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불행 화(禍) : 기회를 잡는 자(6)
“하아…….”
깊은 한숨 소리에, 하나씩 멍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목숨을 걸고 온몸의 힘을 다해 싸운 후, 무사들은 그저 멈춰 있었다.
생각하고 움직일 힘을 전부 다한 듯,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그러다 비릿한 혈향이 강하게 코끝에 닿고, 조금 정신이 들면 그때부터 사방에 널브러진 죽음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 앞에서 어떤 것도 무용해지는 법이라.
실패한 임무에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그 후엔…….
“우욱. 흑…….”
“조장. 조장. ……으흑흑흑흑!”
죽은 이들로 인한 슬픔이 몰아쳤다.
눈물을 쏟으면서도 목 놓아 울지 못하고 시체를 수습하는 광경이 더 슬펐다.
슬퍼하는 사람 하나 없이 버려진 교성흑오대의 주검도 조용히 수습했다.
치열했던 전장의 뒤에 남겨진 침묵(沈默)이야말로, 전쟁의 비애가 아닐까.
* * *
의선문에서 사람들이 와서 시신을 수습했다.
죽은 교성흑오대원들의 시신도 그렇지만, 죽은 적호단과 창궁무애단원들의 시체는 제갈무진이나 교성흑오대의 무공을 파악할 자료 그 자체라.
물론 거기엔 유족들에게 시체라도 온전하게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역시 역천비록을 가져갔나?”
“해석본은 모두 사라졌지만, 다행히 원본은 안전하게 있다고 합니다. 제갈가주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백매단이 연학원 보안부터 연구물을 모두 수색하는 걸 허가해 준 덕분에, 제갈세가에 있는 건 확인을 했다더군요.”
“참, 제갈세가는 난리가 났다지?”
“예. 제갈후현이 기운의 폭주로 쓰러졌으니…… 거기에 대청대가 전멸하다시피 했고, 상현대나 하현대의 희생도 만만치가 않다고 합니다.”
숲에서 복귀한 남궁조에게 남궁진휘가 이곳의 상황을 전달했다.
“그래, 제갈후현이 폭주했다고 들었다. 그 일은 어찌 수습했느냐?”
남궁조의 물음에, 남궁진휘가 슬쩍 한쪽을 보았다.
안 그래도 장원에 도착하자마자 제 몸부터 살피던 진화였다.
조용히 쓰디쓴 탕약과 눈싸움을 하다가, 이쪽으로 두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무학관주님께서 나서 주셔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창궁무애단이 열 명이나 죽었지. 가주님 뵐 면목이 없구나.”
“그게 어찌 숙부님의 탓이겠습니까. 그자의 실력이 그토록 뛰어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빌어먹은 죄책감이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
남궁진휘의 위로에도 남궁조는 씁쓸한 얼굴을 펼 줄 몰랐다.
오히려 더 눈빛을 굳히며 남궁진휘를 보았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느끼는 죄책감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빌어먹게 더럽긴 하지만, 실패한 임무라도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다는 걸, 가주님이나 너 같은 윗대가리들은 꼭 기억해 줘야 하는 거다.”
말이 낮고 거칠다고 해서 가르침마저 낮은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윗대가리로서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웃으며 답한다고 해서 존경마저 웃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남궁진휘는 남궁조의 말투를 따라 함으로써, 남궁조가 하고자 하는 충고를 온전히 다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건 진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알던 남궁세가와는 전혀 다른 모습.
이전 생에 남궁도와 남궁교명이 이끌었던 남궁세가는, 서로 책임지지 않기 위해 임무를 미루고, 꼬리를 끊어 내듯 수하들의 희생을 강요했었다.
하지만 본래의 남궁은 지금의 모습이었던가.
남궁의 모든 희생을 기억하려 하는 남궁조와 남궁진휘의 모습에, 진화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런 남궁을 위해 싸우고 죽었다면 이전의 희생도 의미가 있었을 것을.’
죽은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진화는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이 더 나았을 거라 확신했다.
지금 자신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제갈후현은 어떻게 된다 하더냐?”
“지금 그 비약에 대한 것과 함께 정의맹 조사가 시작되었고, 제갈후현은 단천문 소문주와 함께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역천비록과의 연관성은?”
“그걸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역천비록의 연구를 그자가 전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허!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군.”
“다행히 역천비록 원본은 남아 있지만, 그것도 큰일입니다. 이제까지 연구된 해석본이야 그렇다 쳐도, 고대 문자를 풀어 내는 해례본은 없어졌으니, 요즘엔 고대 문자에 박식한 학자를 찾기도 힘드니까요.”
