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행 화(禍) : 기회를 잡는 자(3)
소승 운현대사.
정파 무림의 정신적 지주라는 소림의 장문이자, 현 정의맹 맹주.
그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말은 아마도 선의(善意)와 무욕(無慾)일 것이다.
직책에 비해 명성이 크게 높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욕심 없는 마음으로 정의맹을 이끌어 왔다.
그의 자애와 무욕은 지금까지 많은 무림인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모습 때문에 제갈세가를 비롯해서 아미파와 당문이 정의맹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막지 못해 작금의 정쟁이 시작되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게다가 무승이라 말하기 주저함이 없었던 선대 각오대사와 달리, 아직까지 큰 치적이 없는 것도 흠이라면 흠이었다.
앞으로 귀천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무림인이 정의맹 맹주를 맡는 것이 낫다는 말이 슬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늘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하여 소승이라는 별호까지 가진 운현대사가 앞으로 나왔다.
“모두 석 장 이상 물러서시게.”
운현대사의 말에 모든 무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물러난 무사들은 정의맹 소속뿐 아니라 제갈세가 상현대와 하현대 소속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운현대사의 명을 듣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제갈무진을 둘러싼 빽빽한 공간이 넓어졌지만, 제갈무진의 얼굴은 결코 좋아 보이진 않았다.
“눈치가 빠른 건지, 겁이 많은 건지.”
제갈무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 번뜩이는 눈이 운현대사를 살폈다.
정순한 눈빛과 입가에 박제가 된 듯 지어진 미소가 저를 보고 있었다.
결국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쯧, 만만치 않은 인간.’
제갈무진이 아쉽다는 듯 속으로 혀를 찼다.
운현대사를 바라보는 제갈무진의 평가는 세간의 것과 달랐다.
사람들은 대반격 이후 그냥 주어진 평화인 줄 알지만, 귀천성은 꾸준히 부활을 대비한 공작과 첩보 활동을 이어 왔고 정의맹은 예상보다 효과적으로 상황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정의맹을 이끄는 사람은 분명 운현대사였다.
‘무욕하기에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정의맹의 상태를 파악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왔다. 한 단체를 이끄는 장으로 용인술에 능한 것은 큰 장점이지. 그런데 용인술에 능한 운현이 이곳에 직접 왔다라…….’
“재미있군!”
제갈무진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피해라-!”
놀란 운현대사가 소리쳤다.
쉐에에엑-! 쉐-엑!
팟-!
“으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에게서 비명과 함께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살생을 함에 있어, 어찌 눈빛마저 무의하단 말이오! 정녕 수심(獸心)만을 가진 것인가!”
노한 운현대사의 목소리와 함께 금빛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펑-! 펑펑--!
수십 개로 변한 운현대사의 손이 부드럽게 퍼지며 눈에 보이지 않던 팽팽한 실을 밀어냈다.
“나한십팔수!”
현홍사가 끊어지는 것을 보며, 제갈무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강하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지만 모든 변화를 다 담고 있어야 하는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는 소림 나한권의 정점이었다.
전대 장문에 비해 무공이 일천하다고 알려진 운현이었다.
“하하! 재밌구나!”
제갈무진이 흥분한 목소리로 양팔을 뻗었다.
휘리리리릭---!
햇빛 아래에서, 불길하고 위험한 소리가 울렸다.
“백매들은 무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이나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닐세. 모조리 끊어 내시게!”
“충!”
운현대사의 명으로, 그리고 제갈무진의 공격을 피해 물러났던 정의맹 무사들이 품에서 새하얀 가면을 하나씩 꺼냈다.
새하얀 매의 형상을 한 그것은, 정의맹 백매단의 상징이었다.
새하얀 무사복에 새하얀 가면을 쓴 그들이, 쌍검을 빼 들었다.
챙! 챙! 챙챙!
백매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홍사를 모조리 잘라 낼 듯 사방으로 쌍검을 휘두르며 안으로 공간을 좁혀 갔다.
“제갈상현대도 들어라! 세가의 배신자를 잡는다!”
“충!”
“제갈하현대! 놈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
“충!”
제갈세가 무사들도 두려움을 잊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나, 운현대사가 친히 존재를 알려 준 뒤로 무사들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확신을 가진 듯했다.
“하하하하!”
제갈무진은 무엇이 재밌는지 그저 웃었다.
하지만 웃을 만큼 자신감을 가진 이유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쉐에에엑---!
“크아악!”
“적이다-!”
