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누를 진(鎭) 액화 화(禍) : 서열 정리(2)
정의무학관의 입관식.
백두 명의 신입 관도들이 주어진 흰색 무명 부목을 입고 연무장에 정렬해 있었다.
그들 양쪽으로는 청색 무복을 입은 삼 년 차와 홍색 무복의 이 년 차들이 박수를 쳐 주고 있었다.
“아이 참, 난 정말 이 촌스러운 감색이 싫어. 차라리 새빨간색이 좋은데.”
“네 전신을 피로 물들여 주기 전에 닥쳐.”
“어머, 야만인 같으니.”
몇몇 눈에 띄는 인물들이 벌써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받았다.
앞으로 정의맹에 진출해서, 요직에 앉을 동량들.
아직은 그런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가족과 문파 사람들은 물론 정의맹의 축하 사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입관식에 참석해서 신입 관도들을 축하했다.
식순에 따라 정의맹과 정의무학관의 연혁이 읊어지고, 여러 인사들의 축하 인사말이 이어졌다.
관도들의 입장에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다들 기쁘고 들뜬 마음에 그걸 티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관주님의 환영사가 있겠습니다.”
안내와 함께, 그늘 속에 가려 있던 장년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처럼 붉은 장포에 양쪽 소매로 황금 용이 포효하고 있는 무시무한 옷을 입은 사내.
금룡일권 나무열.
십이좌회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들 못지않은 활약을 한 영웅으로, 권마 태금호와 칠 주야에 걸친 혈투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전설이었다.
하늘로 치솟을 듯 들린 검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웃지 마라-!”
사자후처럼 터져 나오는 말에, 화기애애하던 입관식장이 차갑게 식었다.
“너희의 입관을 축하한다. 앞으로 제일 먼저 죽어 버릴 놈들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정의맹 인사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래는 전쟁이다-!”
단 한마디에 장내가 술렁였다.
“전쟁은 기정사실이다! 귀천성 놈들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정의무학관 관주로서 가질 만한 견해지만, 그걸 꼭 이 자리에서 말해야 했을까.
몇몇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유감스럽지만, 정의무학관에서 가르치는 건 살아남는 법이 아니다! 오히려 전장과 가깝기 때문에 죽기도 쉽다! 죽을 각오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나가라-! 정의무학관에서 가르치는 것은, 정도의 신념에서 어긋나고 인간의 도덕률에도 어긋난다! 도리를 간직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도 나가라-!”
금룡일권 나무열의 연설은 파격적이었지만, 신입 관도들의 집중도를 순식간에 끌어 올렸다.
“정의무학관은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적을 죽이는 법! 정도를 저버려서라도 승리하는 법! 그래서 세상의 정도와 세상의 목숨을 지키는 법을 가르친다-!”
정의무학관 관주로서, 나무열이 가진 신념이자 교육 철학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정의무학관의 관주로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지키는 법……!’
진화는 벌써 나무열의 신념과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각오가 된 자들은, 정의무학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짝짝짝짝짝-!
정의무학관 무사부들과 관도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금룡일권 나무열의 환영사가 끝이 났다.
그러나 신입 관도들의 입관식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숙청관(淑聽館).
진화를 비롯한 신입 관도들이 묵을 숙소였다.
정의무학관 내에는 세 개의 기숙관이 있었는데, 한번 배정받은 숙소는 삼 년간 바뀌지 않았다. 현재 이 년 차인 홍의생들이 인내관(忍耐館), 삼 년 차인 청의생들이 현해관(賢諧館)에 기거하고 있었다.
“좋네.”
“생각보다 깨끗하네. 이름이 숙청관이라 그런가?”
모두 사생활은 보장하지 않는 확 트인 개방형 육 인 일실이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방은 육 인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이름이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정의무학관에는 슬픈 전설이 있지.”
“전설?”
“기숙관 이름과 관도생들의 성향이 함께 간다는 거다.”
“흥, 미신이군.”
남궁구의 말에 남궁교명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정확한 분석이다.”
“형님에게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다 맞아떨어졌다.”
“아, 너희는……?”
“이런, 우리 소개가 늦었군.”
“위로 큰 쪽이 팽수, 옆으로 큰 쪽이 팽신!”
“우리가 팽가 쌍둥이다!”
“어…… 그래. 앞으로 부디 잘 지내자.”