“젠장! 아예 고양이에게 생선을 바쳤구먼! 제갈성질 놈이 얼마나 지랄을 하든, 그때 그냥 연학원이고 제갈무진이고 덮쳤어야 했는데! 괜히 마음이 약해졌어! 괜히 그놈을 믿어 보자는 맹주님 꼬드김에 넘어가서!”
남궁조의 말에 남궁진휘도 굳은 얼굴로 동의했다.
제갈무진도 놓친 마당에 역천비록마저 잃은 격이니.
원본이 남아 있다곤 하지만 그걸 다시 연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
“그놈들이야 약 처먹고 뒈지든가 말든가 상관치 않는다지만, 우리 진화는…….”
“…….”
진화를 본 남궁조는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저 어린 녀석이 어쩌다 그런 숭악한 놈들이 엮여 가지고…….’
중년 남성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며 당황한 사람은 진화뿐이었을까.
남궁진휘 또한 남궁조와 비슷한 눈빛으로 진화를 보고 있었다.
남궁세가에게 역천비록은 진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앞으로 진화에게 위협이 될 것을 제거할 생각에 창궁무애단까지 나선 것인데…….
“하나라도 건진 게 없군.”
남궁조의 말과 함께 남궁진휘 또한 진화를 보는 눈에 안타까움이 물들었다.
그때였다.
진화가 조심스럽게 두 개의 죽간을 꺼냈다.
“두 개 건졌습니다.”
“이것이 뭐냐?”
“현장에서 다들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서 제가 챙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죽간요. ……그 해례본인 듯합니다.”
“……!”
남궁진휘가 급히 죽간을 펼쳤다.
아이의 그림같이 생긴 고대 문자의 옆으로 해석될 수 있는 한자가 쓰여 있었다.
“해, 해례본인가 뭔가, 그거 맞아?”
“맞습니다!”
“허! 복, 복덩이! 우리 복덩이! 허허허허허!”
“윽!”
남궁진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조가 감격한 듯 진화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진화는 중년 남자의 겨드랑이에 끼인 채 괴로워했지만, 견딜 만은 하다고 생각했다.
희생은 컸다.
희생은 언제나 컸다.
그런데…….
‘역천비록을 두고 도망을 가다니…….’
진화에 의해 일찍 발각된 것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혼현마제가 역천비록을 챙기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그리고 진화가 빼앗은 두 개의 족자.
이번 일을 계기로 진화는 남궁이 건재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단지 남궁진휘를 살린 것만이 아니라, 남궁세가가 귀천성과 대적할 힘을 가졌단 걸 깨달은 것이다.
제왕검부터 남궁진휘까지, 남궁의 역사와 미래가 안전하게 이어졌다.
현재, 남궁의 어른들은 세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이제 더는 움츠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드디어 잡았다, 새로운 기회!’
이전 기억대로라면 역천마제의 부활은 아직 멀었다.
광마제는 아직 부상 중일 것이었다.
온전치 못한 귀천성.
건재한 남궁세가!
진화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쫓고 쫓기던 운명의 방향이 변하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내가 쫓을 차례다!’
진화의 눈에 기대감이 일렁였다.
* * *
양청현 전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듯 이질적이고 고요한 분위기가 흘렀다.
정의무학제는 제갈후현의 폭주로 중단되고 정의맹은 따로 진행한 임무에서 실패했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 없겠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곡소리가 울리고, 거리에도 향냄새가 맡아지는.
양청현 사람들도 십수 년간의 평화가 끝나가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귀천성의 첩자가 다른 곳도 아닌 제갈세가에 숨어 있었던 것도 큰 충격이었다.
덕분에 제갈세가는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가문의 후계자인 제갈후현은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배신자 제갈무진은 결국 놓치고 말았다.
거기에 제갈무진의 추포 과정에서 제갈대청대는 전멸하다시피 했고, 상현대와 하현대도 피해가 컸다.
무림의 문파와 세가가 다른 것은, 혈연으로 엮여 있다는 점이다.
무사들의 죽음은 단지 전력 상실뿐 아니라, 가족의 죽음 그 자체라.
대성전에 빈소가 차려지고, 제갈세가 전체가 장례식을 엄숙하게 치르는 가운데 슬픔과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제갈세가에 닥친 더 큰 슬픔은, 가족들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마저 충분히 갖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특히 제갈가주에겐 가문의 분위기를 수습하고 다독일 여유가 없었다.
제갈가주가 직계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가주가 내부 사정을 챙길 수 없을 때 가주의 상징성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가문의 직계뿐이었으니.
하지만 가문의 구심점이 되어 주어야 할 부인 서상아는 다른 곳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후현이는요? 계속 의선문에 둬서 되겠어요? 차라리 세가로 데려오는 것이……!”
“안 되오! 후현이는 정의맹과 의선문의 처사를 따라야 할 것이오.”
“가가!”
