지 않는다는 남궁조의 의견에 따라, 제갈세가의 사과 날짜를 곧바로 잡았다.

제갈세가에서는 꽤 많은 재물과 함께 제갈소현이 직접 왔다.

제갈소현이 거의 울상으로 구겨진 표정과 긴장 때문인지 뻣뻣하게 굳은 자세를 하고 남궁세가 장원을 넘었다.

“일……전의 경솔했던 언행에 대해 사……죄의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시울이 붉었다.

하지만 그게 반성이나 후회 때문은 아니라는 듯, 제갈소현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떨리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리라.

남궁세가 사람들의 눈초리가 제갈세가 사람들을 향해 매섭게 쏟아졌다.

특히 남궁진휘의 시선이 차갑게 쏘아졌다.

“사죄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언행을 사과하러 온 것이 아닌가? 제갈세가의 적녀는 사과조차 제대로 못 하는군,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찌 되었든 세가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온 것이라, 진화를 대신해서 남궁진휘가 나섰다.

잔뜩 벼르고 있던 남궁진휘는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아…….”

제갈소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건 결코 그녀가 바라던 무림 출도가 아니었다.

무도한 이들을 멋지게 물리치고 여협객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고, 시작부터 재물을 꾸려 사죄나 다니는 꼴이라니.

세상이 저를 뭐라 비웃겠는가!

“저, 저의 경솔한 언행에 모욕감을 느꼈을 소공자에게 사죄드립니다.”

제갈소현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쯧. 본인이 만들어 낸 굴욕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 모양새라니.’

진화가 속으로 혀를 찼다.

끝까지 한심한 모습에, 앞으로의 일이 별로 미안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제갈가주는 소저의 언행이 세가의 교육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라 하였으나, 어린 소저가 홀로 그런 언행을 했을 거라 생각지 않소. 앞으로 제갈세가는 각별히 언행에 주의를 해야 할 것이오.”

남궁진휘의 말이 협박처럼 제갈소현과 제갈세가 사람들의 귀에 꽂혔다.

남궁진휘가 비꼬는 말에 무표정이던 제갈세가 사람들의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그제야 남궁진휘의 입가에 겨우 미소가 맺혔다.

제갈세가 사람들 몇몇이 남궁진휘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제왕검이 있는 남궁세가는 감히 그들이 짓밟을 수 있는 중소 세가에 비할 바가 아니고, 남궁진휘 또한 제갈소현과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고 봐! 가만 안 둬! 절대, 가만 안 둬!’

떠밀려서 사과를 하던 제갈소현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 반드시, 오라버니에게 빌고 비는 한이 있더라고 너만은……!’

제갈소현의 서슬 퍼런 눈이 진화를 향했다.

반면, 진화의 눈은 제갈세가에서 보내온 재물을 새고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사죄의 뜻으로 보내온 재물은 황금 반 관과 비단 서른 필로, 진화가 십 년간 내기로 한 아이들의 식비를 아득히 초과하는 금액이었다.

‘소소하니…… 처음치곤 괜찮네.’

저 정도 대가라면 제갈소현의 살기 정도는 가볍게 무시해 줄 수 있는 진화였다.

대신 남궁진휘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육 년간, 제갈소현은 진화와 함께하는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 나타나는 것을 금하겠소.”

“무, 무슨……!”

제갈소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남궁의 가주께서 다시는 소저의 그릇된 인성과 언행으로 우리 진화가 상처받지 않길 원하시니, 남궁이 따로 내리는 소저에 대한 처분이오.”

“……!”

이번엔 진짜 협박이었다.

이 일을 남궁세가의 본가에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앞으로 소저를 지켜볼 것이오.”

제갈세가의 적녀에게 따로 처분을 내리는 것은 과한 처사가 분명했다.

하지만 남궁은 ‘꼬우면 덤벼라!’ 힘으로 협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갈소현이 분노와 모멸감으로 몸을 바르르 떨며, 살기 어린 눈으로 남궁진휘와 진화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제갈소현은 남궁의 처분을 따르게 될 터였다.

제갈세가 무사들이 분기를 뿜으면서도 검을 빼 들지 못한 것이 그 증거였다.

* * *

제갈소현이 돌아가고, 남궁조와 남궁진휘가 마주앉았다.

“가주님도 이번엔 좀 과하다 싶은데…….”

“경고는 확실히 해 두는 게 좋다고 하시더군요. 진화에게 관심을 두게 하는 것보다 남궁세가를 이기는 데에 집중시키는 것이, 진화의 안전에 좋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그래……?”

“숙부님이 제왕무적단을 끌고 올라오시는 것도 막을 겸사겸사요.”

남궁조와 남궁진휘가 동시에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길길이 날뛰었을 남궁경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눈빛이 돌변했다.

