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부릅뜰 진(瞋) 재앙 화(禍) : 불청객 맞이(2)
제갈소현은 자화상단의 절반을 넘겨주고 제갈후현에게 금 세 관을 받았다.
“와아!”
제갈세가의 영애로 부족함 없이 컸지만, 그녀 또한 이렇게 많은 황금을 가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갈세가라는 확실하고 든든한 거래처를 가진 자화상단은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
그 거위의 배를 가르고 고작 황금 세 관에 좋아하는 제갈소현을 보며, 제갈용성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중 두 관이면 될 거다.”
“정말요? 그럼 한 관은 제가 가져도 되는 거예요?”
애초에 상단의 절반이나 줄 필요가 없었다는 걸 생각지 않는 것인가.
제갈용성은 반색하는 제갈소현에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밤에 움직일 거다. 오늘은 숙청관에 가지 말고 기다려라.”
“네!”
밤에 움직인다.
제갈소현이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제갈용성이 조용히 제갈소현을 불렀다.
“우, 우리끼리만 가요?”
“그럼 여러 사람 끌고 갈 줄 알았더냐?”
“큰오라버니는요?”
막상 일이 닥치자, 제갈소현이 소심한 모습을 보이며 제갈후현을 찾았다.
제갈용성은 애매하게 웃으면서 도포를 건넸다.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도포로 머리끝까지 가리거라.”
“네.”
제갈소현이 다부지게 대답하며 도포를 뒤집어썼다.
제갈후현은 오지 않았다.
얻을 것을 얻은 그는 모든 귀찮은 일을 제갈용성에게 떠넘겼다.
제갈용성은 제갈소현을 데리고 조용히 제갈세가를 나갔다.
불야성같이 밝은 저잣거리.
“이쪽으로.”
제갈용성은 제갈소현을 데리고 복잡하게 움직였다.
골목을 돌고 사람들 속에 숨어들었다가, 이내 빛이 들지 않는 골목으로 빠졌다.
“오, 오라버니.”
“쉿.”
불안해하는 제갈소현의 입단속을 하며, 제갈용성은 어두운 뒷골목에서도 몇 번째인지 모를 구석을 찾아들어 갔다.
잠시 뒤, 허름한 문 앞에 선 제갈용성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멈칫거리던 제갈소현도 혼자 남겨지긴 싫었는지 이내 따라 들어갔다.
안이라고 밖과 다를 것은 없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작은 공간이 하나 나왔는데, 탁자 하나에 촛불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갈용성이 제갈소현에게 매고 있던 황금을 주었다.
“왜, 왜요?”
“탁자 위에 놓고, 의뢰 내용도 그 위에 올려놓고 와.”
“제가요?”
“직접.”
이곳에 오자 제갈용성도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제갈소현이 그런 제갈용성을 불안한 듯 보았다.
작은오라버니도 이상했지만, 이상한 건 그뿐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나무 문 안에 이렇게 방 하나만 있는 것도 이상했고, 손님이 왔는데 아무도 나와 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비영문이 정의맹에서도 꽁꽁 숨었다더니…….’
이상함은 곧 신비로움으로 느껴지고, 제갈소현은 제갈용성이 시키는 대로 탁자 위에 황금과 미리 적어 온 의뢰 내용이 적인 쪽지를 올렸다.
쿵.
제법 큰 소리가 울리자, 제갈소현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황금 두 관. 기간은 이번 주 이내다. 두 번 실패하지 않길 바라지.”
제갈용성은 어둠을 향해 말을 남기고, 그대로 돌아섰다.
“이, 이대로 가요?”
제갈소현이 허둥지둥 뒤를 따르며 물었지만, 제갈용성은 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남매가 다시 밝은 저자로 나오고.
“하아. 진짜 이걸로 끝이에요?”
제갈소현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고, 긴장을 떨쳐 냈다.
금세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제갈소현에, 제갈용성이 차갑게 경고했다.
“처소로 돌아갈 때까진 조용히 하거라.”
“아, 알았어요.”