제갈가주가 제갈후현에 대해 입을 떼는 부인 서씨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제갈후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부인 서씨를 흥분하게 했다.
“자식이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냉담한 반응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그만! 내 더는 말을 말라 하였소.”
“가가, 말을 말라니요! 어찌 그리 냉혈하단 말입니까? 지난번 소현이 일은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만은 못 참습니다! 제 친정을 동원해서라도 당장 정의맹을 압박해서 흉수를 밝혀내…….”
“그만하라 하였소!”
“후현이 일입니다! 다른 아이도 아니고, 가문의 소가주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참지 못한 제갈가주도 소리를 질렀다.
“소가주라는 녀석이 약을 먹고 쓰러졌소! 제갈무진 놈이 만든 것이라 의심받는 약이오! 그런데 그 약을 누가 유통을 했을까? 무려 중원 전역으로 뻗어 갔더군. 어느 상단에서 그 일을 했을까! 내 더 말을 해야겠소?”
“그, 그게 무슨……!”
제갈가주의 폭발한 듯 몰아붙이는 말에, 부인 서씨가 놀란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놀란 듯 떠듬거리는 모습조차도 제갈가주의 비웃음을 샀다.
“정녕 후현이 놈이 부인 가문의 장문상단을 그리 쓰고 있음을 몰랐소?”
“무, 무슨 뜻입니까?”
“장문상단에서 작은 상단을 연결해 주고 중간이득을 쏠쏠하게 챙겼던데, 부인께서는 정녕 모르고 있었느냔 말이오!”
“가가!”
“후현이 놈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뛸 때, 욕심 많은 장인께선 말리기는커녕 눈이 벌게져서 이문을 좇았겠지. 내 눈을 피해 아무도 모르는 작은 상단을 연결해 주면서까지!”
제갈가주가 폭발했다.
처음 보는 상단들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의심했지만, 중간중간 제갈소현의 상단이나 연하상단의 휘하 상단을 넣어서 눈을 가렸다.
그 바람에 파악이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다.
“가, 가가……!”
“이 일을 여기서 수습하지 못하면, 제갈은 그렇다 해도 장문상단은 어찌 될 것 같소? 일이 수습될 때까지 의선문에서 얌전히 치료받고 있는 것이 후현이가 살길이오. 오직 그것만이 장문상단의 모두가 목숨을 부지하는 방도고. 아시겠소?”
제갈가주가 당장이라고 부인 서씨의 목을 조를 듯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물론 그녀의 가문을 비하하는 말도 있었지만, 부인 서씨는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상복 입고 죽은 이들을 위해 곡이나 하시오. 내가 일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부인의 자존심 챙기려다 제갈에 상처라도 낸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
“부인 목숨도 살리려면, 가문 사람들이 감복하도록 열심히 곡을 해야 할 것이오.”
결국 제 목숨까지 위협하는 말에, 부인 서씨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딸인 제갈지현마저도 냉담한 얼굴로 어머니를 외면하고 있었다.
절망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보던 부인 서씨의 시선이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제갈용성에게 닿았다.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제갈후현의 그림자 노릇을 하던 제갈용성까지 모르고 있을 리 없었으니.
“너, 너……! 네놈! 네가 꼬드겼지! 천하디천한 종년의 자식이 후현이를 꿰어…….”
“부인-!”
이성을 잃어버린 듯, 부인 서씨가 제갈용성을 향해 원망과 분노를 쏟아 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듣기 거북했던 제갈가주의 노성에 가로막혔다.
제갈가주가 부인 서씨를 끌어 올리는 듯 일으켜 세워 눈을 마주했다.
“내 말 명심하시오. 이것조차 제대로 못 해낸다면, 정말로 다음은 없소.”
“가, 가가…….”
“나가서 몸가짐을 추스르고, 할 일을 하시오.”
겁을 먹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에 똑바로 경고를 한 제갈가주가, 결국 축객령으로 부인 서씨를 먼저 내보냈다.
“지현이 네가 잘해야 할 것이다. 유족들을 다독이고, 총관부와 함께 보상 문제를 논의하도록 해라.”
“예.”
제갈지현도 용무가 끝나자 가주전을 나갔다.
그리고 제갈용성만이 남았다.
제갈가주가 아무 말 없이 제갈용성을 보았다.
“…….”
제갈후현의 손발이 제갈용성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가주가 장문상단까지 파악했다면, 제갈용성 또한 더 할 말은 없었다.
제갈용성이 무덤덤한 얼굴로 침묵을 견뎠다.
그 모습을 보던 제갈가주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 제갈가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짜---악!
제갈용성의 뺨을 내리친 제갈가주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리고.
피가 흐르는 입가를 매만지며 제갈용성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전부…… 아셨나 봐요?”
유약하고 소심한 둘째가 아닌, 복수의 기회를 잡은 사내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