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보물을 노리는 이들(3)
삐—이, 삐—이.
산새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아침을 깨웠다.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몹시 정답고, 마을 사이로 흐르는 개울의 물소리는 평화롭기만 했다.
“좋은 아침.”
“밥 먹었어?”
위험한 세상을 피해서 깊고 깊은 산속에 들어온 사람들.
초라한 옷과 돌을 쌓아서 올린 집.
풀을 뽑고 땅을 깨어 돌을 걸러 내고서야 겨우 만든 작은 밭.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평화롭고 소박한 풍경은 고단하고 배고픈 생활이 된다.
옷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려 줄 용도일 뿐이고, 집은 비만 겨우 피할까.
밭에서 나온 작물이나 숲을 뒤져 따 온 열매, 버섯 같은 걸로는 배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순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군대에 짓밟혀 유리걸식하던 것에 비하며,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니던가.
“아이고, 산주님, 나오셨습니까?”
“허허, 간밤에 평안했는가?”
“저희야 늘 덕분에 평안하지요. 토란을 조금 캐 온다고 하니, 아침에 올리겠습니다.”
“허허, 감사하네.”
“별말씀을요. 이리 사는 것이 다 산주님 덕분인데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중년의 학사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노인은 바구니를 짊어지고 부지런히 밭으로 향했다.
중년의 학사, 제갈무진이 마을의 광경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풍진 세상을 벗어난 듯, 마치 신선이 다스리는 마을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우거진 녹음에 산새가 지저귀고, 그 속에서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광경이라.
“참으로 사랑스러운 광경이 아니더냐.”
“주군.”
“내가 이 마을을 만든 것은, 넓디넓은 중원 천하에 단 한 곳만이라도 이렇게 인간답게 사는 곳이 있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제갈무진이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마을을 보았다.
“거짓된 부귀영화로 죄악을 선동하고, 위선을 정의로 속여 약자들을 억압하는 놈들 모두 세상이 만들어 낸 불순물일 뿐이야. 본디 세상은 저러한 것을. 자연스럽게…… 이 말이야말로 틀렸다. 억지로 자연스럽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낸 세상이 자연과 동떨어져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니까.”
제갈무진의 시선이, 그의 곁을 지키는 흑의 사내를 향했다.
“어린 시절, 천제께서 내게 보여 주신 마을은 그야말로 꿈의 세상이었다.”
“주군께서 저희에게 보여 주신 세상도 그러했습니다.”
제갈무진의 말에, 흑의 사내가 그리 답했다.
마을을 보는 사내의 눈에도 그리움과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제께서 깨어나시면, 이번에야말로 온 천하를 저렇게 만들 것이다.”
제갈무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의 희생은 저것을 위해서다.”
“주군께서 살려 주신 목숨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몽현(夢峴)을 지키기 위해,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제갈세가에 뿌려 놓은 씨앗이 있다. 그를 이용하면, 역천비록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갈무진의 말에 흑의 사내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내에게 제갈무진이 쪽지 하나를 건넸다.
“역천비록. 반드시 남은 역천비록을 가져와야 한다.”
“충!”
제갈무진에게 답한 흑의 사내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제갈무진은 다시 밖의 광경에 눈을 돌렸다.
“역천(逆天).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하늘을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지. 바라는 것은 저런 소박한 삶, 하나뿐인데 말이야.”
멀리서 제갈무진을 발견한 노부부가 그를 향해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손을 잡은 손자가 제갈무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하고 해맑은 모습에 제갈무진 또한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여러 불미스러운 일로 조금 미뤄졌던 정의무학제가 재개되었다.
쉐에에엑-!
번쩍이는 쾌검이 비처럼 쏟아지는 장침의 공격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녹수룡 당혜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은하섬검 모용혁이, 검집을 들어 당혜평의 복부를 때렸다.
퍼-억!
“장외요-!”
“모용혁 승!”
“우아아아아아-----!”
황금세대라 일컬어지던 금의생들의 무학제가 흐지부지 끝나는 바람에 김은 좀 샜지만, 사람들은 모용혁의 승리에 아낌없이 환호했다.
