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움직일 진(進) 불 화(火) : 시도하는 자(5)
간밤에 소란이 있었지만,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평범한 아침을 맞았다.
하지만 정의맹과 제갈세가, 남궁세가 내부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디딘 듯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평소와 다른 말이 오갈까, 다른 모습을 보일까 조심하는 터라, 미묘하게 어색하고 경직된 기운이 평소와 다른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남궁조와 제갈가주 또한 그것을 알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수뇌부와 측근들만으로 철저하게 입단속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아래로 전염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뇌부를 탓할 수도 없었다.
양청현, 그것도 제갈세가 내부에 귀천성 배신자와 첩자가 있었다는 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과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미래를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는 건 진화였다.
“…….”
“괜찮네. 낙제는 겨우 면했지 않은가.”
“그래. 얼굴이 매출에 그 정도로 영향을 주는 것도 재주니까.”
“꼴등은 아니다.”
현오와 팽가 형제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산술, 회계학에서 진화의 성적은 ‘상(上) 상(上) 하(下)’였다.
이론 평가와 가게 운영에 따른 조별 평가에서 상을 받았고, 개인 득점에서 하를 받았다.
다만 마지막 ‘하’ 도장이 세 개씩 찍힌 것은, 아무리 봐도 잘못 찍힌 것이라기보다…….
“하하하! 비웃는 건가?”
“아니지. 넌 ‘하하하!’를 주고 싶었다. 뭐 그런 거 아냐?”
남궁교명과 남궁구의 말대로, 진화의 성적표에는 저를 향해 ‘만두 공자’라고 손가락질하던 왕 사부의 성질머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몹시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진화의 심정과는 별개로, 무학관은 갑자기 시간이 빨리 돌리는 듯 일정을 처리해 나갔다.
정의무학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정의무학제 기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진화는 다른 과목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받았고, 무난하게 정의무학제에 나갈 삼십 인 안에 들었다.
* * *
전쟁과 함께 떠오르는 피비린내와 쿰쿰한 주검의 썩은 내.
정의맹 한편에는 그러한 냄새가 일 년 내내 떠나지 않는 곳이 있었다.
감찰당 뇌옥(牢獄).
“끄으…….”
피투성이의 사내가 정신을 잃었다.
촤아아악---!
차디찬 물이 사내의 얼굴로 부어졌다.
사내는 제갈세가의 하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귀천성도로, 겨우 이틀 전에 뇌옥으로 들어왔다.
그는 벌써 고슴도치처럼 바늘이 꽂힌 채 손발이 정에 다 짓이겨져 있었다.
손과 발은 말초신경이 집중되어 감각이 예민하면서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곳이라, 보통 고문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손발이 짓이겨질 즈음에는 어떤 독한 사람도 입을 열곤 했다.
하지만 잡혀 온 사내는 재갈을 물린 입가에 피가 흥건할 정도의 고통에 신음은 흘릴지언정 비명 하나 들려주지 않고 있었다.
“크……흐흐흐…….”
“지독한 놈.”
정신을 차린 사내는 웃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감찰당 부당주이자 뇌옥의 책임자인 정속마검 견강위는 그런 사내에게 질린 듯 욕을 뱉었다.
하지만 곧 날카로운 눈매와 얇은 입술이,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잘 견뎌 보거라. 나 또한 지치지 않을 것이니.”
약해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은 여전히 꼿꼿했다.
지금까지 무림에서 누구보다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중인 종남파 출신으로, 견강위가 가진 원한은 쉬이 지칠 것이 아니었다.
손발로 어찌할 수 없다면, 그다음은 화기로 인한 고통이었다.
살이 타는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에 최상의 것이라.
견강위의 눈짓에 뇌옥의 옥장들이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가져왔다.
그때, 인두와 함께 적호단주 팽치가 뇌옥을 찾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배신자로 추정되는 제갈무진을 잡기 전, 적호단주는 그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어야만 했다.
정보 하나에 수하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직책은 무엇이고 제갈세가에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제갈세가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지만, 이제까지 제갈세가를 속이고 있던 자라 그 정보를 믿을 수 없었다.
“지독한 놈이야. 손발이 짓이겨지는데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더군.”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 전에 남궁조 님께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흐음…….”
적호단주의 말에 견강위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또한 사내보다는 제갈무진을 잡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정의맹에서 도움을 청하는 연통이 오고, 남궁세가에선 남궁조가 나갈 채비를 했다.
“콧대 높은 견강위가 도움 요청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시네요?”
“쩝, 뭐…….”
