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보물을 노리는 이들(2)
제갈세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적호단은 제갈용성에게 자진 출두를 요청했다.
제갈세가에서는 세가 내에서 근신하며 조사받기를 원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문은 하겠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을 거다.”
“하하! 지금 절 걱정하시는 겁니까?”
제갈가주의 말에 제갈용성이 이죽거리듯 물었다.
그러자 제갈가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 널 걱정해서 이러는 것으로 보이느냐?”
“아, 그렇죠. 제가 뭐가 걱정되시겠습니까. 하나뿐인 장남 걱정만으로 가득하시겠죠. 아닌가? 하긴, 이제 가망성이 없는 장남보다는 이 집안의 체면을 걱정하시는 거였던가요?”
“제갈용성!”
계속된 이죽거림에 제갈가주가 낮고 단호하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걸 기다렸다는 듯, 제갈용성이 소리를 높였다.
“제갈! 제갈! 가주님은 그게 제일 중요하시죠!”
“…….”
제갈가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갈용성이 히죽 웃었다.
“제갈무진은 그저 만든 것을 보여 주기만 했습니다. 그걸 이용하자는 건, 전적으로 형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약을 복용한 것도, 약을 융통해서 세를 모으자고 한 것도.”
제갈용성은 제갈가주의 얼굴을 보며 그가 충격받거나 괴로워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제갈가주는 전혀 충격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냉정하고 담담하게 제갈용성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넌 그날로 죽을 거다.”
죽으려 용쓰는 사람처럼 굴긴 했으나, 설마 아버지에게 그 말을 직접 들은 줄은 몰랐던 듯.
덤덤하게 떨어지는 말에 제갈용성의 눈이 커졌다.
“……어, 어차피 지금도 죽은 목숨 아닙니까?”
제갈용성이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유 있는 척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갈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천성과 공모해서 정파 무림을 혼돈에 빠뜨리고 형제까지 죽이려 한 패륜아.”
“……!”
“너는 그리 죽어도 상관없지만, 가문은 아니다. 그러니 당분간 소가주 자리에 올라라.”
“소……가주 자리라고요?”
제갈용성은 뭔가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소가주라고?’
제갈용성조차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갈가주가 말하는 소가주는 제갈용성의 생각과 달랐다.
“당분간 형을 대신해서 소가주 자리에 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지면 될 일이다. 연학원에 처박히든, 어디 암자에 들어가든 목숨만은 붙여 주마.”
“아…….”
제가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일까.
차라리 자결하라 할 것이지.
제갈가주는 자신에게 끝까지 제갈후현의 대용품 노릇을 하다가 사라지라 말하고 있었다.
제갈용성의 속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그 약에 해독약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그러니 모든 것은 제갈무진의 계략이었다고 말해라. 제갈무진에게 당해서 계속해서 약을 복용했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리하면 넌 괜찮을 거다.”
제갈용성을 생각해 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제갈용성의 눈빛은 까맣게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집안이 괜찮은 거겠죠. 누워 있는 형님은 제갈무진에게 당한 것이고, 나는 형을 위해 지금껏 온갖 심부름을 한 호구 새끼가 되는 건가? 큭큭큭!”
“그래서 부족하냐? 지금 당장 목을 매어 주랴.”
제갈가주는 다시 이죽거리는 제갈용성을 다그치듯 말했다.
하지만 제갈가주의 매정한 말에 오히려 제갈용성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기대를 버리고 현실을 보자.
어쨌든 제 앞에 떨어진 것은 소가주 자리였다.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제갈용성에게도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요.”
제갈용성이 순순히 답했다.
저들이 가진 증거라고는 단승호를 만났다는 사실과 거래 내역 같은 것뿐이라니, 제갈가주의 말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허수아비라지만, 어쨌든 소가주라면…… 가주 다음이 아니던가.
‘죽는 것보단 나은, 아니 횡재를 한 건가? 종년의 아들이 귀하디귀한 아들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우리 잘난 본부인의 얼굴이 또 어떨지 기대되는군. 큭큭큭큭큭!’
그래, 이렇게 된 거 제갈후현의 것을 모조리 차지하는 것이다.
제갈후현이 깨어난다 해도, 뭘 어쩌겠는가.
분노와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꼴을 구경하면 꽤 즐거울 것이다.
게다가 가주 다음이라면…… 가주가 없다면, 제가 가주가 되는 것이라.
이렇게 된 이상 살아남아 주마!
제갈의 모든 것을 짓밟아 주마!
“하하. ……하하하하!”
제갈가주가 나가고, 제갈용성은 한참 즐거운 듯 웃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제갈가주가 참담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제갈가주의 눈빛엔 결연한 각오만 가득했다.
“모든 것은 가문을 위해서다!”