볼거리가 줄어든 가운데, 모용혁이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면서 무학제에 대한 관심을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다음 대 관도회주에 은하섬검 모용혁이 오르면서 은의제가 끝이 났다.
준우승을 한 녹수룡 당혜평이 다음 금의장이 되겠지만,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모용혁도 아닌 당혜평에게 지면서 금의부장이 된 제갈용성에겐 당연히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제갈용성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고작, 제갈세가의 비극을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젠장!”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세가로 돌아가는 길.
사실 세가로 돌아간다고 한들, 세가의 사람들 또한 제갈용성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둘째 공자님을 뵙습니다.”
“다시.”
“예, 예?”
“인사 다시 하라고!”
“아, 두, 둘째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게 아니잖아! 소가주에게 똑바로 인사하란 말이다! 날 무시하는 거냐!”
제갈용성이 처소 앞에서 마주친 하녀에게 역정을 내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꺼져! 이제는 계집종까지 예를 모르니! 하하, 가문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긴 했네!”
제갈용성이 큰 소리로 화를 냈다.
하지만 하녀는 이미 도망가듯 그의 처소 앞을 떠났고, 제갈용성의 처소에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임시로 소가주 위에 올랐지만 소가주전으로 처소를 옮긴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그를 소가주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마치 제갈세가의 소가주는 제갈후현밖에 없다는 듯, 처소의 총관이나 하인들 또한 매번 소가주라 부르라는 제갈용성을 피해 다닐 지경이었다.
“망할! 이제는 집안의 종들까지 나를 무시해? 하!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거칠게 처소로 들어온 제갈용성은 씩씩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내가 가주 위에 오르면 지금 있는 것들은 죄다 매질해서 쫓아 버릴…… 응?”
그래도 이성은 있는지 작게 구시렁거리던 제갈용성은, 탁자 위에 뭔가를 발견했다.
검은 쪽지, 영(影).
“이, 이…… 비영문의 연락이 왜?”
제갈용성의 눈이 흔들렸다.
제갈용성은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도 주변 눈치를 보며 쪽지를 꺼내 들었다.
월영루, 내일, 술시.
“허! 이 새끼들이 아직 있었다고?”
제갈용성의 복잡한 눈빛 속에 기대감이 번졌다.
* * *
그림자로부터 전음이 들렸다.
-접촉했다고 합니다.
제갈가주가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제갈가주의 얼굴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병신 같은 놈, 기어이!”
“가주님.”
늙은 총관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제갈가주를 보았다.
제갈가주의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갈가주의 심경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제갈가주가 하려는 결정도 눈치챘다.
총관은 제갈가주를 만류하려는 듯 입을 뗐다.
그야말로 가문 내에서 제갈가주를 만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 그조차도 제갈가주가 허락할 때만 가능했다.
이번엔 제갈가주의 결심이 단호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공자님은…….”
“어미를 그리 잃었다면 좀 더 독기를 품고 절치부심했었어야지!”
제갈용성의 어미와는 둘이 눈이 맞거나 애틋한 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술에 취했고, 욕정이 올랐고, 마침 여종이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제가 없는 사이 그녀가 그리 비참하게 죽은 것은 유감이나, 제갈용성을 정식 직계에 올리려는 욕심을 부린 바람에 서상아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녀가 죽고 서상아에 대한 징계로, 가모로서의 권한을 회수했고 제갈용성을 족보에 올렸다.
일개 첩의 죽음에 충분한 벌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제갈용성 스스로 아직 첩의 자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다.
“정 아니 되겠다면, 서상아를 죽이고 잘못을 비는 게 나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후현이 개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잡은 것뿐이야! 잡아서는 안 될 기회를 잡아서!”
제갈용성에게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갈가주가 제갈용성을 버리는 이유였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가문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 것은 변하지 않지!”
귀천성에 이용당하는 것과 귀천성임을 알고 함께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내가 자식 농사에 실패했음이야.”
“자식의 속은 부모도 어찌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가주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제갈가주의 자책에 총관이 위로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만 그의 말 중 하나는 맞았다.
제갈가주는 자식들의 감정까지 헤아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세 명의 자식을 잃은 것이라.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지만, 어쩌랴.
실패한 자식들에 계속 연연하고 있을 수 없었다.