남궁진휘의 말처럼, 평소라면 견강위에게 으스댈 생각에 희희낙락했을 남궁조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성흑오대 놈이잖느냐. 털어 봐야 나오는 건 없을 게다. 그런 놈들 고문하는 건 심력만 낭비하는 일이야. 내가 귀천성도 살 저미면서 좋아하는 견강위 같은 변태도 아니고.”
“……평소 정속마검에 대해 그런 견해를 가지고 계셨군요.”
“난 늘 진심인 사람이다.”
남궁진휘는 오늘에서야 남궁조가 견강위를 놀리던 것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았다.
또한 남궁조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상대가 교성흑오대 소속이라면……. 죽기만 기다리고 있겠죠?”
“그놈들, 벌써 죽은 놈처럼 영혼을 빼놓고 있겠지. 나도 하늘 아래 귀천성도 놈들은 하나라도 없는 게 좋다는 사람이지만, 이미 영혼도 없는 놈들을 지지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말이다.”
짐승 같은 새끼들에게 남은 것은 악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었다.
도를 벗어난 행위는 자신들의 정신에도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었다.
남궁진휘와 남궁조가 농담 뒤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것만 얻는다면, 첩자가 어찌 죽든 상관없지 않을까요?”
“뭐?”
진화의 말에 남궁진휘와 남궁조가 놀란 눈을 해 보였다.
가끔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도를 발견하거나, 이렇게 첩자를 잡아내기도 하는 진화였다.
아직 어리지만 남궁진휘와 남궁조는 진화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게냐?”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자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건 제갈무진 그자를 놓치지 않는 겁니다. 안쪽에서 제갈세가가 나서고, 밖에서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이 에워싼다고 해도, 제갈무진이 어떤 도주로를 확보해 두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네 말이 맞다. 하나, 네가 놈들의 지독함을 몰라 하는 말이다. 지금 교성흑오대 놈을 고문하는 것도 제갈무진의 정체나 도주로를 캐내려는 것인데……. 놈들은 어떤 고문을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남궁조가 귀천성도들의 지독함을 떠올리는 듯 머리를 털었다.
하지만 진화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충직한 자라면, 주인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무슨…… 설마, 놈을 놓아주자는 거냐?”
“시의적절한 때에 놓아준다면, 주인에게 우릴 안내해 줄 겁니다.”
“흠, 글쎄다. 이미 제갈무진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그게 구태여 필요할지 모르겠구나.”
진화의 말에 남궁조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 와 놈을 풀어 줘서 제갈무진을 만나게 한들, 제갈무진의 경계심만 높일 뿐이지 않은가.
오히려 더 빨리 도주하도록 돕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모를 진화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제갈무진의 도주로이고, 그자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를 이용하는 방식을 달리하면 됩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냄새를 풍기게 하면 되지요.”
“냄새? ……설마!”
“오, 그렇구나. 그거라면 제갈무진이 제갈세가를 벗어난다고 해도 놓치지 않겠구나! 허허허! 맞다! 첩자를 어찌 이용하든, 그건 우리 마음이지. 허허허허!”
진화의 생각을 알아차린 남궁진휘와 남궁조가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 사람을 이용해서 향을 뿌리는 건 이전 생에 귀천성 놈들이 썼던 방식이었지.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써먹어 주지.’
그 천리추종향에 제일 많이 당했던 사람 중 하나가 진화였다.
진화는 그것을 역으로 돌려줄 생각에, 만면에 고소를 지었다.
그때, 만면 가득 웃고 있는 진화가 귀여웠던 남궁조가 진화의 머리와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윽!”
“우리 복덩이! 산술, 그거 좀 못하면 어떠하냐? 이렇게 꾀가 많은데!”
“아니, 사, 산술을 못한 것이 아니라…….”
“하하하! 남궁의 소공자가 만두 가게 이문으로 다시 만두를 산다고 했다지? 허허허! 왕진오가 학을 떼면서 일러 주더구나. 하하하하!”
역시, 그 ‘하하하’는 일부러 그런 것이었던가.
아직 성적표도 보여 주지 않았는데, 진화의 ‘상상하하하’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 *
남궁조와 견강위가 함께 감찰당 뇌옥으로 들어왔다.
아주 잠깐 있었던 편안한 시간이 끝이 났다는 말이었다.
고문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눈은 영혼이 없는 듯, 어떤 감정도 없이 남궁조와 견강위를 보았다.
그런 사내를 보며 남궁조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수작 부리지 마, 새끼야. 고통을 못 느끼는 인간은 있어도, 괴로움을 모르는 인간은 없으니까.”
의미 없이 사람을 고문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유만 있다면 귀천성도를 괴롭히고 싶은 악의는 충분했다.
“잘 견뎌 봐.”
남궁조가 양손에 송곳을 들고, 사내의 양 손목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새하얀 뇌전을 쏘아 부었다.
“끄으으…….”
