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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87)화 (87/425)

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보물을 노리는 이들(6)

제갈세가와 바로 옆, 빈 민가.

지난번 제갈무진의 학살극에 파괴된 곳이었다.

진화는 창궁무애단과 함께 제갈세가를 나오자마자, 그들을 지켜보던 시선들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창궁무애단과 백매단이 제갈세가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진화의 도발에 부서진 지붕 위에는, 어느새 시체를 보고 모여든 까마귀 떼처럼 까맣게 흑의인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네가 그 남궁진화인가?”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라.

중요한 것은 그의 귀에 달랑거리는 비명문의 표식이었다.

그가 비영문주일 거라 확신한 진화가 환하게 웃었다.

“맞아. 근데 ‘그’ 남궁진화라고 하는 거 보니까, 물건을 흘리고 간 사람이 보낸 거 맞나 봐?”

파지지지직----!

진화의 검에 푸른 뇌전이 번뜩이고, 그 주변으로 백매단과 창궁무애단이 그들을 에워싸듯 넓게 퍼지고 있었다.

진화를 보던 중년 사내가 시선을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을 든 진화, 창궁무애단…… 그는 아마도 창궁무애단 뒤쪽에 있는, 백매단이 들고 있을 궤짝 따위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진화가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역천비록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갔어.”

“……!”

뭔가를 숨긴 듯 뭉쳐 있던 백매단이 날개를 펼치듯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비영문주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진화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었다.

쉐에에에엑---!

진화의 검기가 비영문주를 향해 날아갔다.

검기가 시야를 가린 동안, 순식간에 진화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채-앵!

“바보 같지 않아, 그렇게 이용만 당하는 거?”

흑수정처럼 말간 눈이 거울처럼 비영문주를 비췄다.

당혹감 그리고 불안감에 젖은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역천비록은 어딨지?”

“이렇게 된 마당에도 그게 궁금해?”

채-앵!

애초에 비영문은 첩보나 암살에 특화된 문파였다.

암살은 예나 지금이나 두려움의 대상이자 멸시의 대상이었다.

무림에서 암살은, 그들이 추구하는 강함과 거리가 먼 비겁한 술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귀천성과의 전쟁이 터지자, 정파 무림은 눈에 거슬리는 건 모조리 치워 버리겠다는 듯 비영문부터 압박했다.

“몰래 빼돌린 건가? 하긴 예전부터 네놈들 정파가 뒤통수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

“이상한 말을 하네.”

“정의맹에 일어나는 암살 태반이 내부의 배신이었건만, 귀천성의 의뢰를 받았다며 우릴 공적으로 몰지 않았더냐! 의뢰 사실을 없애려고!”

챙--!

퍼-억!

진화가 비영문주의 검을 쳐 내고, 그 틈으로 뛰어올라 무릎으로 그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쉐에에엑--!

“큿!”

간발의 차이로 비영문주가 진화의 검을 피했다.

“자꾸 이상한 소릴 하네. 니들은 처음부터 귀천성도였잖아.”

확신에 찬 진화의 말에, 괜한 소리로 진화를 흔들려고 했던 비영문주의 눈이 되레 흔들렸다.

“내가 알기로, 그런 수작질을 잘 부리는 곳은 딱 두 군데야. 지금 너희가 뒤통수를 치려던 곳과 이전에 너희 뒤통수를 쳤던 곳.”

귀천성과 제갈세가.

진화에게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절대 믿지 않을 곳들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제갈세가의 모함 어쩌고 하면서 진화를 흔드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좀 이상하지 않아? 기습을 미리 알고 있다면, 당연히 방어하는 쪽이 유리한 것이 상식인데. 제갈무진이 너희 무력을 너무 믿은 건가? 정의맹이 있는 복판에 너희들만 집어넣을 만큼?”

진화의 말에 오히려 비영문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희생양이지? 처음부터 이렇게 마구잡이로 쓰다가 버려질 거였잖아, 너희들.”

파지지직-.

쉐—엑!

진화가 덤덤한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천뢰기가 비영문주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크읏! 닥쳐! 너 따위가 뭘 안다고!”

타다다타닷-!

비영문주가 피가 흐르는 가슴을 붙잡고 암기를 던졌다.

파지지지직---!

파팟-!

“커억!”

암기는 진화에게 닿기도 전에 푸른 기운에 싸여 비영문주에게 도로 날아갔다.