사실 이미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참신한 소개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진화는 남궁구, 남궁교명, 팽수, 팽신 형제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한 명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다고 해야 할지, 걱정된다고 해야 할지.
방이 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성적순으로 정했다고 들었는데, 너희는 모두 남궁 출신인가?”
팽신이 묻는 말에, 진화는 그제야 방이 정해진 기준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남궁구라고 해. 여기 곱게 생긴 녀석이 남궁진화고, 저기 싸가지없게 생긴 놈이 남궁교명.”
남궁구의 소개에 팽가 쌍둥이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차별적이었지만, 동시에 팽가 쌍둥이의 소개처럼 매우 직관적이었다.
“그건 그렇고, 방 배정이 성적순이면 나머지 한 명은……?”
남궁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하하하! 늦을 뻔했군요. 저는 현오라고 합니다!”
마소승 현오가 모두에게 인사했다.
그가 진화의 뒤를 이은 차석 중 하나였다.
“그거 만두인가?”
“아, 같이 먹으려고 넉넉하게 사 왔습니다!”
“오! 소림승답게 배려심이 있군.”
현오가 품에 가득 안고 들어온 따끈따끈한 고기만두에, 팽가 형제는 물론 진화까지 기분 좋게 둘러앉았다.
“저기, 나만 이상해? 스님이 고기만두를 왜 사 와?”
“기분 나쁘지만, 같은 생각이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스님과 도란도란 고기만두의 포장을 까고 있는 일행의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보았다.
진화는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대화를 못 들은 척했다.
스님이 사람도 죽이는 판국에 고기만두가 대수겠는가.
모르는 또래와 어울리는 게 마치 새 친구를 사귄 기분이었고, 무엇보다 만두가 정말 맛있었다.
“하남현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입니다. 제가 여기 가려고 산문을 몇 번이나 넘었는지. 하마터면 파계당할 뻔했습니다! 하하하!”
“고생 많았겠군.”
“파계당하기 전에, 정의무학관에 입관하게 되어서 다행이지요. 관세음보살의 자비입니다! 하하!”
“이 만두집이 어디라고요?”
진화는 만두집을 알아다가 남궁조와 남궁진휘에게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생각보다 훨씬 적응을 잘한 첫날.
진화와 다섯 일행은 만두로 배를 채우고 대강당으로 갔다.
신입 관도들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인 안내는 이제 시작되었다
잠시 뒤, 대강당으로 정의무학관의 무사부들이 들어왔다.
단상의 좌석은 모두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눈에 띄는 이들은, 수석 무사부인 각우와 홍채연, 사진명을 비롯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보낸 열다섯 명의 무사부들이었다.
“너희 신입 관도들은 앞으로 백의생이라 불리게 될 거다. 백의생의 위로 홍의생과 청의생이 있고, 더 위로는 현재 순환 전투 중인 금, 은, 동의생이 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고, 백의생들은 지금부터 잘 들어라!”
수석 무사부인 각우가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각자의 방에 일과표가 부착되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칠 주야를 기준으로 일과에 따라 움직이면 된다. 수련이라고 적힌 일과 후 시간의 경우엔, 각자 무사부들을 따라 움직이면 된다. 단, 술시까지는 무조건 기숙관으로 돌아온다!”
정의무학관은 이미 완성된 무인들을 선별한 곳이기에, 따로 가르치는 무공은 없었다.
명문 출신들은 그들만의 독문 무공을 수련하기에 각자의 무사부들에게 지도를 받고, 그럴 수 없는 중소 문파 출신들은 각자 수련하되 수석 무사부들의 도움을 받았다.
불공평할 수 있지만, 합리적인 처사였다.
각 문파의 무사부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남궁조가 눈빛으로 진화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뒷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모습에 백의생들이 술렁거렸다.
백면과 흑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무공을 모르는 학사나 상인처럼 보이는 사람 그리고 저자에 널린 취객으로 보이는 사람까지.
모두 무공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정의무학관에서 관도들에게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칠 사람들이었으니.
“앞으로 너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줄 사부들이다. 앞으로 너희들은 수석 무사부들에게 정의맹 무인들의 약속된 전투 전략과 합격술, 독과 암기술, 약간의 의술을 포함한 생존술, 귀천성의 첩자를 색출하고 쫓는 추격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라승 각우와 백화선녀 홍채연, 혈랑도 사진명이 먼저 나섰다.
