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행 화(禍) : 기회를 잡는 자(5)
혼현마제.
귀천성 팔현마제 중에서도 혼현마제는 신비에 싸인 인물이었다.
혼현마제는 정사 연합의 공격에 죽었다고 전해졌기에, 모두가 그의 정체를 궁금해했었다.
죽은 전대 혼현마제의 제자라는 말도 있었고, 혼현마제 본인이 죽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혼현마제의 이름, 출신, 나이, 외모 어떤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전해지는 말로…….
‘정의맹주를 죽이고 귀천성의 부활을 만들어 낸 독살자. 정사 연합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빼앗긴 영역의 절반을 되찾은 천고의 모략가. 그러나 누구도 그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했고, 그가 다녀간 자리에는 단지 타락한 용이 만든 혼란만이 자리했다.’
무슨 전설이나 민간설화처럼 전해지는 말이라, 믿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 진화는 혼현마제를 마주한 적이 없어서 흘려듣고 말았다.
광마제에게 쫓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귀천성의 부활이나 전쟁의 결과를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하지만 붉게 빛나는 요요한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 * *
진화가 제갈무진을 살폈다.
‘저자가 혼현마제일 수 있나?’
제갈가주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얼굴.
제갈무진이 제갈가주와 사촌 간이라 했으니, 실제로도 마흔을 조금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에서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던가.
아마도 같은 생각을 제갈무진 또한 하고 있을 터였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구나.”
제갈무진이 진화를 보는 눈빛이 이전과 달랐다.
붉고 요요한 눈빛이 오로지 진화만을 향했다.
이제까지 모든 이들을 무덤덤하게 보던 그가, 마치 진화만이 특별한 존재인 듯.
실제로 제갈무진에게 진화는 유일한 존재였다.
‘허허! 모든 정파인들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백의생 애송이 중에 저런 놈이 나타날 줄은 몰랐군. 하나…….’
변수는 단지 변수일 뿐이었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조정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는.
“재미는 있었으나 이제 슬슬 가야겠어.”
제갈무진의 요요한 눈빛이 번뜩였다.
* * *
“진화야!”
남궁조가 진화를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휘이이익----!
쏴—아!
제갈무진의 손에서 나온 현홍사와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기세를 일으키며 쏟아졌다.
돌풍에 스치는 모든 것이 핏줄기가 그려졌다.
제갈무진의 움직임과 함께 교성흑오대의 움직임도 변했다.
어떤 명도, 신호도 없이, 그들은 주인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다시 온다!”
적오단주의 외침과 함께.
쉐에에엑---!
푹! 푹!
챙-! 챙--!
교성흑오대가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을 둘러싸며 빙빙 돌았다.
똑같은 검은 가면이 눈을 혼란스럽게 하는 동시에, 제갈무진의 현홍사가 그들의 몸을 뚫고 적호단과 창궁무애단 무사들도 뚫었다.
“이런 망할!”
교성흑호대는 온몸으로 현홍사의 기척을 가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현홍사가 그들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지 않고 피해 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교성흑오대가 죽어 가는 것도 상관없이, 쓰러지면 다시 그 자리를 메워 가며 싸운 것이었다.
그들은 현홍사에 온몸이 뚫리면서도 상관없이 낫처럼 생긴 검을 휘둘렀다.
푹!
쉐에에엑-!
“으억!”
수하들이 쓰러졌다.
“이런 미친 새끼들!”
수하들만큼 교성흑오대도 쓰러졌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잔인하고 섬뜩한 방식.
“질리는 새끼들.”
남궁조가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갈았다.
목숨을 불나방처럼 내던지는 귀천성의 방식엔,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수하들이 죽어 가는 것이 먼저였다.
“이놈들을 뚫어야 한다! 창궁무애단, 진법 일식 무궁무애(無窮無碍)를 펼쳐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궁세가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진법이었다.
남궁조의 외침과 함께, 창궁무애단이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움직이는 화살처럼, 단단히 뭉쳐서 원진의 한 곳을 뚫었다.
교성흑오대가 시야를 가린 사이, 제갈무진은 적은 물론 수하들까지 모두를 죽이면서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갈 참인 듯했다.
하지만 그건 진화가 역천비록을 보기 전에나 가능한 말이었다.
‘놓칠까 보냐!’