갑자기 뒤에서 닥친 적의 기습 공격에, 기세를 올렸던 제갈세가 무사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제갈상현대와 하현대는 적을 막으라!”
“충!”
운현대사의 명에, 제갈하현대가 주먹구구식으로 막아서던 적들의 앞에 제갈상현대가 끼어들었다.
확실한 명을 받고 움직이는 제갈세가 무사들에, 교성흑오대의 새까만 까마귀 부리 모양의 가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교성흑오대가 양청현에 이토록 많았는지 몰랐군. 시주의 정체는 무엇인가?”
“글쎄.”
운현대사의 심각한 물음은 그다지 흥미 있는 부분이 아니었던 듯, 제갈무진은 답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대충 넘겼다.
반면 제가 물을 때에는 눈빛을 반짝였는데…….
“나한십팔수를 극한으로 익힌 건가? 그래?”
“허허.”
운현대사도 답하지 않았다.
서로 답을 할 생각이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하하하! 대답 안 해도 돼! 알아내면 되지!”
제갈무진이 먼저 손가락을 뻗었다.
쉐에에에엑---!
사방에서 다시 세찬 칼바람 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건, 제갈무진 저자일세. 놓치지 말게나!”
“충!”
촤좌좌좌좌좍-!
운현대사의 외침에, 백매단이 쌍검을 곧추들어 빼곡하게 세웠다.
하지만 사방, 곳곳에서 빛이 번뜩이며 백매단을 몰아붙였다.
챙! 챙챙!
쉐에엑!
“큿!”
“크아앗!”
백매단의 쌍검이 현홍사를 막아 내는 소리 못지않게, 비명도 터졌다.
“아미타불……!”
마침내 운현대사가 목에 건 염주를 양손에 쥐고 몸을 움직였다.
운현대사의 손에서 나온 금강나한공이 붉은 염주를 알알이 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늘어난 운현대사의 염주가 현홍사의 붉은 빛을 깨부수었다.
파팟! 팟! 팟!
바닥으로 머리카락보다 가는 철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 나한십팔수에 이형환위라-!”
현홍사가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도, 제갈무진은 오로지 운현대사의 움직임에 감탄하고 있었다.
제갈무진이 잔뜩 신이 난 듯 양팔을 움직이려는 그때.
그는 자신의 팔 움직임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품에 맨 보자기의 존재를 이제야 발견한 듯, 제갈무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아쉽게 되었군.”
그러나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은 있지 않은가.
제갈무진의 표정이 다시 덤덤하고 단호하게 변했다.
“시간이 지체되었구나. 길을 뚫어라!”
“무슨!”
스스스스슷---!
제갈무진의 명이 떨어지고, 의아해할 틈도 없이 교성흑오대의 기세가 달라졌다.
채-앵!
“막아라!”
“뚫리지 마라!”
교성흑오대의 기세에 지지 않기 위해 상현대주와 하현대주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푹!
“크엇!”
샤샤샤샤샥--!
쉐에엑!
“이놈들이!”
“으아아악!”
교성흑오대는 죽기를 각오한 듯 막무가내였다.
앞에 나온 이가 제갈세가 무사들의 검 둘셋은 끌어안고 죽음으로 막아 내면, 뒤에서 나온 이가 목을 베거나 길을 뚫었다.
그리고 다시 막히면 목숨을 내던지고 검을 맞아 기회를 벌었다.
“이……히힉!”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은 듯 무모하게 다가오는 교성흑오대의 공세에, 제갈세가 무사들이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만 길을 비켜라.”
제갈무진이 팔을 뻗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
쉐에에에엑!
“크아앗!”
“으악!”
백매단과 제갈세가 무사들은 물론, 제갈세가 정문을 모조리 감쌀 만큼 거대한 빛이 그들을 덮쳤다.
눈부신 빛이 백매단을 꿰뚫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끊어지면서 그들을 베었다.
끊임없이 비명이 울리고 짙은 혈향이 퍼졌다.
“오-옴!”
운현대사의 사자후가 사방에서 울리며, 빛이 터져 나갔다.
퍼---엉! 펑! 펑! 펑!
촤라라라라라!
금강나한공과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현홍사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큿!”
강한 기의 폭발로 눈도 뜨지 못하고 간신히 견뎠던 제갈세가 무사들이 눈을 떴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베었어야 할 교성흑오대가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체……?”
“맹주님!”
백매단이 다급하게 운현대사를 찾았다.
운현대사 또한 마치 썰물처럼 사라지고 난 흔적을 보고 있었다.
“허어! 위험한 작자로다.”
