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행 화(禍) : 기회를 잡는 자(1)
정의무학제 날이 밝았다.
단상에는 물론이고 대연무장 주변으로 초청받은 무림 인사들과 관도생들이 빠짐없이 자리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주변 음식점과 객잔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늘 그렇듯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기에, 제일 가까이에서 그걸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무학제가 시작될 무렵, 총군사인 제갈가주를 비롯해서 정의맹 주요 인사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정의무학관 관주와 수석 무사부들이 등장했다.
“다들 오랜만에 얼굴 보는군.”
“그간 격조했습니다.”
정의무학관주의 인사에 제갈가주를 비롯한 정의맹 인사들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정의무학관 관주가 되면서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금룡일권 나무열은 제갈가주를 비롯한 현 정의맹 주요 인사들보다 위 연배의 원로로 귀천성과의 전쟁을 이끈 영웅 중 하나라.
정의무학관주는 그러한 예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맹주는 보이지 않는군.”
“급한 용무가 있으시어 제가 대신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정의무학관의 가장 중요한 행사에 정의맹주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을까.
정의무학관주가 가만히 제갈가주를 보았다.
제갈가주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았다.
-일이 생겼는가?
-송구스럽습니다.
전음으로 오간 말로 단 두 마디가 전부였다.
현세대의 일은 현세대에게 맡겨 두면 될 일.
정의무학관주는 다른 말 없이 무사부들을 이끌고 자리로 갔다.
* * *
가장 먼저 시작하는 건, 금의생들이었다.
금의생들의 무학제, 일명 금의제를 가장 먼저 치르는 것은 졸업식 전야제와 같은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물이 들어오기 전 제일 아래에 있던 물이 바다로 흘러나가듯, 새로운 신입생을 받기 전에 금의생들이 무림으로 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육 년의 무학관 생활을 마치며, 누가 이번 기수 최고가 되어 대표로 졸업을 선언하게 될지.
이제,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가릴 수 없는 승패를 나누게 될 것이라.
무학제에 임하는 금의생들의 각오가 다른 때와 달랐다.
특히, 남궁진휘에게 밀려 줄곧 이인자에 만족해야 했던 제갈후현은 일 년 동안 오늘만을 기다렸다.
무학제의 시작 전, 제갈가주가 소가주인 제갈후현을 격려하기 위해 찾았다.
하지만 제갈가주가 제갈후현을 보는 눈빛은 조금 복잡했다.
사람들의 눈을 생각해서 자상한 아비처럼 내려오긴 했으나, 오늘만큼은 정말로 제갈후현의 건투를 빌었다.
제갈후현이 제갈무진에게 이용당한 것이 밝혀진다면, 제갈세가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소가주인 제갈후현의 명성에도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밝혀지기 전에 무학제에서 우승해서 만회해 놓는다면…….’
제갈가주는 제갈후현에게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남궁진휘에게 이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교활한 숙부에게 배신당한 것뿐’이라 포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꼭!’
제갈가주가 강렬한 눈빛으로 제갈후현을 보았다.
“넌 벌써 다섯 번의 기회를 놓쳤다.”
“이번엔 다릅니다.”
“지난 네 번의 무학제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 이번에는 꼭 달라야 할 것이다.”
제갈가주의 신랄한 말에 제갈후현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격려를 하러 온 것인지, 기를 죽이러 온 것인지.
아비로서 격려가 뭔지도 모르는 듯한 제갈가주와 심기 불편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제갈후현을 보며, 제갈용성이 속으로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조차도, 내일과 모레 무학제를 치르는 제갈용성이나 제갈지현에게는 없던 것이었다.
제갈가주는 항상 제갈후현의 경기만 보니까.
지금도 그는 제갈후현의 옆에 제갈용성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이번에 우승하여 군사부에 와야 한다. 그게 네 ……길이다.”
네가 살 길.
금의제 우승자에게는 한 가지 혜택이 주어졌는데, 그건 바로 ‘첫 임무지 결정권’이었다.
우승자는 정의맹 어느 무단, 어느 부서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시작할 권리를 가져다.
제갈후현이 원하는 곳은 당연히 정의맹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군사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서 총군사 자리를 바라는 제갈후현에게는 무학제 우승이 스스로의 힘으로 차지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었다.
제갈가주가 생각하기에, 제갈후현이 이번 사태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제갈후현이 자신감을 보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겁니다.”
마치 승리를 선언하는 사람처럼, 확신을 가진 듯 보이는 제갈후현의 모습에 제갈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용성은 비릿한 웃음을 달고 제갈후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중요한 날이었다.
제갈세가 모두에게.