진화가 뛰어올랐다.
채---앵!
퍼어어억-!
창궁무애단이 교성흑오대를 방패 삼는 동시에 그들을 때렸다.
푹푹!
현홍사가 순식간에 교성흑오대의 몸을 뚫고 앞에 있던 창궁무애단의 활촉 부분을 노렸다.
그때, 진화의 검이 현홍사에 감겼다.
아니, 일부러 검에 현홍사를 감은 것이라.
진화는 그대로 현홍사를 감아 가며 제갈무진을 찾아 달려 나갔다.
탓!
“소공자를 보호해라!”
놀란 남궁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뛰어오르는 진화에게 교성흑오대의 낫 같은 검이 쏟아졌으나, 창궁무애단이 이를 악물고 그것을 막았다.
그사이 교성흑오대의 공격은 적호단이 막았다.
‘젠장! 백의생 주제에……!’
적호단주 팽치는 화가 났다.
겨우 정의무학관 관도생 주제에 나서는 진화에게가 아니라, 겨우 관도생에게 제갈무진을 맡기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 검을 맞대었지만, 자신이나 남궁조로는 제갈무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붉은 쇠 현을 무기로 쓰는 건 겪어 보지 못했기에 어찌 상대할지 감도 서지 않았다.
‘아니, 아니, 다 핑계지. 저 녀석이라고 이런 걸 겪어 본 것도 아닐 텐데! 적호단주라는 직책만 번지르르해선!’
“젠자--아앙!”
팽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도를 휘둘렀다.
휘이익! 휘이이익!
파팟-!
진화의 몸이 방향을 틀 때마다 튀어 오르는 피가 백의생 관도복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곧 진화가 휘두르는 번개가 휘날리며 저를 노리는 현홍사를 모조리 태우고, 제갈무진의 가슴을 노렸다.
“허!”
퍼펑-! 펑! 펑!
남궁조의 천뢰제왕신공은 양의 기운을 극성으로 모아 뇌전을 일으킨 것이라 여타의 검법처럼 현홍사를 잘라 내는 데에 그쳤다면, 진화의 그것은 뇌전 그 자체라.
진화의 뇌전은 외부를 뚫고 내부를 파괴했다.
쉐에에에엑--!
퍼-엉!
“놀랍구나!”
상쇄되었어야 할 기운이 터져 나가는 것을 보며, 제갈무진의 눈이 커졌다.
설마 현홍사 회운(回運)까지 뚫을 줄이야!
정말로 예상 밖의 소년이었다.
하지만 제갈무진이 어떤 눈으로 저를 보든, 진화는 제갈무진의 코앞까지 파고들어 그의 가슴팍만 노렸다.
“내놔.”
네가 누구면, 뭐.
공력을 올려서 웃기지도 않는 쇠 현의 형태를 조금 바꾼 것이 뭐.
어차피 서로 빼앗고 죽이러 온 자리다.
그게 전쟁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어린 겉모습을 보고 설렁설렁 상대한 제갈무진의 방심이 이상한 것이었다.
진화는 제갈무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은 그저 적(敵)일 뿐이라!
쉐에에엑!
휘이익-!
코앞에서 들리는 진화의 목소리에 제갈무진이 팔을 휘두르고, 진화가 몸을 돌려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장포 자락을 타고 검을 치켜올렸다.
파지지지직---!
퍼펑!
푸른 번개와 현홍사가 숨겨진 붉은 장포 자락이 부딪혔다.
챙-! 챙챙!
진화와 제갈무진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공방.
그와 중에도 진화의 눈은 제갈무진이 메고 있는 붉은 보자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점점, 온 신경이 그것에 집중되었다.
‘역천비록! 저것만, 저것만 있다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이전 생의 비참한 통곡 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성대는 가운데, 진화는 그저 붉은 보자기만을 보았다.
‘잡아야 한다! 잡을 거다!’
진화의 눈에 푸른 번개가 번뜩이고, 그의 검이 은은한 푸른 기광으로 빛났다.
‘잡아서, 운명을 없애 버릴 거다-!’
쉐에에에엑---!
천뢰제왕검 낙엽이 다시 한번, 연사된 화살들처럼 제갈무진의 온몸으로 쏘아졌다.
그때…….
“진화야, 정신차려라-!”
다급한 남궁조의 목소리가 진화를 깨웠다.
