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고할 진(診) 허물 화(禍) : 술래잡기(4)
백소하.
의선의 제자이자 의선문의 유일한 후계자.
당금 무림에서 의선문이 가진 명성과 역할 덕분에, 그 후계자인 백소하가 받는 대우 역시 나빴던 적이 없었다.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인이라면 실력 있는 의원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겠는가.
“남궁진화입니다. 단천문 출신 제자들의 남아 있는 시신을 보고 싶습니다.”
싱긋 웃는 모습이 탐스러운 사과처럼 상큼했다.
그러나 사과는 붉고, 피도 붉은색이다.
“그것은 극비 사항이라, 관계자 외의 사람에게 함부로 보일 수 없습니다.”
“제 맥을 몰래 짚으셨죠?”
“……!”
“함부로 아니고 몰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처럼.”
결론은, 사과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소하는 생전 처음 당하는 협박에, 심지어 이렇게 웃는 낯에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백소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소년과 함께 온 사내 역시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 황당함을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닌가 보다.
단전이 기의 원천이라면 맥은 기의 통로다.
기의 통로를 알면 내공심법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무인의 맥을 본다는 것은, 무인의 심법을 엿본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백소하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국은 다른 곳도 아닌 남궁세가의 내공심법을 엿본 턱이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남궁세가가 백소하는 물론이고 의선문을 멸문시키려 달려들어도 할 말 없을 중죄였다.
즉, 백소하는 진화의 협박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미친놈.”
남궁구가 진화의 뒷모습을 향해 작게 내뱉은 말에, 백소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시방이 파괴된 후로, 의선문은 별채에 임시로 검시와 연구를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현재 입원 환자는 받고 있지 않았기에, 별채에 남은 환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참 공교롭게도 그 단 한 명의 환자가 제갈소현이라는 것이랄까.
죄인의 신분임에도 제갈소현이 있는 별채에는 의선문의 경비무사가 상시 경계 중이었고, 일 층 그녀의 방 앞에서는 제갈세가의 호위들이 삼엄한 보호를 하고 있었다.
별채 입구를 들어서며 남궁구가 제갈세가 무사들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하, 제갈세가 위세가 대단하긴 하네.”
“신분이 워낙 확실하고 제갈세가에서 보장을 했기에…… 단, 방 밖으로 자유롭게 나오지는 못합니다.”
백소하가 진화의 눈치를 보며 설명했다.
현재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심지어 이 별채는 얼마 전까지 진화가 묵었던 곳이었다.
피해자인 남궁세가 입장에선 매우 관대한 처사임에는 분명했다.
백소하는 남궁구가 제갈세가 호위들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한 상황.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신경질적인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내 말,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알았다니까-!”
사람이 있을 줄 몰랐는지, 문을 열고 나오던 제갈용성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진화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
“…….”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보았다.
일단 백의생인 진화와 남궁구가 선배인 제갈용성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였으나, 진화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뒤에 제갈소현을 둔 제갈용성이 먼저 입을 뗐다.
“……여긴 무슨 일이지?”
“극비 사항이라서요.”
‘알 것 없다’의 문서적 표현이었다.
진화의 대답 뒤로, 백소하의 콧김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시 찬 바람이 불고 간 듯한 어색함.
“……그럼.”
“예.”
눈치를 보던 제갈용성이 먼저 자리를 떴다.
당연한 듯 진화는 헤어지는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제갈용성이 나가는 것을 보고 진화 일행도 다시 갈 길을 가려던 때.
제대로 닫지 않은 문 사이로 제갈소현과 진화의 눈이 마주쳤다.
“너어!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제갈소현이 경기를 하듯 소리쳤다.
반응 없는 진화 대신, 남궁구가 기가 찬 듯 웃었다.
“허, 저 미친년이 지금 누구한테!”
날카로운 남궁구의 말에 제갈세가 호위들의 시선이 꽂혔다.
중간에서 백소하만이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그때, 잠시 멀뚱하게 제갈소현을 보고 있던 진화가 싱긋 웃어 보였다.
“꼴이 좋네. 구경 잘했어.”
“뭐야!”
끝이었다.
“야! 야아--!”
진화는 제갈소현이 달려들다 호위들에게 붙잡히든 말든, 제갈소현이 뒤에서 소리치든 말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갈소현은 진화에게 어떤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제갈소현의 열성적이면서 한결같이 어리석은 수작에 놀랐을 정도랄까.
