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보물을 노리는 이들(1)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정의맹 총연맹회의가 벌어졌다.
맹주인 운현대사가 직접 진행하고, 총군사인 제갈성진부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대표자들은 물론 감찰단과 정의맹 각 무단의 대표자들도 모조리 자리했다.
탕-!
“불가합니다! 그건 정의맹에 귀속된 것이 아닌 제갈세가의 태상가주께서 연구품으로 가져오신 겁니다!”
“그런 위험한 물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럼 제갈세가에서는 작금의 사태를 어찌 책임지겠다는 말이오?”
총군사인 제갈가주는 회의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제갈세가에서 보관 중이던 역천비록은 엄밀하게, 전대 가주가 얻어 낸 전리품이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정의맹은 귀천성에 관한 한 사소한 권리쯤은 가볍게 묵살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 풍조를 만들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제갈가주였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제갈세가가 되었을 뿐이고, 이 자리의 많은 이들이 아닌 척 그런 제갈의 처지를 고소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약이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간 전황이 있습니다. 제갈세가 전체를 조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신자는 제갈무진이었지만, 남은 이들이 없을 거라 보장할 수도 없고요.”
“남궁조!”
남궁조가 제갈세가 전체로 수사 영역을 넓히자는 이야기를 제갈가주의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대외적으로 남궁세가는 이번 일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창궁무애단 무사들의 희생도 있었으니.
“이봐, 제갈가주, 그쪽도 아들은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니야? 의선문이 아니면, 그 비약인지 독약인지의 해약은 어떻게 할 거야?”
남궁조가 ‘대충 이만했으면 알아 먹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자에 돈 뜯으러 다니는 날패 같은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제갈세가에서 연학원의 방비가 어떻고 하면서, 구태여 제갈무진을 세가 안에서 잡겠다고 해서 이쪽이 양보했지. 그래서 결과가 어떻지? 괜한 희생만 키웠어. 게다가 역천비록 연구 결과도 빼앗겼지.”
“남궁세가 대리인은 예의를 좀 지키십시오. 그리고 역천비록의 연구 결과는 엄연히 제갈세가의 귀속품입니다. 아까워해도 우리가 할 테니 신경 끄십시오. 무사들의 희생에 관해선 충분히 보상 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조의 지적에, 제갈가주가 인내심을 발휘하며 반박했다.
“보상? 그거야 당연한 말이고. 내가 말하는 건,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말이야.”
“……뭐?”
남궁조의 말에, 제갈가주는 불현듯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갈가주는 그 이유를 알았다.
‘남궁조가 다르다! 눈빛. 나를 동정하는 저 눈빛…… 설마!’
그때였다.
자리에 없었던 적호단주 팽치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단천문주가 다 불었습니다. 거래 내역부터 전표와 주고받은 전서까지 있습니다. 단승호도…….”
적호단주의 눈이 제갈가주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승호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적호단주의 말에 제갈가주가 눈을 크게 떴다.
의선문은 제갈가주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 일은 처음 들었다.
“단승호가 정신을 차리고, 폭주하기 전에 제갈용성과 만나 차를 마시고 약을 건네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제갈가주는 참담하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로 제갈가주를 보았다.
“집구석이 개판이구먼.”
“쓰읍, 자중하시게.”
“뭐, 내가 틀린 말 했소?”
“어허, 그래도!”
팽가가주와 모용가주의 대화가 제갈가주의 귓속에 박혔다.
아, 결국은 이 조롱을 받는구나!
하지만 더 이상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제갈용성이 약을 융통한 정황이 드러났으니.
일이 잘못되면, 약의 융통 정황이 제갈후현에게까지 닿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아직 안 될 말이지.’
제갈가주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당장 제갈용성을 추포해 와야 합니다!”
“제갈용성을 조사해서 제갈무진과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역천비록을 더 이상 제갈세가에 두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더 제갈무진 그 배신자와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조사를 통해 명명백백 밝혀야 할 것입니다.”
“역천비록부터 의선문에 주고, 정의맹에서 나서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중원 전역에 그 약이 퍼졌다면 필시 혼란이 닥칠 것입니다!”
