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행 화(禍) : 기회를 잡는 자(4)
도합 오십 년도 안 되는 세월.
하지만 진화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이었다.
기억을 하는 가장 어린 시절, 말을 배우기 전에 고문부터 받았고, 귀천성을 벗어나자 아주 잠깐 행복할 사이도 없이 진화는 귀천성에 쫓기기 시작했다.
귀천성이 뒤쫓는 소리.
옆에서 누군가가 죽어 가는 소리.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정말 밀려드는 파도처럼 닥치는 죽음.
지난 평생을 악몽에 시달렸고, 깨어나면 더한 악몽 속에서 살았다.
죽지 못해서 살았던 삶이었다.
그들에게 잡힐까 두려워 평생을 도망 다녔다.
성인이 되어 경지를 넘어섰을 때도 사냥감처럼 쫓겨 다녔는데, 이 어린 몸으로 뭘 어쩌겠는가.
숨을 생각밖에 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는 기쁨을 알아 버렸기에, 그만큼 더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괜찮아.’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든든하게 등을 맞댄 모습에서, 진화는 이제 남궁에 닥친 불행이 거두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진화는 온몸에 감겨 있는 족쇄에서 풀려나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남궁의 죽음에서 해방된 순간.
정의무학원 비무장을 나와서 숲까지, 진화는 이전 생의 악몽이 아니라 제 속에서 울리는 천둥 번개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껏 내달렸다.
* * *
챙! 챙!
“죽어라!”
푸-욱!
고요하던 숲에 병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인간의 고함이 울렸다.
새들이 떠나고 풀벌레마저 숨을 죽인 가운데, 짙은 혈향이 퍼졌다.
쉐에에에엑---!
“피해!”
“크아아악!”
절박한 적호단주 팽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제갈무진의 손짓 한 번에 담벼락에 있던 적호단원 다섯이 쓰러졌다.
그들 사이로 파고든 날카로운 빛에, 그들 중 넷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그리고 십여 명이 쓰러졌다.
“이, 이게 무슨……!”
연학원장 제갈무진.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사이건만, 남궁조는 저자를 처음 보는 듯했다.
하얀 얼굴에 날이 선 듯한 콧날과 입매, 약간 처진 눈썹을 제외하면 날카로운 눈매마저 ‘제갈’세가의 특징이 고스란히 있었다.
하지만 남궁조는 제갈무진이 진짜 제갈인지조차 부정하고 싶었다.
혈족에게는 그들 특유의 기색이 있는데, 일전에 보았던 유약한 학사는 어딜 가고 이렇게 사특한 기운을 풍긴단 말인가.
“대체…… 정체가 뭐지?”
남궁조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은 순간.
남궁조의 옆으로 적호단주 팽치가 붉은 머리를 날리며 맹렬하게 달려 나가고 있었다.
죽은 이들이, 팽치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던 수하들이었다.
“죽어라-!”
휘익! 휙-!
분노에 찬 팽치가 도기를 날렸다.
흥분하면 안 된다고 외치려던 남궁조가, 입을 떼지 못했다.
펑! 펑펑! 퍼---엉!
이어지던 굉음과 함께 붉은 머리가 뒤로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허……!”
적호단주 경격권 팽치다.
팽가의 사고뭉치지만, 팽가가 자랑하는 강한 무인의 표본이라.
그런 팽치가 끈 떨어진 연처럼 튕겨 나오는 광경에, 남궁조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정작 팽치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정말이지, 귀찮게 구는군.”
툭. 툭.
제갈무진이 옷에 있는 먼지를 털어 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미친……!”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겁먹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남궁조는, 적이 감히 제 앞을 유유히 걷게 내버려 둘 사내가 아니었다.
남궁조의 검에 푸른 뇌전이 번뜩였다.
콰—앙!
파파파파파팟----!
뇌선검(雷詵劍) 남궁조.
덕이 많고 인망이 높다 하여 붙은 별호였지만, 실은 폭풍 같은 뇌전의 남발이야말로 남궁조의 특기였다.
남궁조를 향해 제갈무진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번엔 잘나 빠진 남궁인가?”
쉐에에엑---!
악의 가득한 비꼼과 함께, 수십 개의 바람이 남궁조의 앞을 덮쳤다.
“흣!”
남궁조가 본능적으로 천뢰제왕검법 중에서도 강한 위력을 뿜는 폭력뇌전(暴力雷電)을 펼쳤다.
퍼----엉!
샤샤샤샤샥---!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따끔한 무언가가 남궁조를 스쳐 지났다.
그리고 현홍사가 눈부신 화살처럼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을 덮쳤다.
쉐에에엑--!
“크아아악!”
“아악!”
사방에서 적오단과 창궁무애단원들이 피를 뿜을 쓰러졌다.
참혹한 광경에 적호단주 팽치의 두 눈이 붉어졌다.
