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이야기 화(話) : 누구냐(1)
시산혈해(屍山血海).
비릿한 피 냄새와 언덕처럼 쌓인 시체.
전쟁터에서 나던 냄새, 늘 보던 광경이었다.
인형처럼 널브러진 주검들은 모두 방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사람이라.
지금 자신이 자칫하면 저 주검과 같이 될 수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짐 더미처럼 쌓이는 시체를 보며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전쟁을 겪어 보지 못했던 현 관도생들은, 이제야 귀천성의 부활이 어떤 뜻인지 실감할 것 같았다.
시체들을 모두 의선문까지 운송하며, 상황은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 * *
상황이 모두 끝나자, 새벽이 되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진화는 다시 숙청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궁진휘와 남궁세가의 장원으로 왔다.
“우리 진화, 형님 뒤를 밟은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야지?”
“저, 그게, 일단 이 사람들부터…….”
진화가 남궁진휘의 눈을 피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그래요! 일단 얘들 좀 꺼내고, 둘이 오붓하게 이야기하십시오!”
호현기가 진화를 도와주었다.
그들의 앞에는 관 네 짝이 있었는데, 호현기와 남궁구가 흔적 없이 관 뚜껑을 열기 위해 끙끙대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 와중에 못질을 이렇게 꼼꼼하게 해 놓은 거냐?”
“남궁교명 이 새끼! 일부러 이런 게 분명합니다!”
호현기와 남궁구는 오만상을 찡그린 채 뒤처리를 한 남궁교명을 성토했다.
못을 어떻게 밀어 넣은 것인지, 끝이 잡히지도 않았다.
그때 진화가 슬금슬금 남궁진휘의 눈빛을 피해 그들의 곁으로 왔다.
파지짓-!
날붙이는 본래 뇌기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라.
음기를 못에 보내고 손끝의 양기로 끌어오는 건, 진화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스-윽.
“…….”
진화의 손짓 한 번에 못이 딸려 나왔다.
호현기와 남궁구가 붉게 변한 손가락을 호호 불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진화를 보았다.
* * *
남궁세가 장원에서도 가장 구석진 별채의 지하.
횃불을 켜 둬야 하는 음산한 분위기에, 사방이 커다란 돌벽으로 막혀 있는 곳.
뚜껑이 열린 관 속에 파리한 안색의 사내들이 누워 있었다.
죽은 듯 보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었다.
남궁진휘와 진화는 제갈후현 몰래, 붙잡은 포로들을 관에 있던 진짜 시체 네 구와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백소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들을 남궁세가 장원으로 빼돌렸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호현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속옷만 입고 누운 사내들의 모습이 가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정의맹으로 보내는 게 나았을까?”
“나중에 우리가 이들을 빼돌렸다는 걸 문제 삼을 겁니다.”
호현기는 정의맹에 비영문에 대해 알리면서 생존자를 쏙 빼 놓은 이유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지 걱정했다.
하지만 남궁진휘는 태연했다.
“그것도 다른 문제가 없을 때 이야기겠지.”
남궁진휘의 말에 호현기가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남궁진휘가 진화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네가 말해 볼래?’ 하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시험이라기보다는 ‘너는 내 맘 알지?’에 더 가까웠다.
결국 진화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든 생존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 자리에 있던 관도생들 중 하나가 실수를 하든, 어디선가 우리가 모르는 목격자가 나타나든.”
남궁진휘가 ‘함구’를 명하기는 했지만,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형님은 그걸 노리시는 거지요?”
진화가 묻자, 남궁진휘가 싱긋 웃어 보였다.
“내일 비밀리에 정의맹으로 이송할 거다. 그 전에, 비영문이 누구의 의뢰를 받았을까, 의뢰의 내용은 뭘까, 궁금하지 않아?”
“하나도 안 궁금합니다.”
호현기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남궁진휘는 그의 의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영문이 노린 건 시체일 가능성이 커.”
진화의 눈이 커졌다.
진화가 가장 궁금해하던 부분이었다.
비영문이 노린 것이 남궁진휘인지, 이관되는 시체인지.
“어찌 확신하십니까?”
“날 노렸다면 관도회실에 있을 때 노렸어야 맞지. 정의무학관의 대낮 경계가 그리 철통같은 것도 아니고, 내 옆엔 호현기 너밖에 없는데. 굳이 비밀 임무에 나서 주변에 실력자들이 바글바글할 때 노릴 필요가 없잖아?”