* * *
한편, 세상이 축제로 들썩이는데 홀로 고요한 제갈세가.
그곳에서조차 외부와 단절된 연학원에서 막 나온 제갈무진은 가주전을 찾았다가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무학제가 열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갈후현의 비무가 오늘일 줄이야.
‘가주의 감시가 강해져서 연학원 안에서 주고받던 연통을 끊었더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군.’
헛걸음을 한 제갈무진이 자신의 장원으로 돌아갔다.
장원 정문 까마귀 솟대의 부리가 오시를 향하고 있고, 별채 문고리가 거꾸로 돌려져 있었다.
“음.”
오시를 향하는 솟대는 흔하지 않고, 억지로 돌려놓지 않는다면 문고리가 거꾸로 서 있을 리 없었다.
눈에 띄진 않지만, 억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제갈무진은 그의 하인과 별채의 작은 변화들로 ‘무탈하다, 외부에 나갔다, 위험하다’와 같은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제 눈에만 보이 정도로 미세하게 틀어진 족자, 화병 무늬가 향하는 방향, 살짝 들떠 있는 마룻바닥, 서책의 순서와 꽂는 방식까지.
외부인의 침입에 대비해서 하나하나 열거하기조차 복잡하고 어려운 장치들이 별채에 가득했다.
이런 집착적일 정도의 표식은, 또 있었다.
“흐음…….”
제갈무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책상을 보았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문서와 죽간 들.
마구잡이로 올려놓은 듯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문자가 낱말이 되도록 배열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
문서 아래에 하인이 끼워 놓은 쪽지가 글자 반이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었다.
제갈무진과 약속한 상태로 집안을 관리하는 것이 업인 그의 하인이 이럴 리 없었다.
-소오!
전음으로 하인을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누군가 왔다 갔군.’
제갈무진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때…….
쿠—웅!
별채 안으로 무언가가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소오!”
“끄으으…….”
문 쪽으로 간 제갈무진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그의 하인, 아니 수하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들킨 것이냐?”
가만히 선 채로 덤덤하게 물었다.
별채 주변을 빼곡하게 에워싸는 인기척에도 제갈무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 주……군, 정의맹이…….”
“허허! 네가 입을 놀리진 않았을 테고, 이 상태로 내게 던져 주다니. 제갈가주의 방식이 아니구나.”
“소, 송구…… 컥…….”
남궁조와 견강위는 그를 정말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지만, 온전한 상태로 준 것은 아니었다.
곧 죽을 듯 피까지 토하는 수하의 모습에, 제갈무진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걱정한다기보다 무심하게 관찰하는 눈이었다.
“독은 없군. 중독을 노린 것은 아니구나. 내장과 혈맥이 망가진 것을 보면…… 남궁조인가?”
제갈무진은 여유로운 태도로 수하의 모습을 살폈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수하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도, 자비를 베푸는 것도 아닌.
“주……군, 밖에 제갈…… 적호단과 큭. ……나, 남궁이…… 정면에…… 끄으…….”
제갈무진의 수하는 마지막 남은 일을 하듯 꾸역꾸역 피와 함께 정보를 뱉었다.
하지만 그 또한 제갈무진에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한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천비록 원본을 챙겼어야 했는데…… 다행히 내 해석본은 이곳에 있구나.”
제갈무진은 연신 피를 토하는 수하를 두고 돌아섰다.
그는 연학원에 두고 온 역천비록을 당장 챙기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유로운 태도로 이 층 서고에서 죽간을 챙겼다.
툭. 툭.
아무렇게나 뽑는 듯, 어떤 때에는 세 번째 칸에서, 어떤 때에는 네 번째 칸. 윗줄, 아랫줄, 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죽간을 챙겨 넣은 보자기를 들고 문을 나서는 길.
제갈무진은 무심하게 죽은 수하를 넘었다.
별채를 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검을 겨눈 제갈대천대였다.
“죄인 제갈무진은 가주님의 명을 받으라!”
“가주님의 명을 받으라!”
제갈대천대 대주 제갈걸진이 소리치고, 제갈대천대원들이 마지막 명을 따라 하며 검을 높이 올렸다.
우렁찬 목소리와 날카로운 기세에, 제갈세가 사람들의 자부심을 절로 불러일으킬 광경이었다.
단, 상대가 배신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허허! 가소롭구나.”
자신을 비난하는 눈길.
살기 어린 기세.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제갈무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 * *
쉐에에에에엑------!
“크어억!”
“뭐, 뭣!”
악몽 같은 일이었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지나는 칼날에 바로 옆 동료의 목이 잘려 나갔다.
아니, 거기 칼날이 있었나?
죽어 가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으아아아아! 컥…….”
