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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86)화 (86/425)

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보물을 노리는 이들(5)

역천비록을 옮기는 날이 되었다.

연학원 안에서 역천비록을 장궤에 담고 봉한 뒤, 상현대 무사 두 명이 가지고 나왔다.

연학원 바로 앞에서 제갈용성을 비롯한 상현대와 적호단이 기다리고 있다 마차에 실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과정 하나하나 기묘할 정도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제까지 그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귀천성의 비보였다.

비록 적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강한 것을 숭상하는 무림인들이기에, 귀천성 고수들의 강한 무위를 아는 이들은 그들의 비보에도 묘한 경외감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었다.

“너 이 새끼, 쓸데없는 짓만 해 봐. 대가리를 깨 놓을 거니까.”

“하아.”

입단하자마자 적호단 조장 자리를 꿰찬 남궁진혜가 제갈용성의 귓가에 협박하듯 으르렁거리고 지나갔다.

그녀는 제갈세가에 왔을 때부터 제갈용성을 향해 눈만 마주치면 두 손가락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지나칠 때마다 심심찮게 악담을 날리고 있었으니.

“이쯤 되니 조장이 누굴 잡으러 왔는지 헷갈릴 지경이군.”

“우리, 역천비록인가 저거 지키러 온 거 아니야?”

“…….”

무단에서 소속 무인들을 뽑을 땐 그 임무와 역할에 맞게 선발하지만, 대부분 단주의 성향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무단의 분위기가 단주에 의해 좌우되고, 함께 생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적응해 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호단 단주는 아까부터 궤짝을 한 번씩 발로 툭툭 차고 가는 정의맹의 맹호 팽치이고, 선두 조의 조장은 제갈세가에서 제갈 소가주를 협박하는 남궁의 광견화 남궁진혜였으니.

적호단원들의 대화를 원치 않아도 들어야 했던 제갈세가 무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준비 끝! 출발한다-!”

“좋아, 출발! 귀천성 새끼들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하면 소리부터 질러!”

“예이!”

팽치의 고성과 함께, 벌써 투기 만발한 남궁진혜의 선두조가 일행을 이끌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무슨 공을 세우라는 건지.

제갈용성은 팽치의 고성을 들으면서 힘없이 제갈상현대에 신호를 보냈다.

‘뭐 저 연놈들이 나서는 게 꼭 나쁘진 않지.’

역천비록을 옮기는 데엔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장궤를 실은 마차를 이끌고 제갈세가를 나갔다.

* * *

역천비록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금쯤 움직이겠구나.”

한가롭게 바둑알을 놓는 제갈무진의 옆으로 하얀 섬섬옥수가 찻잔을 채웠다.

“정의맹에 심어 둔 자에 따르면, 역시나 적호단과 백매단이 따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하얀 얼굴에 그린 듯 까맣고 가지런한 눈썹, 가는 눈과 베일 듯한 콧날 그리고 산이 선명한 입술까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릴 만큼 선이 고운, 젊은 사내였다.

사내의 말에 제갈무진이 바둑알을 놓았다.

흑돌이 백돌을 감싼 뒤에 길목을 막았다.

“비영문주가 상대의 전략을 제대로 간파했구나. 하긴, 그치도 제갈가주를 맞상대한 것이 두 번째지.”

“첫 번째에 비영문이 사실상 멸문되다시피 했으니, 오랫동안 이를 갈았을 겁니다. 어쩌면 제갈용성을…….”

“그리하겠지. 하지만 제갈가주도 원하는 것을 얻을 게다.”

탁.

백돌이 기수를 틀었다.

갑자기 백돌의 좌상귀가 살아났다.

곁에 있던 사내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제갈가주가 유인책을 꿰뚫어 볼 것을 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의맹에 잃어버린 입지를 회복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방법. 제갈가주가 좋아하는 전략이지.”

“……제갈가주가 남궁세가의 타격을 원한다고요?”

“둘 다. 비영문주가 노린 것은 비영문 자체가 제갈가주에게 주는 충격이겠지만, 글쎄. 제갈가주 입장에선 비영문이 죽어도, 남궁세가가 실패해도 상관없을 테니까.”

“제갈가주가 역천비록을 빼앗길 수도 있는 모험을 하리라 생각하십니까?”

“허허허허! 그치는 그러고도 남지. 가문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자다.”

제갈무진이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흑돌을 놓았다.

흑돌이 순식간에 백돌의 길을 잘라먹었다.