호현기가 반발했지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 약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작년부터 비정상적인 성장을 보인 관도들도 모두, 제갈세가와 가까운 문파들이었지. 그래서 비밀리에 시체 이관을 준비한 거고. 그런데 습격이 있고 제갈후현은 지원에 늦었네? 이건 뭐, 의심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 수준이지.”
역시 형님은 제갈세가를 의심하고 있었던가?
진화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남궁진휘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그는 자신이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진화는 달랐다.
“제갈가주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포로들은 내일 바로 정의맹으로 던질 거야. 비영문에 비밀로 하기 위해 빼돌렸다고 둘러대면 되지. 다만, 남궁세가에서 이들을 따로 데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누군가는, 마음고생 좀 하겠지?”
“혹 그것 때문에 저들을 이리로 빼돌린 겁니까? 위험하게?”
“날 고생시킨 대가는 치르게 해야지. 고생 중에 최고는 마음고생이라고. 하하하하하!”
호현기의 작은 반발도 가뿐하게 무시한 채, 남궁진휘가 시원하게 웃었다.
“……저래도 소중하고 존경하는 형님입니까?”
호현기가 기가 찬 듯 진화에게 물었다.
하지만 호현기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으니.
진화의 기억 속 남궁진휘는 죽은 사람이라, 애초에 기대치가 한없이 낮았다.
진화는 그저 남궁진휘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하루 만에 비영문도의 심문을 마칠 수 있을까요?”
“남궁조 숙부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당장 심문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나마 남궁진휘를 말릴 수 있는 진화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고, 남궁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아이고! 내 속만 터지지!”
결국 호현기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
“얘들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남궁조가 들어왔다.
“우리 복덩이, 자다 일어나서 소가주님을 구했다고?”
남궁조 안의 진화의 애칭이 변했다.
기별을 받고 얼마나 놀랐던가.
비영문의 습격이라니!
그들의 목적이 아직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남궁조에게 중요한 것은 비영문이 남궁진휘의 안위를 위협한 그 자체라!
“마비는 아직 풀지 않았습니다.”
“허허, 야무지기도 하지.”
벌써부터 원하는 대로 상대의 상태를 조종할 정도로 뇌기를 다루는 것 하며 빈틈없는 조치까지.
남궁조가 흐뭇하게 웃으며 진화를 보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진화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건장한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철로 된 의자를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옷을 홀딱 벗긴 네 사람을 의자에 앉히고 사지를 결박시킨 후 다시 나갔다.
결박된 네 사람의 앞에 서자, 남궁조의 표정이 돌변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도 놀라운 쥐새끼들이 감히 남궁을 노려?”
남궁조의 눈에도 번개가 내리쳤다.
남궁세가에 천뢰제왕신공을 제대로 익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남궁조였으니.
“……크아아아아악---!”
남궁조가 뇌기를 흘려 마비를 풀어 내는 동안, 잘 훈련된 비영문도조차 비명을 참지 못했다.
사람이 가장 극심하게 느끼는 고통이 바로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라.
그런 면에서, 천뢰제왕신공은 남궁의 무공 중 인간을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데 가장 특화된 무공이었다.
정의맹에서 알아낼 만한 건, 오늘 밤 남궁조가 모조리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끄아아아악--!”
“남궁을 건드렸으니, 정의맹에 가기 전까지 편하게 잘 생각은 하지 마라.”
남궁조의 손길이 닿는 족족 비명문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불편한 광경이었지만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남궁진휘가 슬쩍 진화의 눈을 가리려는데, 진화는 오히려 덤덤하게 남궁조를 불렀다.
“저기, 숙부님.”
진화가 제일 마지막에 있던 사내를 가리켰다.
“이자는 따로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왜 그러느냐?”
남궁조가 의아한 듯 물었다.
진화가 대답 대신 마지막 사내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목된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이자의 문신 속에 좀 더 짙게…….”
“크으읍!”
진화의 손이 마지막 사내의 쇄골에 닿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남궁세가 사람들은 사내의 고통보다 다른 곳에 눈길이 갔으니.
“귀천성의 표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화의 말과 함께 사내의 쇄골에서 뇌기가 꿈틀거리는 순간.
비영문의 검은 초승달 문신 속에 짙은 글자가 떠올랐다.
거꾸로 새겨진 천(天).
귀천성의 표식이었다.
“헉!”
“이게 무슨!”
비영문도의 문신에서 귀천성이라니!
귀천성도를 처음 보는 남궁진휘와 호현기, 남궁구는 물론, 실로 오랜만에 악몽을 떠올린 남궁조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속에서 진화가 태연하게 설명했다.
