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고할 진(診) 허물 화(禍) : 술래잡기(3)
밤이 깊은 숙청관.
고요한 정적 속에서 거친 발소리가 울려 퍼지자, 잠귀가 밝은 이들이 하나둘 밖을 내다보았다.
당혜군과 나하연도 굳은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발소리가, 그녀들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된 얼굴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때.
덜컹-!
큰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
어스름한 달빛에 슬쩍 금의생복이 비치는가 싶더니, 큰 키에 당당한 체구의 여인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여인은 주변에 일어나 있는 이들의 얼굴을 스윽 확인하더니, 단숨에 한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침상 주인의 머리를 채를 잡아 땅으로 끌어내렸다.
“꺄아--!”
아닌 밤중에 봉변을 당한 제갈소현이 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제 머리칼을 잡은 상대의 손을 붙잡았는데, 그럴수록 상대는 더 세게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야, 내가 너 또 걸리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이, 이거 놔! 왜 이래요! 미쳤어요?”
따라오라는 소리도 없이, 남궁진혜가 제갈소현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갔다.
“꺄악-! 살려 줘-! 이거 놓으라고!”
제갈소현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밤중의 소란에 백의생이 모두 제갈소현이 남궁진혜의 손에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당혜군과 나하연을 비롯한 병 조 조원들 모두 그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선뜻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단은 상대가 금의생이었고, 적이 아니라면 제갈소현을 도와줄 어떤 의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문보다 훨씬 미쳤군. 야밤에 이렇게 제갈세가 여식을 저런 식으로 끌고 가다니…….”
“저 사람이 누군데?”
“청명화 남궁진혜! 넌 누군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었니?”
“아니, 제갈소현은 알아.”
……저년이나 이년이나.
당혜군이 남궁진혜를 보던 눈빛 그대로 나하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시각.
정의무학관 동의생들이 제갈세가 본가 장원 앞에서 대치했다.
“조사할 것이 있어서 왔다. 가주께 알리고 문을 열어라!”
혈랑도 사진명의 말에, 당황하던 제갈세가 무사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제갈가주가 가신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입가엔 미소를 달았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고요했다.
“혈랑도, 오랜만이군요.”
“제갈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가주와 사진명이 반갑게 마주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제갈가주는 윗사람처럼 고개만 까닥였고, 사진명 또한 형식적인 말만 건넸다.
“이 야심한 시간에 내 집에는 어쩐 일이오?”
“송구하지만 가주님 댁에 조사할 것이 생겼습니다. 협조 좀 해 주시겠습니까?”
사진명의 말에 제갈가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집에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정확한 내용은 밝히지 않는 사진명의 말이 거슬렸던 참이다.
하지만 겉으로나마 공손하게 묻는 사진명에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정의무학관 관도생들 앞에서 제갈세가에 뭔가 수상한 것이 있다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은데 공사가 다망하군요. 정확히 어디를 조사할 것인지 말해 주겠소? 본가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도 있어서 말이오.”
“백의생 남궁진화와 현오를 중독시킨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오! 그렇소?”
시체라는 말에, 제갈가주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게 이 댁의 하인이지 뭡니까. 게다가 독도…….”
약을 올리듯 말을 길게 늘이는 사진명의 태도에, 제갈가주의 눈빛이 점점 식어 내렸다.
“송구하오나 독도 이 댁에서 나온 듯합니다.”
“허어! 어찌! ……한데, 다 근거가 있는 것이겠지요?”
제갈가주가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오만하게 턱 끝을 올리고 물었다.
그의 눈빛이 ‘만약 근거가 없다면 각오하라’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에 겁을 먹을 사진명이었다면 혈랑도라 불리지도 않았다.
“열향화는 매우 고급 약재라, 알고 보면 사용하는 곳에만 유통되는 것이죠. 양청현에는 정말로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제갈세가더군요. 용독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남자가 마침 이 댁의 하인이었고, 마침 독으로 쓰인 약재를 모두 취급하고 있는 곳이 제갈세가밖에 없으니……. 아, 최근 제갈소현의 돈이 하인에게 흘러간 정황도 있더군요.”
열향화가 어떤 약재인지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제갈가주의 입술이 미세하게 꿈틀거렸으니.
“제갈소현은 일전에 남궁진화와 좋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지요?”
사진명이 날린 회심의 한마디였다.