덜덜덜덜.
사내의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그리고.
“으으……으아아아아!”
고문실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단전에 닿는 뇌기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무인의 근원을 송두리째 태워 버릴 듯했다.
한번 터진 비명은 그렇게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고문도 이겨 내긴 개뿔. 그냥 죽는 게 겁나는 거야.”
“닥……쳐…….”
인간에게 극악스러운 고통을 견디도록 하는 것은, 결국 고통보다 큰 신념 혹은 포기다.
잡혀 온 사내도 이제는 신념과 포기 사이의 어디쯤에서, 지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넌 어차피 죽어. 이쯤 되면 편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을 건데, 이렇게 버티는 건 결국은 살고 싶다는 거지. 안 그래?”
“진……짜…… 하늘의 순리를 지키…… 지키는…….”
사내가 말을 할 때마다 피를 쏟았다.
입에 물려 놓은 재갈도 이제는 없고, 혀를 깨물 이도 없었다.
뇌기가 지나며 이빨이 모조리 뽑혀 나온 것이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버티는 사내가 놀라울 지경이지만, 귀천성도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주인의 명이 아니라면, 자결은 그들이 말하는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순리 좋아하시네. 그렇게 순리를 지킨 널, 네 주인이 그냥 둘 것 같아?”
“두렵……지 않다! 주군의 손에 죽는다면 그……만한 과, 광영도 없으니까!”
사내도 정신적 한계에 부딪힌 듯, 남궁조가 비꼬는 말에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곁에서 보고 있던 견강위와 남궁조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궁조가 사내를 비웃으며 견강위에게 말을 걸었다.
“저놈이 우리가 못 보낸다고 생각하고 수 쓰는 것일세. 진짜 보내 버리자고.”
“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견강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남궁조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사내만 보고 있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야. 그래 봐야 주인 손에 죽겠지. 그때도 어디 광영일지 보자고.”
“하지만 뇌선검!”
“어허! 이놈은 우리 남궁세가의 책임이니, 더는 반대하지 말게. 나는 이놈이 어찌 죽을지 구경하고 싶어졌으니!”
견강위가 반대하며 나섰지만, 남궁조는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리고 사내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내가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남궁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남궁조는 그런 사내의 악담에 코웃음을 쳤다.
“후회? 글쎄, 과연 누가 후회를 할까?”
“흐으, 너, 너흰 그분이 남겨 둔 안배의 어떤 것도 모른다. 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견강위가 사내의 아혈을 집자, 사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견강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제 차례인가요?”
정의무학과 무사부로 있는 백화선녀 홍채연이었다.
* * *
최대한 조용히 제갈무진을 잡을 준비를 하려던 정의맹과 제갈, 남궁세가의 계획은, 의외의 도움을 받았다.
정의무학관의 모든 평가가 끝이 나고, 정의무학제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다.
관도생들뿐 아니라 양청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정의무학제로 쏠렸다.
특히 제갈세가는 소가주인 제갈후현의 마지막 정의무학제였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던 제갈세가는 어느덧 제갈후현의 무학제 준비에 온 신경이 쏟았다.
이번 정의무학제는, 제갈후현과 남궁진휘의 마지막 대결이기도 하지만, 제갈이 무력으로 남궁을 이길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제갈후현은 거처에 틀어박혀 폐관수련을 하다시피 무학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제갈용성이 제갈후현을 찾았다.
“웬일이야?”
“아, 숙부님이 연학원에 들면서 하인에게 맡겨 놓은 게 있었다기에 가져왔습니다.”
“연학원장이?”
제갈용성의 말에 제갈후현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제갈용성과 달리, 제갈후현은 단 한 번도 제갈무진을 숙부라고 부른 일은 없었다.
정확하게 오촌 당숙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오만한 제갈후현은 직계도 아닌 제갈무진에게 존대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무진이 가진 직함이 바로 제갈세가의 총체라는 연학원의 장이라, 아무리 소가주라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연학원장과의 연락은 모두 제갈용성을 통해서 이뤄졌다.
‘그 오만함이 네놈의 실수지.’
제갈용성은 여전히 제갈무진을 깔보려는 제갈후현에게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소현이 일로 감시가 심해졌나 봐요. 혹시 모르니 미리 다음 분을 주고 가셨다고 합니다.”
“아, 아. 그래?”
“그것도 전할 겸, 겸사겸사 차나 한잔할까 가져왔습니다.”
제갈용성이 차가 담긴 주전자와 두 개의 잔을 놓은 쟁반을 들어 보였다.
제갈후현이 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갈용성이 든 쟁반 위에는 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약이 담긴 주머니도 있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형님도 좀 쉬셔야지요.”
제갈용성이 제갈후현을 달래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