상대의 암기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건, 암기에 실린 기운을 완전히 제압해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비영문주는 이제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 저의 기운을 제압한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진화를 보았다.

비영문주는, 지금에서야 소년의 눈동자에 푸른 번개가 번뜩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아, 내가 왜 그걸 몰라.”

파파팟---!

“크아아악!”

천뢰제왕검법 낙엽이, 비영문주의 몸에 박혀 있는 암기를 때렸다.

푸른 뇌전이 비영문주의 온몸을 찢을 듯 할퀴었다.

“비참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택했겠지.”

진화의 말에 비영문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거 되게 바보 같은 짓이야. 정말로 당신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당신이 비참해지길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파지직…….

진화의 눈동자 속에 커다란 번개가 내리쳤다.

쉐에에엑---!

“……!”

비영문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천뢰제왕검법 현천섬뢰(玄天殲雷)--!

번----쩍!

푸른 기운이 비영문주에게 쏘아지고, 번쩍이는 광채와 함께 검게 탄 핏줄을 드러낸 주검만이 남았다.

‘제갈무진. 공들여 키운 비영문까지 희생시키며 뭘 찾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숨기고 싶은 게 없어!’

진화의 시선이 멀리, 제갈세가 뒤편의 바위 절벽을 향했다.

사방에서 들리던 고함과 비명이 잦아들고, 비릿한 혈향이 공기 속에 퍼졌다.

* * *

그 시간…….

파파파파파팟---!

“젠장, 완전 미친놈! 못돼 처먹은 놈!”

탓- 타타타타탓!

“미친 듯이 뛰어. 걸리면 우린 죽은 목숨이니까.”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보자기 하나씩 가슴팍에 묶고서, 미친 사람처럼 지붕을 뛰어넘고 있었다.

“제갈가주도 미쳤지! 어떻게 그걸 대뜸 우리 가슴팍에 묶어 주지? 없어지면 순전히 우리 책임이라는 건가?”

“알면, 조용히 하고 뛰어!”

“아니, 그렇잖아. 어떻게 이걸, 우리 둘한테 들려서 보내냐고, 달랑 우리 둘만! 잡히면 우리만 죽는 거다, 이거야?”

“알면 뛰라고!”

본래 경공으론 남궁세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인 남궁구와 달리, 남궁교명은 정말 모든 기력을 다해 달리고 달려, 마침내 의선문 담을 뛰어넘었다.

챙- 챙챙챙----!

사방에서 시퍼런 검날이 날아오듯 남궁구와 남궁교명을 겨눴다.

“아니, 구! 교명!”

다행히 백소하가 먼저 그들을 알아보았다.

“역천비록, 배달 왔습니다.”

“헉. 헉. 미친……!”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가슴에 맨 역천비록을 풀 생각도 못 하고,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 * *

제갈세가와 남궁세가가 주도하고 정의맹이 보조한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예상대로 귀천성 쪽의 습격이 있었지만, 두 백의생의 가슴에 역천비록을 매다는, 절대 공식 석상에서는 밝히지도 못할, 그런 위험을 감수한 만큼이랄까.

제갈세가와 남궁세가, 정의맹의 희생자는 겨우 스물 남짓으로 경미했다.

죽은 목숨의 무게가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비영문도들의 죽음이 백을 넘어가는 걸 생각하면 대승이라 축하할 만도 했다.

갑자기 정의맹이 있는 곳 복판에서 배신자가 나온 불안한 상황 속에서 비영문이라는 무림 공적을 멸살하고 이룬 승리라.

정의맹에서는 이를 잘 포장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걸 주도한 사람은 총군사인 제갈가주였다.

그는 이번 대승으로, 제갈세가에서 배신자가 나온 악재를 어느 정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우는 데에 성공한 듯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단, 제갈용성이 큰 부상을 입고 실려 온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하아. 하아. 왜요?”

침상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던 제갈용성이 저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제갈가주를 보며 물었다.

왜, 왜 지금 나를 보고 있단 말인가?

“하아. 지금…… 벌……주려고요? 한번 줘…… 보시죠.”

“…….”

창백하다 못해서 파리하게 질린 얼굴.

제갈용성의 가쁜 숨소리마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비영문도의 단검이 하필 제갈용성의 폐를 찔렀다.