이번엔 제갈가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제갈가주는 잠깐 놀란 얼굴을 했을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우리 소현이가요? 허어! 이런이런, 내 자식이 연관이 되었다면 더 협조해야지요. 약재를 다루는 여주관이 있습니다. 그치에게 가 보시면 집안의 약재 관리를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인들의 숙소 역시 주관을 따라가면 안내해 줄 것이오.”
“……협조 감사합니다.”
“아니오. 이 일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주길 바라겠소.”
사진명의 기대와 달리, 제갈가주는 시체가 된 하인의 숙소는 물론 약재 관리 하인까지 순순히 내어주었다.
‘정녕 몰랐던 거 맞나?’
자식이 독살 미수에 관련이 되었다는데 어떻게 저리 태연할 수 있을까.
사진명은 제게 조언까지 하며 물러서는 제갈가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 * *
하지만 제갈가주의 속이 사진명의 예상만큼 냉정한 것은 아니었다.
“비영문 습격에 무학관, 그리고 내 집이라! 허! 손쓸 수도 없게, 단번에 움직였군. 남궁의 어린놈이 제법이야. 무학관에 사람을 보내 소현이가 어찌 되었는지 알아보고, 후현이 불러와라, 지금 당장.”
“예.”
제갈가주의 명에 총관이 급하게 뛰어갔다.
잠시 후.
제갈후현이 급히 가주전에 들었다.
“아버님.”
휘-익! 퍽!
“아……!”
제갈후현의 얼굴 옆.
제갈가주가 던진 책이 벽에 맞고 떨어졌다.
놀란 제갈후현의 눈엔, 책상에 앉아 덤덤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갈가주의 얼굴이 들어왔다.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한 게냐?”
서늘하게 내려앉은 눈빛이 제갈후현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제갈후현이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침묵이 흘렀다.
제갈가주가 말없이 조용히 제갈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의 소문대로, 제갈가주는 장남 제갈후현을 아꼈다.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성과를 물어봐 주었으며, 기회를 주었다.
제갈세가의 희망을 제갈후현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모아도, 제갈세가는 천하제일 세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도 제갈가주가 정의맹의 총군사로 있었지만, 오대세가의 수좌는 양주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남궁세가였다.
이유는 단 하나, 강하지 않아서.
지력과 재력이 아무리 강한들, 무림에서 인정받는 건 무력이었다.
그래서 영약을 탐하고 무공을 연구했지만, 타고난 무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갈후현은 제갈세가에서 유일하다시피 무재를 타고난 인재였다.
“소현이의 지분을 받았더구나. 대가로 금을 주었더냐?”
“송구합니다. 상단이야 앞으로도 제가 챙겨 주면 되는 것이고, 소현이가 기가 죽은 것이 안타까워 조금 더 챙겨 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제갈후현은 동생을 아껴 벌어진 실수라 말했다.
하지만 이는 제갈가주에게 납득은커녕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하인을 죽였더구나. 입막음을 하려 한 것이냐?”
“……송구합니다.”
탕-!
“하려면 더 빨리했어야지! 더 확실히 했어야지! 비영문도 그 아이의 짓이더냐?”
“송구합니다. 소현이가 하도 그 양자를 없애고 싶어 하여 뒷세계 놈들을 연결해 준다는 것이 설마 비영문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갈후현이 고개를 숙였다.
제갈가주가 지그시 제갈후현을 보았다.
제가 관심을 가진 아들의 성정 하나 모를까.
하나같이 얼굴색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제갈 핏줄들의 특기였기에, 그것에 속을 리 없었다.
제갈소현은 애초에 비영문을 부릴 생각도 못 할 무능한 철부지였다.
아마도 제갈후현이 연결해 준 것이 맞을 것이다.
녀석은 그저 불이 제게 닿기 전에 여동생의 선에서 끊어 내려 하는 것이다.
“네가 동생들을 잘 챙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크구나. 아니, 너는 이 아비의 실망이 무섭지 않았겠지. 아니 그러냐?”
“……!”
그제야, 제갈후현의 눈이 커졌다.
“소현이는 황보세가 자식과 약혼시킬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건 네 치세에 큰 이익이 되었겠지. 너는 지금 네 큰 재산을 버린 것이다. 대책은 있겠지?”
제갈가주는 제갈후현이 놀라고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계산해라.