“다시 세워야지. 무너진 것은 더 탄탄하게 쌓아야겠지.”
제갈가주의 기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지현이에게 후계 수업을 시작해. 단, 괜한 욕심 가지지 않도록, 임시라는 걸 알려 둬.”
“존명.”
제갈가주의 눈빛이 겨울에 얼어붙은 흑룡강 얼음처럼 차갑게 굳은 것을 보며, 총관은 안타까움을 삼켰다.
* * *
제갈용성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진 건, 제갈가주만이 아니었다.
“제갈용성에게 접근했대!”
남궁구의 말에 진화의 눈이 번뜩였다.
“예상보다 빠르군.”
“그만큼 급했다는 거겠지.”
곧 있을 정의무학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진화와 달리, 사람들의 시선에서 조금 자유로운 남궁구는 바쁘게 남궁세가 장원과 숙청관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제갈세가는 결국 역천비록을 내놓게 될 거야. 모두 아는 것을, 놈들이 모를 리 없지.”
“연학원에서 나오는 때를 노릴까?”
“주인도 풀지 못한 기관진식을 뚫는 것보단, 역천비록이 밖으로 나왔을 때를 노리겠지. 제갈용성에게 접근한 것도, 바로 그때를 노리기 위한 거고.”
“안 그래도 남궁조 지부장님이나 소가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적호단은 물론이고 창궁무애단도 완전 대기 중이야.”
“이번에도 적호단과 함께 움직이나?”
“아-니.”
남궁구의 대답에 진화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자 남궁구가 씨익 웃었다.
“제갈용성은 미끼로 던지고 우린 진짜 역천비록을 움직여야지. 요즘 완전 아찔해! 재밌어!”
“……너 그렇게 미친 거 막 티 내고 다녀도 돼?”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남궁구를 보며 진화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직 안 미쳤어!”
남궁구가 크게 반발했다.
아직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진화는 지적해 주기도 귀찮은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건 진휘 형님 생각이야?”
“아-니, 큭큭! 들으면 완전 놀랄걸.”
“누군데?”
남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라 당연히 진휘 형님의 생각인 줄 알았는데.
진화가 궁금한 듯 답을 재촉했다.
“누군데 그래?”
“제갈가주.”
“뭐?”
이번엔 정말 놀라서 되물었다.
“제갈가주가 제갈무진 그놈들이 접근해 왔다고 자진 납세를 했어. 그리고 제갈용성이 그놈들이랑 접촉하기로 했고. 흐흐흐, 죽이지?”
“어. 죽이네.”
남궁구는 제갈가주의 협조가 놀랍다는 듯 키득거렸지만, 진화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제갈가주가 제갈용성을 던진 건가?”
“뭐?”
남궁구가 놀라 되물었지만, 진화는 말을 하면서 더 확신을 얻었다.
“제갈가주가 제갈용성을 미끼로 던진 거라고.”
“제갈용성을? 소가주인데?”
“임시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와, 뭐 그런! 말이 돼? 그래도 소가주인데?”
남궁구는 놀라다 못해 경악한 얼굴로 선뜻 믿지 못했다.
하지만 진화에겐 놀랄 것도 없었다.
이전 생에서 제갈용성은 제갈후현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했지만, 지금 제갈용성을 보면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자살을 당한 것이라.
진화는 제갈가주가 모든 것을 알았다고 확신했다.
“넌 앞으로 제갈지현을 감시해.”
“제갈지현?”
“후계 교육을 받기 시작할 거야. 만약 그렇다면 확실해지겠지.”
제갈지현이 소가주가 된다면……?
진화가 아는, 남궁을 벼랑으로 몰던 그때의 제갈세가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지. 제갈후현이 살아 있으니까.’
진화는 의선이 결국 해약을 만들어 낼 것을 알았다.
제갈후현이 깨어나면, 제갈용성이 저를 그리 만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게 되겠지, 제 자리에 제갈지현이 있는 걸.
“제갈후현이 깨어나면 볼만해지겠네.”
진화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에 남궁구가 살짝 질린 듯 진화를 보았다.
“……너야말로 그렇게 못된 거 티 내고 다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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