더 이상은 백돌이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제물에 관한 비록이다.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비영문주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겠습니다.”

“아니, 너는 해례본이 어디 있는지 찾아라. 비록은 언제 찾아도 상관없지만, 녀석들이 비록을 해석하는 건 다른 문제니. 해례본은 이미 머릿속에 있으니, 후대를 위해 남겨 두면 좋으나 유사시엔 없애도 좋다.”

“존명.”

제갈무진의 명을 받은 사내가 밖으로 나가고, 제갈무진이 다시 바둑판에 집중했다.

이미 얽히고설킨 흑돌과 백돌이 더 나아갈 수 없도록 맞닥뜨린 상황.

그때, 제갈무진의 눈에 죽은 줄 알았던 좌상귀가 들어왔다.

좌상귀의 한쪽에 자리가 보였다.

“가만…… 백돌을 둘 차례였던가.”

탁.

남은 자리에 백돌을 두자, 백돌의 집이 완성되었다.

* * *

붉게 졌던 노을이 거의 사라질 즈음.

장궤를 옮기던 제갈세가 무사들과 정의맹 적호단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이제 곧 태평로에 접어들 때였다.

민가와 저잣거리를 연결하는, 저잣거리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의선문으로 들어서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길의 이름이 태평로가 된 것은, 백성들이 태평을 찾아 의선문으로 올 때 이 길을 밟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길은 사람들의 바람이 아닌 비명이 가득 차게 되리라.

무사들이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의선문에 기다리고 있는 호위 병력의 지원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길의 초입에서 공격할 것이 뻔했다.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제갈용성과 함께 장궤를 실은 마차까지 모두 태평로에 들어서고.

쉐에에에엑---!

“적이다!”

적호단원의 외침과 함께, 일행의 뒤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몰려왔다.

챙. 챙. 챙. 챙--!

“으악!”

“뭐, 뭐야!”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무사들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검에 걸리는 족족 터진 그것이 무사들에게 상처를 냈다.

“현홍사다! 검기로 멀리 쳐 내라!”

이미 제갈무진을 통해 한번 겪어 보고 전쟁 기록을 통해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팽치가 당황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경험이 없는 무사들은 여전히 보이지도 않는 현홍사의 존재를 어려워했고, 경지가 낮은 이들은 마구 검을 휘두르다가 현홍사에 당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남궁진혜가 선두에서부터 마차를 뛰어넘어 달려왔다.

“니미! 검을 휘두르라고!”

쉐에에에엑----!

탕! 타앙!

남궁진혜의 푸른 검기가 안개 속을 유영하는 청룡처럼 어지럽고 유유하게 흘렀다.

안개 속에 거미줄처럼 숨어 있던 현홍사가 청룡의 횡포에 끊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흑면 흑의의 무사들이 검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쓰불! 니들은 일찍일찍 안 다닐래?”

남궁진혜가 사납게 웃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챙-! 챙-!

흑면 흑의의 공격자들과 정의맹 적호단, 제갈세가 상현대가 어지럽게 얽혔다.

그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푸른 검기라.

“하하! 니들 전에 내 동생 노렸던 그놈들이지?”

나무 위와 땅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적호단을 공격하는 흑면 흑의 무사들을 보며, 남궁진혜가 신이 난 듯 외쳤다.

“아니, 걔들은 벌써 내 동생 손에 타 죽었나? 다 깜장색깔이 같아서 내가 착각했네!”

쉐에에엑---!

퍼-펑! 쿵! 쿵!

남궁진혜가 펼치는 창궁무애검 일검낙안은, 수많은 변초 하나하나가 살기를 담고 흑면 흑의인들이 있는 나무를 쓰러뜨렸다.

쓰러지는 나무 위로 튀어 오른 흑의 흑면인들을 향해 신이 난 듯 적호대원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적호단주 팽치가 사납게 눈을 굴렸다.

‘교성흑오대가 아니라 비영문이로군. 그런데 함정이나 기습이 아니라 이렇게 정면으로 공격한다고? 고작 이만한 인원으로?’

적호단주 팽치가 수상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적호단주의 옆으로 두 사람이 돌진했다.

쉐에엑-!

챙! 퍼--억!

팽치는 옆구리를 노리던 단검을 막고, 가슴팍으로 들어오던 흑의인의 머리를 발로 차 버렸다.

한 세 바퀴쯤 굴러가는 이를 보던 팽치가, 단검을 쥔 손을 그대로 부쉈다.