아무 대책도 없이 혈육을 버린 것이라면, 너는 이제 내 실망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제갈가주의 눈빛이 제갈후현을 옭아맸다.
그때, 제갈후현이 고개를 들었다.
정 많은 오라버니처럼 죄책감을 보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소현이의 값이 조금 내려간들, 제갈세가의 영애입니다. 황보 따위가 거부하진 못할 테지요. 혼약 이후에 천천히 값을 치르게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안 이상, 제갈후현은 애써 연기하지 않았다.
“비영문이 귀천성과 연결되었다. 결코 그 문제가 제갈세가 소가주에게 닿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할 것입니다.”
제갈후현이 자신 있게 답했다.
제갈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한 아들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다.
정 많고 착한 아들이 아니라, 오만한 만큼 강한 아들.
“네가 계속 이기는 한은, 앞으로도 내 실망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 일을 네가 어찌 정리할지 두고 보마. 물러가도 좋다.”
이제야 제갈가주가 아비처럼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제갈후현은 처음과 달리 당당한 태도로 처소로 돌아갔다.
제갈후현이 나간 후.
웃고 있던 제갈가주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저 녀석이 뭘 숨기는지 알아봐. 금이 어디서 났는지, 언제부터, 뭐 때문에 비영문과 연결된 건지. 전부.”
“예.”
-존명.
제갈가주의 명에 차를 따르던 총관이 답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가주전에 있던 기척들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 * *
다음 날.
정의무학관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누구나 간밤에 제갈소현이 끌려간 것을 보았지만,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진 못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다.
‘독을 넣은 하인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제갈세가의 하인이었다.’
‘간밤에 사진명 사부가 제갈세가에 들이닥쳤다.’
‘사진명 사부가 제갈세가에서 또 누군가를 끌고 왔다.’ 등등.
너무 많은 소식들이 한 번에 들려오는 통에, 관도생들은 소문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지 혼란스러워했다.
“전부 다 진실이야.”
남궁구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진화도 어젯밤 남궁진혜가 제갈소현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밤까지 무학관 옥사에 있다가, 아프다고 난리쳐서 아침에 의선문으로 옮겼대.”
“의선문? 아프다고?”
진화는 끌려갈 때까지도 건강해 보이던 제갈소현을 떠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제갈의 권력이 크긴 큰 모양이다. 무학관 옥사를 나가 요양을 할 정도면…… 따위의 생각을 한 것은 진화의 실수였다.
“우리 마녀가 머리칼을 뜯은 게 아니라 거의 머리 가죽을 뜯어 놨다는군.”
“……비영문은?”
진화는 불리한 주제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사실 제갈소현이 어찌 되든 관심이 없기도 했다.
이번 독살 미수 사건도 어찌 보면 당연히 실패할 일을 의선문에 들어가기 위해 일부러 당해 준 것이었기에, 특별히 원한이 있을 리 만무했다.
“비영문은 어제부로 완전히 박살 났어, 문주는 잡지 못했지만.”
“문주가 남아 있으면 비영문도 없어지지 않을 거야.”
“귀천성도 몇은 찾아냈지만, 살아 있는 놈은 하나라던가? 문주는 흔적도 없었대.”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생각에 빠졌다.
‘비영문으로 제갈세가나 귀천성의 연관을 알아내기 힘들 수도 있겠어. 다른 확실한 방법을 찾는 것이…….’
머리를 굴리던 진화가 고개를 들었다.
“의선문에 가 봐야겠어.”
“뭐? 왜?”
“남은 시체를 확인해 보려고.”
“그건 또 왜?”
시체라는 말에, 남궁구가 눈빛을 바꿨다.
듣기만 해도 위험해 보이는 일.
사실 이번에도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진화도 위험했지만, 진화가 구하지 않았다면 남궁진휘는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게 벌써 두 번째.
남궁교명의 일까지 합하면, 남궁구는 이제 진화의 말이라면 우물에서 숭늉을 찾아도 들어야 할 판이었다.
“백소하는 달리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고 했지?”
“깨끗해. 환자를 보는 것 아니면 연구실이야. 백소하가 시체를 보여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의외로 강단 있는 의원이라고.”
“그거야 가 보면 알 일이고.”
진화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남궁구는 의선문에 도착하고 나서, 진화가 자신감을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백 의원님, 부탁할 것이 있어서요.”
협박이었다.
“…….”
방긋 웃는 진화의 앞에서 백소하가 안절부절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