제갈소현은 아직도 비영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정의맹의 눈을 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실감을 못 하는 듯했다.
그저 제갈용성이 하는 대로 따라 한 터라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준비와 주의가 들었는지 모르니, 그저 모든 것이 허탈할 정도로 쉽게 느껴진 것이다.
“처소에 돌아가서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
제갈세가에 도착해서도 제갈소현은 제갈용성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그놈이 죽는다는 거지? ……호호, 그래, 지가 별수 있어? 내가 바로 제갈세가의 진짜 영애라고!”
무려 전 재산의 삼분의 일을 쓴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소현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런 대가를 필요로 했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잠깐의 일탈이 준 짜릿함에 젖은 듯.
자신이 늘 꿈꾸던 제갈세가의 영애이자 무림의 여걸이 된 듯한 기분에 취해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 * *
인생은 실전이다.
아무리 화려한 검술을 뽐내고 높은 경지를 수련해도, 베이면 피가 나고 맞으면 아프다.
정의무학관에 있는 관도생들 대부분은 좋은 배경과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착실하게 수련해 온 이들이었다.
어려운 선발대회와 입관 시험을 뚫고 들어온 무학관 안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이어 갔다.
미래의 동량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동의생 이상이 되어 실전에 투입된 후엔, 끝까지 남아 있는 이들은 반이 조금 넘길 뿐이었다.
특히 첫 임무에서 다치거나 죽는 일이 빈번했고, 실전을 겪고 두려움에 포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멋지게 검기를 뿜고 치열하게 겨루는 것과 죽음의 공포와 상실의 슬픔을 이겨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상대는 적이지만 인간이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람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일이었다.
그걸 당하는 입장이 되면 더 그렇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신력이 강한 이들조차 다리를 떨고 땅을 기도록 만든다.
실제로 관도생들의 수련 강도를 더 올려야 한다거나 실전 경험을 앞당겨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물론 준비도 없이 실전에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지난 비영문의 기습 공격을 같이 막았던 남궁세가의 백의생 삼인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 부문의 진짜 전설은 따로 있었으니.
인생에서 모든 부분을 실전으로 만들고 행하며, 전장에 투입된 첫 임무에서부터 적 사십 인을 도륙하며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
“아!”
금의장실의 문짝이 날아간 것을 발견한 금의부장 무현이 탄성을 뱉었다.
훤하게 뚫린 집무실 안에도 온갖 집기들이 부서지고, 특히 금의장의 의자는 기분 나쁘도록 목 받침대 위로만 날아가 있었다.
그 위로 휘갈겨 쓴 듯한 쪽지가 남아 있었다.
제갈후현 거.
저 유치찬란한 내용과 고개를 비틀어야 겨우 알아볼 악필.
들리는 소란으론, 은의장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청견화(淸犬花), 아니 청명화(淸明花) 남궁진혜가 온 것이 분명했다.
“종남에서 왔나 보네.”
“지금은 어디로 갔지?”
“제갈세가로 바로 간 건 아니겠죠?”
“……일단 남궁 회주님께 빨리 연락해라.”
금의부장 무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헉. 헉. 떠, 떴습니다!”
“우리도 알아. 보고 있어.”
“아니요. 이거 다 부수고 제갈세가에 갔다가, 앞에서 잠복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잡았답니다. 회주님이랑 정의맹으로 들어갔대요!”
동의장 현각의 따끈한 정보에, 남은 이들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한편.
밖의 소란과 달리 의선문에서의 나날은 조용하고 무료했다.
의선문 외부 혜민당에서는 여전히 환자를 받고 있었지만, 의선문 내부는 입원해 있던 환자들까지 다른 곳으로 비워졌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지고, 정의맹과 무학관 소속 무사들도 늘어났다.
비영문 습격으로부터 칠 주야가 거의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올 때가 되긴 했지.’
진화와 현오가 있는 곳 또한 검시방이 있는 곳과 더 먼 곳으로 옮겨졌다.
현오는 열이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순조롭게 낫는 중이었다.