“글자 위에 점을 찍어서, 역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릴 적에 많이 보았던 것이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진화의 말에 일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어릴 적 진화의 모습을 기억하는 남궁진휘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남궁진휘는 그대로 진화의 눈을 가리듯 얼굴을 품에 넣었다.
아직도 가슴팍까지밖에 오지 않는 어린 동생.
용케 그걸 찾아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좀 잊어버리지 그랬느냐.”
남궁진휘의 말이 모두의 가슴을 때렸다.
남궁조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의맹에 알리고, 본가에도 기별을 보내야겠구나. 비영문이 완전히 귀천성에 넘어간 것이라면 사안이 심각하다. 그놈들이 정의맹 코앞에 침투해 있는 것이니까.”
귀천성이란 그런 이름이었다.
그저 이름이 드러난 것만으로 정의맹은 물론 전 무림이 들썩이는.
하지만 남궁조가 서두르기 전, 진화가 먼저 남궁조를 붙잡았다.
“먼저, 이들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 뭘 말이냐?”
“귀천성도에게 당장 뭘 알아내는 것은 힘들겠지만, 다른 이들은 다를 겁니다. 진휘 형님은 아니라 하시지만, 확실히 해야지요. 저들이 노린 것이 남궁의 소가주인지, 의선문의 시체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정체불명의 약과 관련된 곳이 제갈세가인지, 귀천성인지.
비영문의 배후가 누구인지.
만약 약과 의뢰가 제갈세가의 짓이라면, 제갈세가가 귀천성과 손을 잡은 건지 아니면 이용만 당한 건지.
귀천성의 짓이라면, 그 약으로 무엇을 노리는지.
하지만 정작 진화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쪽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궁진휘 그리고 남궁의 안위.
진화의 뜻을 이해한 남궁조가 무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이 밤 안으로, 최선을 다해 보마.”
한쪽에서 모든 얘기를 들은 귀천성도의 눈이 불안한 듯 떨렸다.
겨우 한 번이었지만, 수하들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하들을 죽이고 자결할 수도 없었다.
영악한 남궁조가 감각을 제외한 근육의 마비를 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적 남지 않게 예쁘게 조져 주지. 말하고 싶어지면 눈짓해.”
남궁조가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사납게 웃었다.
* * *
남궁진휘가 진화를 숙소로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
남궁구와 호현기가 멀찍이서 따라왔다.
“진화야, 이제 이 우형에게 말해 줘야지? 그곳에 어찌 구를 보냈느냐?”
어차피 돌아올 질문이라.
진화는 혹시 남궁진휘가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 약은 몹시 위험한 사안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 그것과 연관된 것을 조사하신다니…….”
“하하, 녀석아, 내가 묻는 건 이유가 아니다.”
진화가 남궁진휘를 올려다보았다.
마주한 눈에 비치는 굳건한 신뢰와 애정.
남궁진휘는 진화의 의도에 대해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 녀석이 주변에 맴도는 것은 진즉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알면서 구를 놀리신 겁니까?”
“재미가 쏠쏠하더구나.”
남궁진휘가 짓궂게 웃으며 하는 말에 진화가 슬쩍 남궁구를 돌아보았다.
소가주님이 수리부엉이입네, 고개가 사방으로 도네 어쩌네 하던 녀석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남궁진휘가 다시 물었다.
“구가 아닌 너였다면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네가 아니라 구를 보냈느냐?”
다정한 물음.
남궁진휘의 온화한 표정은 진화의 경지는 물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얼굴이라.
‘혹시 가주님께서 알려 주신 건가?’
진화가 놀란 기색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귀천비지 출신이라 따라붙는 눈이 많은데…… 제 존재가 세가에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이나 귀천성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가주님의 말씀도 있으셨고, 혹시 제 일로 남궁에 피해가 될까 걱정되어 앞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진화의 대답에 남궁진휘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화를 보았다.
저 작은 머리통에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 건지.
남궁진휘가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진화야,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네 안전이란다. 네가 위험할까 봐. 네가 무슨 민폐가 된단 말이냐? 민폐라면…… 틈만 나면 지부 기둥을 뽑는 진혜 녀석이지. 경이 숙부를 쏙 빼닮아선……. 쯧.”
남궁진휘의 마지막 말에 진화는 웃음이 나왔다.
“……저는, 누님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 좋습니다.”
“오호통재라!”
“…….”
“진화야, 우형을 구해 주어 고맙다.”
“참 다행입니다, 형님.”
진화와 남궁진휘의 입가에 달린 미소가 꽤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