화들짝 정신이 깬 듯한 진화는 시야가 맑아짐과 동시에, 현홍사와 교성흑오대 사이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착각?”
진법!
현홍사와 교성흑오대로 만들어 낸 진법에 속은 것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진화가 놀란 눈을 뜨고 제갈무진을 찾았다.
제갈무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화를 돌아보며 서 있었다.
진화를, 모두를 비웃으며 이대로 이 아수라장을 빠져나가려는 듯했다.
“이런 망할!”
삶을 돌아오고 처음 느끼는 굴욕이었다.
‘속아? 또 속아?’
어떻게 또 귀천성 놈들에 속아 넘어갔단 말인가!
이전보다 강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진화의 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진화의 분노에 온몸의 뇌기가 반응했다.
“으아아아-!”
쉐에에엑---!
진화의 검이 그대로 저를 둘러싼 현홍사와 교성흑오대를 베어 냈다.
피륙이 터지고 철사가 튕겨 나갔다.
그 사이로 진화의 검이 선연한 청광을 뿜고 있었다.
여유롭게 진화를 보고 있던 제갈무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순식간에 제갈무진에게 다가온 진화가 청광에 싸인 번개를 휘둘렀다.
“그거 내--놔!”
“갈-!”
제갈무진이 사납게 소리쳤다.
천뢰제왕검 폭렬뇌전(爆裂雷電)--!
퍼------엉!
거대한 기운의 폭발이 무너진 공터에 휘몰아쳤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폭발에 휩쓸렸다.
남궁조와 팽치마저도 실눈을 뜨며 버텨야 했다.
폭발이 지나가자, 잠깐의 정적과 함께 희뿌연 먼지가 눈을 가렸다.
그리고 잠시 후 먼지마저 가라앉은 그곳엔…….
“쿨……럭!”
“진화야!”
위태롭게 선 진화가 입에서 피를 쏟았다.
그 뒤로, 제갈무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검강이라. 실로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로군. 또 볼 일이 있을 것이다, 남궁진화.
어느새 제갈무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교성흑오대마저도 시체를 제외하곤 모조리 사라졌다.
“으드득! 젠장!”
제갈무진의 전음에 이를 간 진화가 비틀거렸다.
경지를 넘어서고 처음으로 그만한 검기를 뿜었기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 흔들렸다.
게다가.
‘제갈무진이…… 진짜 혼현마제였다고?’
마지막, 진화는 제갈무진의 현홍사가 제 검기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
모든 것을 삼키듯 소멸시키는 혼탁한 기운.
역천마제와 팔현마제만 익혔다던 역천신공(逆天神功)의 기운이었다.
‘아직도 역천마제는커녕, 팔현마제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는 건가?’
분노와 허탈감을 느끼기 전에, 의문이 들었다.
진화는 마지막 뇌기가 역천신공의 기운을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검 끝이 닿은 것 같았는데…….’
진화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는 듯 움직였다.
그때, 그런 진화의 발에 무언가가 차였다.
투둑.
‘음?’
동그랗게 말린 두 개의…… 죽간!
“……하!”
진화의 눈이 커지고,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죽간, 제갈무진이 가지고 있던 역천비록이 분명했다.
‘닿았다! 닿았던 거야!’
진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하하! 하하하하. ……그래. 또 보게 될 거다. 제갈무진.”
진화가 죽간을 들었다.
이번 생에 들어서 처음으로 팔현마제 중 하나와 맞붙은 결과, 진화는 역천비록의 일부를 얻었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그들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은 순간이었다.
* * *
“그래, 세상사가 너무 뻔하면 재미가 없지. 그런 의미로 이번엔 제법 재미가 있었구나.”
제갈무진이 숲길을 유유히 걸었다.
곧 교성흑오대가 검은 가마를 가져와 앞에 대령했다.
제갈무진이 숲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련을 털듯 한번 웃은 제갈무진이 가마에 올랐다.
아니, 오르려던 참이었다.
제갈무진이 가마에 오르다 말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가마에 앉기 전에 올려놓은 보자기가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두 개, 모자라는군!”
자신의 가슴팍에 있던 것이었다.
만약 보자기에 죽간과 서책이 없었더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갈무진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남궁진화라…….”
제갈무진의 얼굴이 사뭇 심각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