“뒤로, 뒤로 물러나라-!”
적호단주 팽치가 소리쳤다.
“비켜라!”
쉐에엑!
남궁조가 급하게 검기를 날리며 그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쉐-엑!
파파파파팟---!
남궁조의 뇌격이 현홍사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뇌기가 닿은 현홍사가 부스러지듯 깨어지며, 제갈무진에게 닿지 못했다.
그사이, 제갈무진의 현홍사는 남궁조의 옆구리를 노렸다.
스-윽!
“큭!”
불길한 기척에 몸을 돌렸으나, 남궁조의 옆구리로 피가 터져 나왔다.
제갈무진이 팽치와 남궁조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휘리리리릭---!
샤----악!
“크아아악!”
“컥!”
적호단과 창궁무애단 사이로 파고든 현홍사가 춤을 추는 듯 그들을 할퀴었다.
“안 돼!”
“이 개자식아!”
팽치와 남궁조가 다급하게 나서 현홍사를 끊었다.
하지만 현홍사의 진짜 무서운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척을 읽어도 어쩔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이었다.
“젠장!”
챙챙!
다급하게 끊어 냈지만 소용없었다.
붉은 철사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았자, 제갈무진이 손에서는 끊임없이 현홍사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현홍사의 기척을 읽고 빠르게 대처할 수 없었던 무사들은 그야말로 그물 안의 고기처럼 온몸에 상처를 입고 퍼덕일 수밖에 없었다.
“빨리 비키지 않으면 다 죽을 듯하구나.”
제갈무진이 재밌다는 듯 팽치와 남궁조의 약을 올렸다.
실제로, 팽치와 남궁조가 모든 현홍사를 끊어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교성흑오대까지 상대하는 것은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에게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팽치와 남궁조.
이성보다 성질이 뜨겁고, 말보다 칼이 더 빠른 사내들이었다.
“젠장! 닥쳐라!”
“지랄하고 자빠졌네-!”
팽치가 먼저 도를 들고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제갈무진이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흥! 어리석긴.”
쉐에에엑---!
현홍사 수십 가닥이 번뜩이며 뻗어 갔다.
퍼—엉!
팽치의 도와 현홍사가 부딪히며, 현홍사가 팽치의 도에 얽혀들었다.
그리고 팽치가 도를 버리고 뛰어들었다.
“더러운 면상을 피떡으로 만들어 주마!”
“헛소리가 무례하군.”
팽치의 말에 제갈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연결된 현홍사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뻗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남궁조가 천뢰제왕검 낙엽(落曄)을 퍼부었다.
파파파파파팟---!
타고 오르는 뇌격에 다시 현홍사를 버려야 하는 순간, 마침내 팽치가 제갈무진의 코앞에서 주먹을 들었다.
“……!”
“죽어, 새끼야!”
팽치의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 전안무한(戰安無限)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펑펑펑펑-퍼엉!
사람의 몸이 아닌 바위를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부서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퍼-엉!
“크엇!”
땅을 파헤쳐지며, 팽치의 몸이 삼 장가량 밀려났다.
동시에…….
파바바바바밧---팟!
“큿!”
멀쩡한 현홍사가 터지듯 흩어지며, 남궁조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제갈무진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발!”
남궁조가 제갈무진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적호단주와 창궁무애단의 전 부단주가 한꺼번에 덤비고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막막하다기보다, 답답해서 분통이 터졌다.
그때…….
파지지지지직--!
남궁조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소리에 제갈무진이 뒤를 돌아보자, 푸른 벼락이 그를 덮쳤다.
퍼---엉!
“큿!”
뭘 어찌할 겨를도 없이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여유 있던 제갈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신호는 남궁진휘를 비롯한 남궁세가에 지원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제갈후현의 폭주로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대신 장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현기가 지원을 이끌고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는 그걸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족쇄가 풀린 순간 정신없이 내달렸고, 그런 진화의 눈엔 고전하고 있는 창궁무애단과 적호단이 보였다.
그리고 제갈무진으로 보이는 자가, 가슴팍 앞으로 맨 보자기가 눈에 띄었다.
‘저거?’
귀천성 첩자가 탈출하면서 챙겨 갈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역천비록!’
진화의 눈이 커졌다.
쉐에에엑---!
앞을 막고 있는 교성흑오대를 베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역천비록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시퍼런 낫과 감은 검, 그 검을 든 팔, 어지럽게 움직이는 다리와 시야를 가린 몸통.
진화는 자신을 막는 교성흑오대는 물론, 예민한 기감에 거미줄처럼 얽힌 무언가까지, 푸른 검강에 닿은 모든 것을 베어 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역천비록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퍼—엉!
“진화야!”
남궁조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급한 건 이쪽이었다.
진화가 제갈무진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가지고 있는 거, 내놔.”