이때다 싶어서 물어뜯는 문파들은 물론, 어제까지 제갈가주에게 아부하던 이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제갈세가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역천비록이 문제가 아니라, 어렵게 쌓아 올린 가문의 명성이 위태로웠다.
‘고작 이걸 먼저 알고, 날 그런 눈으로 본 거라고?’
제갈가주가 남궁조를 보았다.
모든 이들이 제갈을 성토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가장 관계가 나빴던 남궁조만 조용했다.
오히려 남궁조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날 동정할 리 없지. 젠장,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으드득……!”
제갈가주가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결국, 적호단주 팽치가 제갈세가로 출발했다.
정의맹을 나서는 길.
제갈가주는 조사를 받고 돌아가는 단전문주를 불렀다.
“자네, 모두가 다 죽는 길이야! 그런데 뭘 어째?”
“그럼, 저라고 뭘 어쩝니까! 자식이 죽어 가고 있는데! 증언을 해야 내 자식을 살려 주겠다지 않습니까!”
제갈가주의 매서운 눈빛에도 단천문주는 당당하기만 했다.
꼼짝없이 외아들을 잃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깨어나 한 첫 마디가, 제갈용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단천문주가 모든 증거를 들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도 속에 천불이 나는 것을 참고 있는 것입니다! 제갈용성이 내 아들을 죽일 뻔했습니다! 무슨 속셈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도 더는 참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용성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참지 않으면?”
“단천문이 제갈세가보다 작을지는 모르나, 제갈세가와 붙자면 못할 것도 없지요!”
제갈가주가 협박조로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겁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단천문주도 제갈세가의 무단이 이번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겁을 먹을 리가.
본래 단천문은 문주의 무공과 무전단천대라는 무단의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래…….”
제갈가주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단천문주를 보았다.
당당하게 저를 노려보는 눈길에는, 분노와 함께 약해진 제갈을 향한 조롱도 있었다.
역시…… 무림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물어뜯기는 법이었다.
제갈가주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좋아. 이 일로 단천문 또한 무사하진 못할 것이네.”
“각오했습니다! 그럼 이만 각자도생(各自圖生)하지요!”
제갈가주의 마지막 경고도 호기롭게 받아친 단천문주가 방을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제갈가주.
그의 눈빛이 시리게 내려앉았다.
“연영, 가문 회의를 소집하게. 그리고 지금 즉시, 장강을 이용하는 단천문 표물을 끊어 버리고, 저자 건물들의 세(稅)를 올리라 하게. 단천문 표국을 이용하는 상단은, 제갈소청대를 보내 주겠으니 모두 거래를 끊으라 전하고.”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 돼. 남궁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혹여 용성이 일까지 전부 알고 있는 거라면, 단승호를 없애는 즉시 우릴 치고 올 거다. 단천문은 그 정도만 해도 괜찮을 거다.”
-존명.
제갈가주의 명을 받은 인기척이 사라졌다.
“약해서 제갈에 빌붙은 주제에 각자도생이라. 제갈을 얕보아도 한참 얕보았군. 무림에서 중요한 건 무력이지만, 인간사를 좌우하는 것은 금력인 것을.”
제갈가주는 단천문이 행하는 모든 상업 거래를 끊어 버리라 명하고는, 조용히 세가로 향했다.
제갈가주, 현우수사 제갈성진의 얼굴이 칼날 위를 걷는 듯 비장했다.
* * *
한편…….
남궁진휘와 진화가 의선문을 찾았다.
그들의 뒤로는 남궁구와 호명기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단승호가 깨어난 것은 좋은 소식이구나.”
“단승호가 깨어나든 아니든, 제갈용성은 잡혔을 겁니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실제로 단승호가 깨어나지 않았더라도, 황보정의 증언과 해약을 이용해 단천문주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아니, 이 형은 네게 잘된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하긴, 경증부터 중증에, 제갈후현까지 한다면 죽기 직전 초주검 상태의 견본을 얻었으니, 의선문의 연구도 그만큼 빨라지겠지요?”
견본.
제갈후현이 죽기 직전이긴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아니, 그보다 남궁교명은 네 친우가 아니었……나?