“아까 그 계집의 눈을 보았더냐?”

“살기 하나 가릴 줄 모르더군요.”

남궁진휘가 코웃음을 쳤다.

“제 아비의 성정을 생각하면, 반드시 뒤에서 수작을 부릴 게다.”

“제갈세가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남궁진휘의 말에 남궁조가 피식 웃었다.

“호부 밑에 죄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만 났으니……. 쯧쯧.”

남궁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제갈세가의 태상가주, 천수현인 제갈길현은 귀천성의 공세를 멈춘 정사 연합의 대반격을 이끌어 낸 사람이었다.

그런 영웅의 뒤를 이은 이가 현 제갈가주였다.

그런데 그가 하고 있는 일이라곤, 고작 정의맹에 틀어 앉아 권력이나 탐하는 것이라니.

남궁조가 장난스럽게 드러낸 적대감은 그 밑에 깔린 짙은 혐오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지켜보거라. 남궁이라면 호시탐탐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많다.”

“알고 있습니다. 관도회 내부에서도 벌써 움직임이 있더군요.”

“제갈수현이 움직이더냐?”

“신입 관도가 들어오면 늘 하던 짓이지요. 하지만 요즘 씀씀이가 좀 수상해졌더군요. 관도회에서 이상한 움직임도 있고요.”

“그렇구나. 따로 사람을 붙여 주랴?”

“아닙니다. 아직은 제 사람만으로 충분합니다.”

남궁진휘의 말에 남궁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휘라면 덮어 놓고 신뢰할 수 있었으니.

단지 가문의 소가주라서가 아니라, 남궁진휘의 일 처리는 후지기수의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너야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진화가 걱정이구나. 저 어린 녀석이 수석이라니, 참 대견하긴 하지만……. 거기가 어디 무공만으로 되는 곳이더냐.”

정의맹을 이끌어 갈 인재를 키운다는 것이, 미래 권력을 잡기 위한 작은 전쟁터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보면 정의무학관이야말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욱 거칠고 교활한 전쟁터였다.

만면에 흐뭇함이 가득하면서도, 남궁조가 걱정을 버릴 수 없는 이유였다.

남궁조의 한숨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돌연 남궁진휘에게서 피식 웃음소리가 새었다.

“큭.”

제갈소현이 사과하러 와서 저를 노려보는데, 제갈세가가 가져온 재물만 쳐다보고 있던 사촌동생이 생각난 것이다.

“아마, 진화도 괜찮을 겁니다.”

“응?”

“그 아이가 순수하게 대하는 건 ‘남궁’뿐입니다. 그 외에는 믿지도 않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죠.”

남궁진휘가 조금 씁쓸한 듯 말했다.

남궁조는 남궁진휘의 말이 의외인 듯했다.

그가 본 진화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처럼 제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일행 속에 조용히 있는 모습뿐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 구해진 기억이 있어서인지, 일종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본가 어른들이나 가족들에겐 싫은 것도 꾹 참고 거절을 모르는데, 그게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무슨 말을 한다고.

결론은 또 팔불출인가.

남궁조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연무장에서 남궁구와 웃고 있는 진화를 보는 남궁진휘의 눈빛은 여전히 애틋했으니.

‘너의 세상도 조금은 더 넓어져야 할 텐데…….’

남궁진휘가 어린 동생에게 바라는 한 가지였다.

* * *

남궁진휘의 시선을 느낀 진화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남궁구가 능글맞게 웃었다.

“흐흐, 마치 처음 서당에 보내는 꼬맹이를 보시는 듯하는군.”

“닥쳐.”

“형님은 알까? 그 꼬맹이 동생이 지금 제갈소현을 아주 보내 버릴 작정을 하고 있단 걸.”

남궁구의 말에 진화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도 없이 감히 형님께 살기를 흘렸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사실, 멍청한 제갈소현이 자신에게 흘리는 살기 따윈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소현이 남궁진휘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면 문제가 달라졌다.

“감시 잘해.”

“아아. 잔소리는 사양한다.”

남궁구의 대답에 진화도 웃고 말았다.

그렇게 진화가 돌아서 가려던 참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진화가 남궁구를 돌아보았다.

제일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던 것이다.

“구, 위험한 곳까지 들어가지 마라.”

“에이, 날 뭐로 보고.”

“너 남궁구잖아.”

남궁구는 위험 지향형 인간이었다.

심지어 남궁진휘와 함께 죽었던.

“야!”

남궁구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진화는 남궁구에게 일을 맡기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감시만 해, 딱 감시만.”

“알았다니까.”

“가문의 어린 매가 상하면 어른들 볼 낯이…….”

“아아아악! 모르는 척하라고!”

진화의 잔소리에 남궁구가 기겁하며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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