상현대원들에게 들려 온 제갈용성을 의선이 빠르게 치료했지만, 그건 치료가 아니라 잠시 연명해 둔 것뿐이었다.

“죄, 배신죄? 이제 사형이 떨어지는 건가? 하아, 하아. 자결을 명하지그래요?”

“…….”

“하아. 아니다. 당신은…… 내가…… 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겠지. 자결 대신…… 이렇게 죽이려고 한 건가? 하아. 내가 당신 아들을…… 그렇게 만들어서? 하……하.”

웃는 건지, 숨을 쉬려 한 건지.

어쨌든 제갈용성의 말이 제갈가주의 가슴을 찌른 것만은 분명했다.

“이리될 줄은 나도 몰랐구나.”

제갈용성을 미끼로 던지기는 했다.

하지만 죽으라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제갈후현을 그렇게 만든 이상 계속 소가주에 앉혀 둘 생각은 없었다.

지은 죄를 보자면 죽이는 것이 옳으나, 가문에서 추방하는 정도로 그칠 생각이었다.

“하아. 그래, 내가 제갈후현을…… 그, 그랬지. 제, 제갈소현도 내가…… 그런 거야. 나처럼…… 당신들도…… 가족을 잃고…… 고통스럽길…… 바랐으니까. 내 손에 보물을 잃었어……. 큭. 그 여자의 어, 얼굴은…… 하아. 보기 좋게 일그러졌는데…… 당신은 제갈후현이 그리되고도 멀쩡했지……. 하아하아하아.”

“네 어미는 종이었다. 그런 태를 통해 나와서, 제갈이란 성을 달지 않았더냐.”

“내, 내…… 어머니야.”

제갈용성이 빛이 꺼져 가는 눈을 부릅뜨고 제갈가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네가 멍청하다는 거다. 종의 아들에서 겨우 제갈이 되었는데, 고작 그 정도밖에 살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힘을 키워 복수할 생각을 하는 것이 나았다.”

“후, 후회 안 해. ……제갈 따위…… 하, 하, 결국…… 당신 얼굴도…… 보기 좋게…… 되었네…….”

제갈용성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제갈가주는 제갈용성의 침상에서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 * *

탁.

결국 백돌의 좌상귀가 살아나면서 전세가 바뀌고, 흑돌의 길이 먹혔다.

제갈무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돌의 한 집 승.

좌상귀의 한 집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가만히 바둑판을 보는 제갈무진에게,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이 인상적이던 젊은 서생이 다가왔다.

“사부님.”

“비영문은 결국 그리되었더냐?”

“송구합니다.”

“흐음. 되었다. 그게 그치의 선택이었으니.”

백면의 서생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제갈무진이 침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은 비영문주를 비롯한 문도들에게 빌어 줄 수 있는 명복의 전부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갈무진이 바둑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백면의 서생을 보자,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남은 말을 이어 갔다.

“남궁세가 이공자인 남궁진화는 경지를 넘어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비영문주의 시신은 벼락을 맞은 듯 내부 손상이 심해 보였지만,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역시, 그 아이…… 제왕검이 양자를 제대로 데려왔군.”

“위험 단계를 백 이(二) 급으로 올렸습니다.”

“역천비록은?”

“당분간은 의선문에 새로운 건물에서 보관하고 연구할 듯합니다. 최종적으로 정의맹 비처에서 역천비록 원본을 보관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는데, 결론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경계가 높아졌겠지. 그보다, 해례본은?”

제갈무진이 서생의 눈을 보며 물었다.

낮고 평이한 목소리와 덤덤한 눈빛.

한 치의 의심도 없었으나, 자비 또한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서생의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없앴습니다.”

그제서야 제갈무진이 입매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의원 하나와 적호단원 둘이 사색이 되어 뛰쳐나왔다.

“어, 없습니다---!”

자리에 있던 의선과 백소하, 적호단주가 벌떡 일어섰다.

“없다니! 무엇이!”

“해, 해례본이, 해례본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무사히 온 역천비록을 보관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이 역천비록이 들어갈 방에 이미 들어 있던 해례본이 없어진 것이다.

“너! 진짜야? 어떻게 된 거야?”

“지, 진짜입니다. 상자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경비하던 새끼들은 뭐 하고 그게 사라져! 젠장! 당장 의선문 출입을 걸어 잠그고, 오갔던 사람들 전부 확인해!”

적호단주 팽치의 명이 떨어지고 적호단원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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