‘제갈의 남매들이, 독살 미수로 갇힌 동생도 챙길 만큼 정이 돈독했던가?’
이전에 시체를 보며 기겁하던 것과 달리 꽤나 강단 있는 목소리.
동생을 위로하러 왔다기보다, 아마도 제갈후현의 말을 전하러 온 것이리라.
제갈용성을 잠깐 떠올리던 진화의 코끝에 짙은 향 냄새도 함께 스치는 듯했다.
‘향이라니…… 가지가지 하는군.’
진화가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한편.
“아아아아악--!”
호위들에게 막혀 달려들지 못한 제갈소현이 방에 들어와서도 한참 제 성질에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망할! 천한 것! 저 천한 것 때문에 내가! 빌어먹을 자식이 왜 제대로 못해서! 제대로 죽……!”
순간, 막말을 쏟아 내던 제갈소현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화가 나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제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들렀던 제갈용성의 경고가 컸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 불안에 떨던 가운데, 제갈용성이 찾아왔다.
“왜 오라버니가 와요!”
아버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큰오라버니 정도는 올 줄 알았던 제갈소현은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하지만 늘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래던 제갈용성이 오늘만큼은 심각했다.
“잘 들어. 비영문 놈들 속에 귀천성도가 잡혔다.”
“뭐? 귀, 귀천성도요?”
제갈소현이 화들짝 놀랐다.
“그래. 맹에서는 비영문이 귀천성에 붙은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
“그런! 전, 전 몰랐어요! 애초에 오라버니가 절 데려갔잖아요! 나랑은 상관없다고요!”
제갈소현이 지레 겁을 먹고 발뺌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귀천성과 관련한 정의맹의 대우가 어떠한지는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는 제갈소현의 모습에, 제갈용성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래. 넌 조사관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비영문 자체를 결코 몰랐다고 잡아떼는 거다. 전부 죽은 하인의 소행이라고 해야 한다.”
죽은 하인이라는 소리에 제갈소현의 눈이 번뜩 뜨였다.
“너는 그냥, 속상한 마음에 불평을 조금 했는데, 그 하인 놈이 과잉 충성을 한 거다. 너는 그저 가까운 하인의 부탁에 돈을 융통해 준 것뿐이다. 넌 독이 없어진 줄도 몰랐던 거다. 하인이 독을 가져갔는지도 몰랐고, 돈을 어디에 썼는지도 전부 모르는 거다. 알겠니?”
제갈용성의 물음에 제갈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편하고 쉬운 해결책이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으니까.
“전부 그 하인이 한 일이고, 난 몰랐다고 하면 된다는 거죠? 정말 그러기만 하면 돼요?”
순식간에 제갈소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래. 나머지는 소가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게다. 넌 조사관이 오면 아무것도 몰랐다고 너도 놀란 듯 조용히 있어. 우울이나 심신미약으로 보여도 좋고. 다시 말하지만, 절대 아는 척하지 마. 그리고 절대, 가문을 들먹이지 마!”
마지막 말에, 제갈용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가문의 이름이 나오거나 소가주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가주님이 누굴 버릴지, 너도 알지?”
제갈소현이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제갈용성의 흉흉한 눈빛이 아니라도, 제갈소현의 기억엔 아직도 사정없이 제 뺨을 내리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자식의 뺨을 치면서, 분노든 실망이든 어떤 감정도 없던 그 눈빛.
아버지는 자신을 버리는 데에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절대 모른다고 할게.”
제갈소현이 단단히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저를 보며 비웃고 지나가던 진화를 떠올리며, 제갈소현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자식. 그래, 지금은 의기양양하게 있어. 나가기만 하면…… 다음번엔 절대로……!”
제갈소현이 입꼬리를 비틀며 독기를 뿜었다.
그녀는 당연한 듯 다음을 기약했다.
* * *
백소하가 진화와 남궁구를 안내한 곳은 별채 제일 안쪽 방이었다.
방 안쪽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했다.
“임시로 결빙 동굴의 얼음 가져다 두었습니다. 기름에 담갔다곤 하지만, 모든 부패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방을 빙 둘러서, 선반 각득 작은 항아리들이 있었는데 간혹 귀한 유리병도 있었다.