“추적 시작하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운현대사가 백매단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백매단 또한 순식간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리에 남은 이들은 운현대사와 미처 추격에 나서지 못한 제갈세가 무사들.
그리고 교성흑오대가 남긴 시체뿐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쓰러진 이들과 버려진 주검을 보며, 운현대사가 짧게 명복을 빌었다.
운현대사의 시선이 제갈무진이 사라진 숲으로 향했다.
마치 그의 시선이 닿을 듯.
* * *
실제로 제갈무진이 걸음을 멈춘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숲이었다.
제갈세가 서쪽과 접하고, 숭산의 끝자락과 연결된 험한 산의 초입.
“여어-!”
“조금 늦었네.”
적호단주 팽치와 창궁무애단을 이끌고 온 남궁조가 손을 흔들었다.
제갈무진은 기다렸다는 듯 산 입구에서 나오는 이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허! 역시 만만치 않은 늙은이였군.”
웃고 있는 제갈무진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스스스스스슷----!
사방의 나무들이 검은 까마귀들로 인해 스산하게 흔들렸다.
“날 귀찮게 한 대가는 받아야겠구나!”
제갈무진의 눈빛이 붉게 빛났다 싶은 순간, 울창한 숲을 뚫고 빛이 쏟아졌다.
* * *
피이—잉! 펑! 펑펑!
진화를 재촉하듯 연달아 신호가 터졌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았지만, 제갈후현의 폭주와 그 앞의 남궁진휘를 두고는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화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죽음이 스쳐 지났다.
소식도 제대로 듣지 못한 진휘 형님과 할아버지의 죽음, 사지가 떨어져 나가도록 싸운 가주님…….
목이 떨어져 나간 채 서 있던 진혜 누님과 시체도 보지 못한 어머니, 그리고 제 품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서 잊히는 것이 아니었다.
진화의 눈동자가 떨리는 가운데, 단호한 목소리가 진화를 깨웠다.
“남궁진화!”
“……누님.”
“가-!”
“…….”
“걱정하지 말고 가!”
남궁진혜가 진화의 등을 떠밀듯 단호하게 말하면서, 연무장을 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언제든 연무장으로 난입할 수 있도록 검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비무 중지를 알리는 붉은 기가 올라오고, 무사부들이 연무장으로 뛰어왔다.
그것을 보며 남궁진혜도 벌떡 일어섰다.
“얼른 가! 다치지 말고!”
남궁진혜가 관람석을 뛰어 내려가며 말했다.
퍼—엉!
남궁진혜가 제갈후현의 기운을 검기로 잘라 내며 남궁진휘의 곁에 섰다.
진화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살아 있는 남궁진휘.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당찬 남궁진혜.
그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진화와 눈이 마주친 남궁진휘가 입 모양으로 뭔가를 말했다.
‘어서 가?’
“아……!”
언제나처럼 씨익- 웃어 보이는 남궁진휘와 남궁진혜의 모습에, 진화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왜 아직도 안 가? 누님이 같이 가 줘?
-형님은 괜찮다. 아니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겠느냐? 금방 끝내마.
절대 약속한 것이 아니겠지만,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들리는 전음.
“아……하하!”
진화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퍼—엉!
마라승 각우가 제갈후현의 앞에 나서는데, 남궁진혜가 때를 놓치지 않고 제갈후현의 옆을 후려쳤다.
폭주하는 기운과…… 폭격하는 기운이 부딪혔다.
“지, 진혜야!”
마라승 각우가 놀라서 남궁진혜를 만류하듯 부르는 것과 함께, 남궁진휘가 조용히 제갈후현의 기운을 때리기 시작했다.
“진휘야-!”
어쩐지 ‘너마저!’ 하는 소리로 들렸지만, 남궁진휘는 위험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기운을 점점 빼는 방식으로 제갈후현의 폭주에 대응하고 있었다.
사실 기운을 뺀다기보다 실컷 두드리는 것 같았다.
“너희가 나설 일이…… 아, 작작 좀 하거라!”
각우가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진화는 웃으면서 돌아설 수 있었다.
“하하하하!”
지금의 남궁은 제가 지켜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남궁은, 언제라도 제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이전부터 그러했듯, 계속해서 강할 것이었다.
‘남궁은 이제 괜찮아!’
콰광- 쾅!
마치 꼭 잡고 있던 고삐가 풀리듯, 진화의 속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우레가 쳤다.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듯 진화의 다리에서 뇌기가 번뜩이고, 진화의 신형이 점점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