“우아! 오향육계! 제일 좋아하는 건데!”
대체 평생 소림에 있었던 사람이 저건 언제 먹어 봤던 걸까.
처음에는 현오가 같이 중독된 데에 대해서 책임을 느꼈던 진화는, 매일 마음껏 육식을 하고 푸지게 자는 현오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덜었다.
심지어 현오를 따라 증상을 조절하다가 큰일 날 뻔했다.
“이제 사흘째인가? 우리 내일 복귀지?”
“그……렇죠.”
“아아, 말도 안 돼! 부처님, 절 버리십니까!”
현오가 극락에서 쫓겨나는 환생자처럼 이불을 움켜잡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내일 복귀하는 것조차 온전히 현오 때문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그 열향화를 소화시켜 버릴 줄이야!
하루 정도 열이 오르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더니, 해약 한 사발에 모든 독 기운이 사라졌다.
처음에 현오를 보고 증상을 조절하던 진화는, 백소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을 보고 얼른 다시 몸에 열기를 끌어 올려야 했다.
“부처님, 이 슬픈 제자에게 자비를 주소서! 이틀만 더, 제게 설사를 주소서! 아미타불이시여!”
“……현오가 어제 오늘 먹은 것만, 돼지, 소, 오리에 닭까지. 그만하면 부처님도 자비를 많이 베푸신 것 같은데요?”
진화가 아픈 동안 더 살이 오른 현오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내일 나가려면 어서 짐 싸야 해요.”
“아, 섭섭합니다, 부처님!”
진화가 현오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내일 당장 의선문을 나가게 된 진화도 그리 속이 편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떻게 의선문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제 나가라는 것을 어떻게 아픈 척해서 남았는데!
그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었다.
비영문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하지만 비영문에게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진화는 오늘이야말로 비영문이 습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철칙(鐵則)이란 변경하거나 어길 수 없는 규칙이었다.
설사 비영문이 이 일로 멸문에 들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사흘.
그중에서 오늘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오늘 시도를 해야 혹시 실패하더라도 한 번 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비영문이 세 번까지 시도한 의뢰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밤이 되어 정적이 흐르자, 의선문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그리고 바람조차 멈춘 듯한 순간.
깜깜한 어둠 속에서 훤히 밝혀진 담벼락 안으로 줄이 넘어왔다.
“뭐…… 컥!”
스윽-!
쉐엑! 푹! 푹!
잠깐의 푸스럭거림 이후, 한쪽 담벼락의 불이 모두 꺼졌다.
“습격이다! 좌측! 좌측!”
“으아악!”
피이잉-! 푸-욱! 푹. 푹!
불이 꺼진 담벼락으로 달려가던 무사들이 쓰러졌다.
아무것도 없는 듯하던 담벼락에서 튀어나온 비도와 화살이 무사들의 목과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점점, 담벼락의 불들이 모두 꺼졌다.
“집중해! 검시방으로 모여!”
“비영문이다! 눈으로 보지 말고 기감으로 판단해라!”
챙-!
챙! 챙!
어느새 맞부딪힌 듯, 무기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의선문의 밤을 채웠다.
그리고 그 소란에, 진화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떴다.
스르륵.
진화가 몸을 일으켰다.
“나한테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진화의 시선이 제 목 끝에 대어진 칼날을 따라, 비영문도를 향했다.
그리고 진화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가 싶더니.
“크억!”
채-앵!
비영문도가 칼을 떨어뜨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비영문도들이 일제히 진화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퍼-억!
한쪽에서 베개가 날아왔다.
“으어헉!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남궁 시주!”
잠에서 깬 현오가 놀라서 베개를 휘두르며 진화의 곁에 섰다.
진화가 현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자신의 방에 습격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현오가 곁에 있으니, 마음껏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등 떠미는 건데.’
진화가 현오를 보며 후회를 했다.
“비영문의 습격입니다.”
“그게 무슨…… 우아악!”
주변을 둘러본 현오는, 방 안을 까맣게 채운 비영문도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신호로, 비영문도들이 일제히 진화와 현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