“크아아악!”
고통이 아니라 공포로 인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조차, 햇빛에 반짝이는 핏줄기가 지난 뒤에는 고요해졌다.
“비키겠나?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 한 번은 봐줄 터이니.”
“제갈무진, 네가 어떻게……!”
대천대주 제갈걸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갈무진을 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제갈무진을 알아 왔기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아는 제갈무진은 천생 학자다.
저렇게…… 무심한 눈빛, 요사스러운 미소 그리고 시뻘건 살기가 넘실거리는 손 따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알던 제갈무진은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네 것들은 늘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지. 참 비루한 인생이야…….”
제갈무진이 손가락을 흔들 때마다 햇빛에 반짝이는 핏줄기가 요동쳤다.
제갈대천대는 저들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사방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네, 네가 정녕 제갈무진이 맞다고? 하지만……!”
대천대주는 제갈무진이 무엇을 쓰는지 알아챘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그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친하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제갈무진을 보아 왔다.
제갈무진에겐 이러한 무위가 있을 수 없었다.
현(絃)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무인이라 해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건 쇠로 만들어도 단단하지 못하고, 모양을 유지하기 힘들어서 다루기도 까다로웠다.
사람을 단단한 근육과 뼈를 상하게 할 만큼 힘이 있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제갈세가에는 현을 다루는 무공도 없었다.
그러니 저건, 제갈무진이 아니다.
“너, 넌 대체 누구냐!”
불신 가득한 대천대주의 외침에, 제갈무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가 누구냐고? 하하하하하! ……그래, 거기가 네 한계겠지.”
잠깐 웃음을 터뜨린 제갈무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듯, 무심한 시선이 대천대주를 향했다.
그리고 새빨간 핏줄기가 햇빛 아래에서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쉐에에에엑---!
툭. 툭.
“으아아악!”
반짝이는 핏줄기가 인정사정없이 제갈대천대원들의 몸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무참하고 잔인하게, 서걱서걱.
공포심을 견디지 못하고 등을 보인 대원은 그대로 두 다리가 잘려 나갔다.
“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네 이놈--!”
수하들의 죽음에 흥분한 대천대주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보이지 않는 제갈무진의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피하란 말인가.
챙--!
쉐에에엑--!
대천대주가 보이지 않는 그것을 없애려는 듯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대천성검법(大天星劍法) 팔괘무장이 그리는 길을 따라 옅은 검기가 움직이고, 검과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마치 검과 검이 부딪히는 듯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대천대주의 패착이 되었으니.
팟-!
뭔가가 끊기는 듯 날아들어 대천대주의 왼쪽 팔에 깊은 상처를 내었다.
“큭! 대체 이게 무슨……!”
피가 터지는 것을 보며 대천대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처도 상처였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
대천대주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실감하는 순간, 이번에는 사방에서 대천대주를 난도질하듯 뭔가가 날아들었다.
쉐에엑! 쉐엑-!
“크읏!”
챙! 챙!
쉐에에엑--!
“……허!”
어떤 것은 막고, 어떤 것은 대천대주의 몸에 사정없이 핏줄기를 내리그었다.
제갈무진이 무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게 너희 제갈이지. 슬슬 지겹구나.”
대천대주를 비웃은 제갈무진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장난처럼, 제갈대천대의 주검을 지나는 제갈무진의 모습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대천대주가 흉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팔을 뻗었다.
“제갈무-지…… 컥!”
제갈무진을 붙잡으려던 목소리가, 이어지지 못했다.
휘리리리릭-! 착.
투둑. 툭, 툭.
붉은 핏방울을 털어 버린 현홍사(縣紅絲)가 제갈무진의 손안에 갈무리되고, 고깃덩어리가 된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만이 남았다.
한때는 위명을 울리던 사내들의 흔적이,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와 다를 것 없이 붉었다.
“재미없군.”
짙은 혈향이 자욱하게 별채에 가득 퍼지고,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 저벅저벅 제갈무진이 걸음을 옮기는 소리만 남았다.
* * *
스스스스슷---!
바람 소리처럼 제갈무진의 주변에서 제갈세가 무사들이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퍼졌다.
제갈무진은 그 많은 소리를 비웃으며 당당하게 제갈세가의 정문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콰-앙!
손도 대기 전에 정문이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당당하게 나온 제갈무진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보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오? 참 많이들 모였군.”
과장된 표정이 장난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곧 인파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며, 제갈무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맹주! ……당신이 나섰다고?”
“나무관세음보살, 벌써 혈향이 짙구려, 시주.”
정의맹 맹주 소승(笑僧) 운현대사.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해 짧게 염불한 뒤, 제갈무진에게 노여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