우두둑.

“끄아아아악!”

“얼씨구, 비명까지 질러? 야, 너네 대가리는 어디 있냐? 왜 같이 안 왔어?”

“크윽…….”

두둑.

“크아악!”

적호단주 팽치가 나머지 손목도 부러뜨렸다.

그리고 흑면흑의인의 목을 쥐고 눈을 마주쳤다.

“자살대도 아니고, 왜 니들끼리 왔냐고. 비영문주는 어딨어?”

정의맹의 맹호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보며, 순간 움츠러드는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흑면 흑의인, 비영문도의 눈빛은 공포나 절망으로 죽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과 기대에 찬 눈빛으로 헐떡였다.

“흐흐. 컥. 큭.”

목이 잡혀서 어쩔 수 없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적호단주를 비웃었다.

그리고 적호단주가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슬쩍 풀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큭. 크크. 문주께서 왜 없을까, 왜 우리끼리 왔을까 생각해 보지그래? 네 대, 대가리로…… 큭! 컥!”

“새끼가 좀 놔주니까!”

적호단주가 비영문도의 목을 다시 움켜잡았다.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면전에서 비영문도에게 조롱을 받고 참을 생각까지 없었다.

“귀천성과 손을 잡아? 네놈들은 이제 진짜 끝이다. 영혼까지 찢어발겨 주마, 쓰레기들!”

“컥. 너, 너희…… 타……이야.”

“뭐라는……!”

살기를 번뜩이는 적호단주를 향해 비영문도가 유언처럼 말을 짜냈다.

하지만 귀천성도의 유언을 들어 줄 정도로 자비롭지 않은 적호단주의 손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데…….

순간, 적호단주의 옆으로 불길한 소리가 났다.

푸-욱!

적호단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전장에서 으레 나는 것이 살이 뚫리고 뼈가 끊어지는 소리라지만, 왜 이번 소리만 유독 불길했을까.

“큭!”

“이공자님!”

적호단주의 눈에, 제갈상현대 무사의 검에 베여 쓰러지는 비영문도의 뒤로, 배에 단검이 꽂힌 채 비틀거리는 제갈용성이 보였다.

“네놈들, 처음부터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뭐냐!”

“크큭. 무, 문주님은 진즉부터 진짜에 가 계셨다.”

당황한 적호단주의 표정에 목이 잡혀 있던 비영문도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하는 답을 들었는지, 적호단주의 표적이 싸악- 바뀌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컥!”

“난 또 뭐라고, 괜히 널 안 죽이고 기다렸네.”

적호단주의 손에 붉은 기운이 사납게 들썩이고, 잡혀 있던 비영문도의 가슴으로 혼원권이 작렬했다.

퍼---엉!

쿵!

배가 뚫린 시체가 장궤에 가서 부딪혔다.

“연기할 필요도 없어졌다. 전부 죽여라!”

적호단주의 고함과 함께, 적호단원들이 더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적호단주의 시야에 제갈상현대원들이 쓰러진 제갈용성을 들고 의선문을 향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밥맛 없는 새끼들. 퉷!”

전세가 유리해졌지만, 저렇게 빠져나간 인원만큼 이쪽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책임자인 그에게 말도 없이 제갈용성을 챙겨 나가는 제갈세가 무사들의 모습이, 적호단주 팽치의 눈에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적호단주가 제갈용성이 사라진 쪽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 갑자기 귓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 연기할 필요가 없는데요?”

“헉! 씨! 놀랐잖아!”

“왜 연기할 필요가 없는데요! 이 새끼들 눈치 깠대요?”

“비영문주는 그쪽으로 갔다나 봐. 미친 새끼들, 거기가 더 죽을 자리인 걸 모르고.”

“뭐요? 그걸 왜 지금 말해요!”

비영문의 결정을 비웃던 적호단주에게 남궁진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썩어 문드러질 새끼들이 또 우리 집 막둥이를 건드리려고! 저 그리로 가요!”

“야, 야!”

콧김을 뿜으며 남궁진혜는 벌써 달려가 버렸다.

벌써 두 번째 무단 이탈자였다.

“하여튼 귀한 집 새끼들은 제멋대로라니까! 너는 일 끝나고 보자!”

적호단주가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 * *

콰광광---쾅---!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지듯, 천뢰우전이 비워진 민가의 지붕 위를 때렸다.

“도둑놈들 주제에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군.”

진화가 부서진 지붕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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