* * *
적호단주 팽치가 남궁세가 장원을 찾았다.
대뜸 술을 찾는 팽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내 참, 더러워서! 제갈후현과 제갈용성이 약을 융통한 것은 확실하니 징계야 받겠지만, 그냥 한 놈은 호구고, 다른 놈은 착한 호구랍니다!”
“제갈후현이 협박당하고, 제갈용성을 그걸 도운 거래?”
남궁조도 대충 예상했는지, 씁쓸하게 웃으며 술을 따랐다.
“젠장. 미리 질문지 보내고,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는 게 무슨 조사라고! 그놈이라고요, 그놈! 분명히 감이 쎄—한 게, 딱 그놈인데! 대가리 박아 놓고 작정하고 조지면 나올 텐데 말입니다!”
“그놈의 감! 전에 대천상단인가? 상단주 놈이 느낌이 쎄-하다고 잡았다가, 결국 아니어서 멀쩡한 사람 잡을 뻔했잖아.”
“아니, 그거야…… 그 상단주 놈이, 놈이 아니라 년일 줄 누가 알았습니까? 산도적같이 생긴 아줌마 같으니라고! 하여튼 뭔가 숨기고 있는 놈들은 느낌이 쎄-하다고요.”
적호단주 최악의 실수였다.
심지어 대천상단주는 처녀의 몸으로 상단을 이끄는 것이 위험할까 남장을 했던 경우였었다.
하지만 결국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데에서는, 팽치의 감이 옳았다.
“그럼…… 장문상단은 어떤가?”
“네?”
“제갈후현과 제갈용성은 더 조사할 수 없다며. 걔들이 처음에 뭐가 있어서 유통을 하겠나. 장문 서씨를 통했겠지.”
“장문 서씨라…… 거기 본부인은 안 나섰을까요?”
“왜? 감이 움직여?”
“……아뇨. 구린 냄새는 나는데, 쎄-하진 않네요.”
“거참. 대단한 감이로군.”
남궁조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로 제갈세가 본부인은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선 무관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본부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남궁조도, 그녀가 가내에서조차 가모라고 불리기보다는 서씨 부인으로 불린다는 걸 안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첩을 질투해서 칠일 밤낮으로 때려죽이고, 그 아들이 그걸 보았다라…… 헛똑똑이 제갈성질아, 그 아들 속에 쌓인 한은 보이지 않았더냐?’
제갈가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제 아들들 성품이야 알 것이다.
하지만 진화와 남궁구의 말을 들어 보면, 제갈후현이나 제갈용성은 상상 그 이상인 듯했다.
‘특히 제갈용성. 여태 어미가 좋아하던 향을 주문하고 피우는 것을 보면, 그 한이 제갈세가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터.’
예나 지금이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관계라…….
그래도 어제 머리를 쥐어뜯고 싸워도, 다음 날엔 등을 맡기고 귀천성과 전쟁에 임했던 동료였다.
그렇게 보내온 세월이 수십 년이었다.
제갈세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며, 남궁조 또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안되었군. 그리 발버둥을 쳤는데……. 하나 남궁을 겨눈 순간부터, 내가 네놈을 도울 수 없게 되었음이니.’
말할 수 없는 유감을 털어 버리듯 술잔을 들이켰다.
남궁조는 직접 나서서 증좌를 뒤지지 않은 것만으로, 그가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모두 했다 생각했다.
장문상단에 대해 말을 남겼으니, 적호단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서서히 제갈용성의 목을 죄어 들어갈 것이었다.
“참. 댁의 소공자도 참, 느낌이 쎄-하다 했는데.”
“……!”
갑작스러운 적호단주 팽치의 말에 남궁조가 술잔을 채우다 말고 멈칫했다.
‘저 감은 귀천성에게만 적용되는데, 대체 뭘 눈치챈 거지?’
남궁조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적호단주가 뭔가 눈치를 챈 거라면, 어찌해야 할지…… 일단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저 맹호 같은 놈을 잠재우려면 말술을 먹이고 그 장독으로 머리를 치는 수밖에 없으리라.
남궁조가 굳게 마음을 먹고 적호단주를 보았다.
“검이…… 푸르게 빛나더군요.”
“음?”
남궁조의 몸에 긴장감이 풀렸다.
난 또 뭐라고.
“절정을 넘었으니, 검기가 제법이지.”
“검강이더군요.”
“망할.”
제대로 봐 놓고 떠본 것이었나.
“자네, 우리 집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았군.”
남궁조가 적호단주를 노려보았다.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적호단주는 술을 마시는 척, 한 손은 술잔을 잡고 다른 손은 도를 찾았다.
“방법이 없군. 유감이네만…… 장가오게.”
“푸웃-!”
남궁조의 말에 적호단주가 술을 뿜었다.
“장가와!”