누가 뭘 가르칠지는 알려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학사와 상인으로 보이던 사부들이 나섰다.
“이들은 행정과 회계에 필요한 산술, 관부와 이해를 조정할 법률을 가르칠 것이다. 글을 모르는 이들은 천자문부터 뗀다.”
의외로 중소 문파 출신 중에는 글을 모르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불리한 일이었다.
명문 출신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학문을 익히고 제왕학을 배워 왔으니, 성적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익혀야 했다.
벌써 몇몇 이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분은 신화투객 가좌룡 님이시다! 중요 물품과 전서를 지키는 보안술을 알려 줄 것이다.”
취객처럼 보이던 사부의 정체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신출귀몰한 도둑이라 불리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귀천맹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은 보급 물자와 재물뿐 아니라 중요한 정보가 담기 전서도 포함이라.
세상에서 가장 잘 훔치는 이에게, 물건을 잘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무학관의 진수는 이제부터였다.
흑면과 백면을 쓴 이들이었다.
“흑면 사부와 백면 사부는, 앞으로 죄인을 신문하고 고문하는 기술과 정의맹에서 사용하는 비문과 비문해독법을 가르칠 것이다.”
사파에서나 가르칠 것들이었지만, 따지자면 정의무학관의 교육관이 가장 잘 담긴 과목들이라.
흑면과 백면 사부의 존재만으로, 대강당이 숙연해졌다.
* * *
입관 행사는 백의생들에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입관식은 미리 정의맹과 무림의 주요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소현은 입관식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아버지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고작, 천한 양자 하나 때문에 내가 입관식조차 참석하지 못하다니!”
남궁가주가 내린 처분에 따라, 제갈소현은 진화와 함께하는 공식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제갈가주가 남궁세가의 처분을 받아들인 것이다.
“오라버니, 정말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야?”
제갈소현은 입관식 대신 정의무학관 본관에 와 있었다.
그곳에 관도회의 부회주이자 제갈세가의 소가주, 제갈후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소현은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제갈후현의 앞에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제갈후현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내가 어찌하겠느냐.”
“오라버니가 소가주잖아! 제갈세가의 적녀인 내가 양자에게 밀려나다니, 이건 제갈세가의 자존심 문제라고!”
제갈소현이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제갈후현에게 닿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자신의 업무만 보고 있던 제갈후현의 입에서 짧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말은 바로 하자꾸나. 제갈이 아니라 네 자존심이겠지.”
제갈후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제갈소현을 보았다.
곧게 허리를 펴고 앉은 제갈후현은, 큰 키에 두꺼운 체구, 툭 불거진 광대와 턱 선을 가진, 전형적인 장군상을 하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나오는 안광이, 제갈소현을 내리눌렀다.
“어린 동생아, 네 어리석은 행동으로 제갈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는지 아느냐? 막심한 손해는 어떠하고? 오죽하면 아버지께서 네 모든 가문의 행사를 막았을까.”
“오라버니!”
속을 파는 듯한 제갈후현의 말에 제갈소현이 빽 소리를 지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오라버니가 선뜻 나서 줄 리도 없지! 오라버니는 자기와 가문밖에 모르잖아?”
제갈소현이 비꼬듯 말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말은 제갈후현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너도, 이제라도 네 자신과 가문을 좀 챙기는 것이 어떠하냐? 남궁의 양자에게조차 밀려나서 공식석상에 나오지 못하는 몸이라니. 몸값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가문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기도 텄지 않느냐.”
“이……!”
한배에서 난 친형제에게 할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제갈의 다음을 이어받을 오라비가 제게 가진 우애의 전부였다.
제갈소현은 울컥, 서러움 대신 독기가 솟아올랐다.
“좋아. 그렇다면 거래를 해.”
“뭐? 거래?”
제갈후현의 눈이 그제야 흥미를 보였다.
“내가 가진 연환상단의 지분을 줄게. 대신 그 자식을 내 앞에 끌고 와 줘!”
“하하하! 재미있는 제안이구나.”
제갈후현이 유쾌하게 웃었지만, 이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제갈소현이 알 바 아니었다.
“그 자식을 죽여 주면, 내 소유의 자화상단을 줄게.”
제갈소현이 독기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자존심은 재물보다, 천한 양자의 목숨보다 귀했다.
“호오! ……내 동생이, 이제 좀 제갈답구나.”
제갈후현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제갈소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