“진혜도 그렇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하하하, 형님도 참. 제 목숨이 당장 위태로운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남궁만 괜찮으면 다 괜찮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러한 것이지.”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은 다른 세 사람이었지만, 진화의 머릿속에 그들은 아예 들어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남궁만 좋으면 다 좋다.’ 하며 말갛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남궁진휘는 그 얼굴에다 대고 뭔가를 지적할 수 없었다.
호현기가 그런 남궁진휘를 보며 혀를 찼다.
“쯧. 저 집구석은 다 글러 먹었어. 정상인인 척해 봐야, 정상인 같은 팔불출일 뿐이야.”
“저 집구석이 우리 집구석 아닙니까?”
“진혜는 적호단주한테 갔다. 진화 건드린 자식이 누구냐고, 같이 잡으러 다니자고.”
“……생각해 보니, 같은 세가에 있더라도 각 가정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깔끔하게 선을 긋는 남궁구의 말에 호현기가 웃고 말았다.
“적호단주가 그 마녀를 받아들였습니까, 순순히?”
“연무장이 날아가면서, 무학제가 이틀 미뤄졌으니까. 금의생은 제갈후현을 제외하고 상위 세 사람 모두에게 선택권을 주었지. 그것 때문에 적호단주가 거절도 못 하고 받아들였어.”
“하하하! 그러면 소가주님과 선배님은 어찌하시기로 했습니까?”
“소가주께서 군사부에서 이 년 계시다가, 진화의 첫 휴식년에 같이 내려가시겠다는군. 덕분에 나도 적호단 발령일 것 같다. 본래 남궁세가는 청룡단에 가는데…… 야, 웃지 마라. 넌 뭐 다를 거 같냐?”
“……아.”
남궁구가 진화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예상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남궁구가 며칠 전 진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황보정이 맡은 냄새. 증언. 그걸 보면 제갈용성이 단승호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남궁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진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갈후현에겐 동기가 충분하고, 단승호는 충분히 만만하니까.”
“그게 무슨 이유야?”
“제갈후현을 그렇게 만들기 전에, 만만한 단승호에게 시험을 한 거라는 말이다.”
“뭐? 와!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던 단승호를?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다고?”
남궁구가 학을 떼며 놀랐다.
하지만 진화는 그렇게 놀라는 남궁구가 신기했다.
이전 생엔 그보다 더한 짓도 흔했다.
귀천성이 만든 독약 실험지도 있었고, 소위 정도 문파라는 곳에선 꾸준히 무사들을 수급받으려고 어린아이를 사고파는 일도 했었다.
앞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남궁구도 보게 될 일들이었다.
“이미 제갈소현도 죽인 놈들인데, 그게 놀라워?”
“아, 하긴.”
진화의 말에 남궁구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제갈용성을 그냥 둘 거야?”
“응.”
“뭐?”
진화의 대답에 남궁구가 놀라고, 진화는 그런 남궁구가 더 이상하다는 듯 보았다.
“그놈을 그냥 둔다고?”
“제갈후현이 쓰러졌어. 그만한 폭주를 겪었으니 회복 가능성도 낮겠지. 그러면 아들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
“제갈용성이 소가주가 될 거라는 말이야?”
“안 들키면 소가주를 하려 할 것이고, 들켰다면…… 소가주를 시키려고 하겠지.”
진화의 말에 남궁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가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나오느냐가 관건인데…… 우리가 ‘뭔가’ 알고 있다는 분위기만 풍겨도 제갈가주가 역천비록을 포기할 테니, 어느 쪽이든 우리에겐 잘된 일이지. 게다가 살아 있는 제갈용성은 제갈세가에 계속해서 분란을 만들 테니까.”
진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가주님이랑 지부장님은 뭐라셔?”
“좋은 생각이래!”
진화가 꽃같이 활짝 웃는 것을, 남궁구가 질린 얼굴로 보았다.
그때의 대화를 떠올린 남궁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집구석, 완전히 글러 먹었어요. 그런데 그게 싫지는 않습니다.”
“그게 우리의 문제지.”
남궁구의 말에 호현기가 웃으면서 답했다.
남궁세가는 오늘 지루한 경쟁에서 확실하게 승기를 잡았다.
제갈세가가 그걸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이제 다시는 제갈세가가 남궁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