팽치의 시선이 진화를 거쳐 남궁조에게 향했지만, 남궁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모르는 척했다.
진화의 등장과 함께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제갈무진의 위험에 교성흑오대의 공세가 멈추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갈무진이 별다른 명령 없이 진화를 보고 있었다.
“……네가 남궁진화라고?”
제갈무진의 눈이 흥미를 가득 담고 진화를 보았다.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도 아니고, 그가 저를 멈추어서도 아니었다.
말간 얼굴이 눈에 띄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소년의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광채, 저를 덮치던 번개가 소년의 눈 속에 있었다.
‘천뢰제왕신공을 온전히 익히면, 눈 속에 창공을 담는다지. 정말로 천뢰제왕신공을 온전히 익혔구나. 제왕검에게 구해진 양자가!’
“허허, 흥미롭구나.”
쉐에에엑---!
제갈무진의 감탄이 무색하게 돌아온 것은 푸른 검기였다.
펑-!
제갈무진의 몸이 밀려났다.
저 나이에, 제갈무진을 때리는 검기 하나하나가 남궁조나 팽치보다 강하고 치명적이었다.
갈수록 기가 찬 소년이었다.
“네가 초절정이라고 했었던가?”
제갈무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제갈무진의 눈빛은 진화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파지지직--!
마치 출발 신호를 하듯 뇌전을 번뜩인 진화가, 제갈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펑! 펑! 퍼-엉!
“허! 누가 남궁 미친개의 아들 아니랄까 봐.”
제갈무진을 몰아치는 진화를 보며, 남궁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복날에 개 패듯 함부로 휘두르는 듯한 검이, 하나같이 위력적으로 제갈무진을 때렸다.
게다가 조금의 틈도 없이 빠르게 제갈무진의 품을 파고들듯 거리를 좁혔다.
제갈무진이 위험한 듯 보이자, 교성흑호단이 일제히 진화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앵!
“소공자를 도와라!”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이 교성흑오대의 앞을 막아섰다.
팽치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진화가 제갈무진을 밀어붙이는 광경을 보았다.
자신과 남궁조가 힘을 합하고도 얼마나 힘들게 저 품에 파고들었는지 떠올리며 남궁조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남궁조는 그를 피하는 듯 어느새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팽치는 결국 눈앞의 교성흑오대에 집중했다.
정의맹 적호단과 남궁의 창궁무애단이 어린 소년의 보조를 하게 생겼지만, 지금은 이게 맞았다.
쉐에에엑--!
파바바바-밧!
제갈무진이 쏜 현홍사가 채 다 빠져나오기도 전에 진화의 뇌전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른 때와 같이 끊어지지 않은 채, 뇌전에 현홍사를 타고 제갈무진을 향했다.
“칫!”
제갈무진이 혀를 차며 팔을 휘둘러 억지로 현홍사를 끊었다.
진화는 현홍사의 빛에 속지 않았고, 날카로움을 겁내지도 않았다.
두려움을 잊은 진화의 검기에, 현홍사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여유가 사라진 제갈무진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휘이이이익--!
파팟-!
붉은 기운이 현홍사를 감싸고, 빛처럼 쏘아지기만 하던 그것이 바람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폭풍같이 사나운 기세로 진화를 덮쳤다.
하지만 그것조차 진화를 멈추진 못했다.
“시끄럽고, 그거나 내놔.”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던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시퍼런 뇌전이 이빨을 보이듯 번뜩였다.
섬전십삼검뢰 붕격우산(崩擊雨山)--!
사방에서 몰아친 번개가 붉은 현홍사가 만든 회오리를 뚫고 쏟아졌다.
역천비록이 손에 닿을 듯한 곳에 있었다.
검강이 현홍사를 뚫어 낸 틈으로, 진화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갈무진의 요요한 눈빛과 마주했다.
샤아아아아악---!
“……!”
오랜 본능이 진화의 몸을 틀었다.
퍼---엉!
아슬아슬하게 진화를 지난 제갈무진의 공격이 애먼 곳을 때렸다.
하지만 그 광경에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휘리리리릭!
현홍사로 된 철의 회오리가 제갈무진의 손안으로 사라졌다.
“무, 무슨……!”
남궁조가 겨우 입을 떼었으나,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진화 또한 흔들리는 눈으로 굉음이 난 곳을 보았다.
그곳은 마치, 용의 발톱에 할퀸 듯 그야말로 숲이 뜯겨 나가 있었다.
“이젠 슬슬 지겹구나.”
제갈무진이 요요한 미소를 지으며 진화에게 말했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팔현마제, 그중 혼현마제(渾眩魔帝)가 지난 곳엔 타락한 용이 몸부림의 친 듯한 흔적만 남았다 했던가……. 이자, 설마……?’
진화가 눈을 크게 뜨고 제갈무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