“차라리 말술을 먹이고, 머리를 장독으로 깨 주십시오!”
뭐가 이렇게 구체적인지.
적호단주는 역시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뭐든! 그 실력을 무학관에서 썩혀선 안 됩니다!”
“튀면 위험해지지. 아이의 부모가 바라는 건 아이의 안전뿐이야.”
남궁조 또한 진화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속으로 ‘녀석이 몇 살에 경지를 넘었는지 알면, 네놈도 기절할걸.’ 따위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진화가 위험해질 이유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아까운데!”
“진짜로 장가오고 싶지 않으면, 그 아이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게.”
남궁조의 말에도 적호단주는 ‘아까운데!’를 반복했다.
하지만 저절로 소문이 나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진화의 경지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물론 다음 날 해장탕을 마시고 술을 깰 때까진 말이다.
* * *
사실, 적호단주가 남궁세가 장원을 찾은 것은 진화 때문이었다.
제갈무진을 직접 상대해 본 적 있는 진화의 증언을 들으러 오는 김에, 술을 먼저 마신 거랄까.
하지만 진화의 진술을 듣는 순간.
적호단주는 해장탕을 먹고도 멍하던 머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그자의 무공에는 단계가 있는 듯했습니다. 햇빛 속에 눈을 속이고, 다음에는 회오리를 만들어 파괴력을 올렸지요. 그다음이, 그 철사와 교성흑오대를 이용한 환술. 그 자체로 진법이 되고, 기관진식이 되게끔 한 듯했습니다.”
진화가 당했던 것도 세 번째 단계였다.
머릿속에 강박적으로 울리던 진화 자신의 욕망.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뒤틀리던 시야와 교성흑오대원을 제갈무진으로 착각했던 것.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는 진화였다.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면 당하지 않았을 환술이거늘. 혼돈지체를 하고도 환술에 당해? 내가 방심을 한 것이 아니라 멍청해진 것이지!’
진화가 말소리를 뱉지 못하고 겨우 입으로만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에 적호단주는 더 기가 찼다.
‘저 오물거리는 애송이가, 현홍사의 움직임을 파악했다고?’
“그, 그걸 전부 어찌 아는 것이냐? 네 눈에는 보인 것이냐?”
결국 치미는 궁금증을 삼키지 못하고 따져 묻고 말았다.
본래 무공에 관해서는 본인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모든 이해와 깨달음은 불문(不問)이 아니던가.
실례라면 실례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진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본다는 것은 몹시 제한적입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본디 눈동자의 움직임보다 빠른 건 인지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늘 보는 것 또한 인식하지 않습니다. 눈의 핏줄은 항상 있지만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을 보니까요. 심지어 시야의 폭도 제한적이지요. 환술의 기본은 거기서부터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뇌가 만들어 낸 생략과 상상. 하지만 사유(思惟)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진화가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간단치는 않았다.
“그럼 가 봐도 됩니까?”
진화는 오늘부터 빡 세게 수련을 하기로 했다.
다시는 그딴 환술에 속지 않기 위해.
진화의 결연한 눈빛에, 적호단주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진화가 나간 후에도, 적호단주 팽치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
모두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아이…….”
“천재지? 흐흐흐!”
“팔불출 말고요!”
적호단주가 이 기막힌 순간에도 농담을 하는 남궁조에게 버럭 성질을 냈다.
“저 아이! 저러고도 튀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말간 얼굴로 하는 말이 실로 놀랍지 않은가.
조금만 더 충격이 있었다면, 적호단주는 심상에 들 뻔했다.
“낭중지추라고 했습니다. 본인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언행 하나하나,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아챌 것입니다.”
“뭐, 그렇겠지.”
남궁조의 말에, 적호단주는 울컥 성질이 돋았다.
“안전하길 바란다면서요! 대책을 세워야지요!”
적호단주가 버럭 했다.
아무리 검만 아는 바보로 불린다지만, 그런 제가 보기에도 남궁의 소공자는 특별했다.
그래, 저건 보물이었다.
남궁의 보물이 아니라 온 무림의 보물.
지금부터 천천히 성장해도, 천하십이좌를 노려봄 직한 유망주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 남궁조보다 적호단주가 더 안달이 났다.
하지만 남궁조는 여전히 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저런 얼굴인데, 너무 안 튀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벌써 저자에는 초상화가 나돈다네. 소찬회라나 뭐라나. 눈들은 있어 가지고.”
“무, 뭐가 돌아요?”
“애초에 안전할 수가 없는 얼굴이지 않나. 흐흐흐.”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괜찮아. 우리 애가 보면 볼수록 성격이 안전치가 못해서.”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야.”
‘저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인지…….’
진화가 나간 자리를 보던 남궁조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대화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적호단주는, 도를 빼 들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