진화가 찾던 것 또한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이것들입니다.”
백소하가 척척 내놓는 것에, 남궁구가 눈살을 찌푸렸다.
꼬불꼬불한 신경다발까지 달린 눈알부터 시신에 있었을 장기와 이상하게 비틀어진 혈관들이 하나하나 담긴 모습은, 피를 두려워 않는 무림인이 보기에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진화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유리병에 다가갔다.
‘심장은 약간 비대해졌지만, 선천적인 걸 수도 있어. 하지만 심장에 연결된 혈관…… 두꺼워. 게다가 의선이 하나하나 적어 놓은 혈맥들의 위치. 만약 이게 맞다면…….’
진화는 의선문의 의원들처럼 유리병에 담긴 장기와 의선이 적어 놓은 주석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소하는 진화가 자신의 예상처럼 마냥 호기심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화가 진지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기밀 사항에 너무 깊게 접근하는 것이니까.
‘전부 일치하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죽었거나 비정상적 혈맥 모두, 내게 없는 혈맥과 일치한다. 역시…… 약은 귀천성의 소행이었던 건가? 이전 생에서 진휘 형님의 죽음과 이번에 시신 이관을 습격한 비영문의 일은, 정말 제갈세가와 연관이 없다고? 하지만…….’
진화의 눈빛이 이전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귀천성의 소행으로 결론을 지으면 깔끔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여전히 남았던 것이다.
진화가 유리병을 놓자, 백소하가 기다렸다는 듯 유리병들을 치우며 물었다.
“이제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보통은 치우기 전에 묻지 않습니까?”
진화의 말이 핵심을 찔렀다.
하지만 진화가 유리병을 살피는 잠시 동안에도, 백소하는 차라리 진화와 남궁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것이 나았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말보다 손이 빨랐던 건, 마음이 급해서였다.
하지만 진화는 그런 백소하의 심정을 외면했다.
“한 가지 더.”
“아직 볼일이 남았단 말입니까?”
백소하의 말투가 저도 모르게 공격적이고 말았다.
다행인지 진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럼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는데요.”
“허, 부탁요?”
“저랑 거래하지 않으실래요?”
“……협박이 아니라 말입니까?”
“말하기가 이쪽이 낫잖아요.”
말똥말똥 뜬 눈이 다시 협박하고 있었다.
“하아, 말해 보십시오.”
이건 얼굴만 하늘의 선동이고, 속은 순 깡패다.
백소하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제 맥, 뭔가 달라서 짚어 본 거잖아요. 애초에 제가 천뢰제왕신공을 익힌 이유가, 귀천성 때문에 몸에 있어야 할 혈과 맥이 부족해서였죠.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고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어요. 이 약을 복용한 시체들도,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일상에 지장 없이 오히려 무공이 늘었다면서요?”
“……!”
“둘 다 똑같이 귀천성의 소행이라면, 뭔가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백소하는 또다시 협박에 넘어가고 말았다.
* * *
사방에 가득한 책.
그리고 책상 위에 어지럽게 싸인 문서들.
그 속에서 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바쁘게 연구 중이었다.
한쪽에는 약병들이 빼곡했고, 벽 너머에는 원숭이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그중 제일 상석에서, 귀하다는 서역의 외알 안경을 낀 중년인이 머리 위까지 쌓인 문서들을 하나씩 보고 있었다.
접근. 주의 요망.
연구 내용에 이어진 문구 한 줄.
“흠, 그렇게 해 봐야 소용이 없을 텐데…….”
내용을 읽던 중년인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재란에 두 글자를 적었다.
사사(賜死).
결재를 마친 보고서는 주인이 가져갔다.
그리고 중년인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다음 문서를 이어 갔다.
그날 밤.
정의맹 감찰당 뇌옥에 침입자가 들었다.
“뭐, 뭐야! 큭!”
시체를 실어 나르느라 뇌옥에 들었던 하급 무인이, 경비 무사의 목을 찔렀다.
안면이 익은 사람이라 방심하고 있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놈-!”
곧바로 다른 무사가 하급 무인의 목을 날렸다.
하지만 하급 무인이 피를 뿜는 순간.
“도, 독이다-!”
검게 변한 피에서 퍼진 연기가 순식간에 뇌옥 안에 퍼지고, 안에 있던 무사들과 죄인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