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이야기 화(話) : 이전 생엔 없던 이들(1)
양청현에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바로 얼마 전, 비영문 전체를 몰살시키는 전투가 있었다.
비영문주를 사살하면서 승리하긴 했지만, 정의맹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제갈무진에게 당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혼현마제의 후인으로 추정되는 제갈무진이 언제 다시 역천비록을 노리러 올지 모르는 상황.
팽팽한 위기감이 퍼지면서, 이번에는 제갈가주까지 역천비록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 제갈가주가 역천비록을 얼마나 해석해 낼지, 그리고 의선이 제갈무진이 뿌려 놓은 비약의 치료를 해낼 수 있을지.
불안감 속에서 정의맹의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일까.
의선문으로 적호단이 대거 이동하면서 정의맹의 긴장감이 밖에까지 퍼져 나갔다.
게다가 양청현은 여전히 축제 중이었다.
정의무학관의 무학제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한 비릿한 혈향,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그 속에서 홍의제의 결승을 맞이했다.
“와아아아아---!”
무학제에서 가장 환호를 많이 받는 사람은 전대 회주인 남궁진휘도 아닌, 무림의 꽃이라는 삼화라.
올해 청명화 남궁진혜가 졸업을 했고, 천상화 나하린은 무학제에서 크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지당화 제갈지현의 등장에 사람들의 환호가 엄청났다.
“사람이 유독 많네.”
“보면 몰라? 도련님 너 때문이잖아.”
주변을 돌아보며 놀라는 진화를 보며, 남궁구가 그를 타박했다.
진화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비명이 들리고, 진화의 일거수일투족을 화첩을 가지고 따라다니는 화공부터 앉기가 무섭게 주인이 있는 귀한 자리로 청하는 종자들의 발걸음까지.
아닌 게 아니라, 연무장이 보이지 않았다면 진화가 오늘의 주인공인 줄 알았을 정도라.
남궁구는 피해도 모자랄 판국에 진화가 굳이 이 사람 많은 무학제에 참석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 때문이라고?”
“몰랐냐? 지난번 행정산술학 실습으로 장사를 한 이후, 네 일거수일투족이 양청현의 화제다, 화제! 대체 네가 어제 만두를 몇 개 사 갔는지는 왜 알고 싶다는 건데? 아니, 넌 왜 맨날 만두만 먹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멀뚱멀뚱 저를 보는 진화의 모습에, 남궁구가 그간의 불만을 모두 쏟아 내었다.
진화도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곧 무학제 결승이 시작되면서 변명할 기회를 놓쳤다.
파파파팟---!
“오! 시작부터 적엽비화(摘葉飛花)라니! 제갈지현이 독하게 마음을 먹은 모양인데?”
“만천화우와는 결이 다르군.”
“당문의 만천화우는 용독과 사살을 함께하니까, 아무래도 움직임이 다르겠지.”
제갈지현의 적엽비화가 연무장에 박히는 것을 보며, 진화와 남궁구가 감탄했다.
단 한 수였지만, 침 하나하나가 하후진의 급소를 노렸다.
세세한 기운의 통제는 물론 파괴력까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장군부의 그 하후진이었다.
콰쾅-!
하후진이 관우의 청룡언월도처럼 거대한 월후도를 휘둘러 연무장이 크게 파였다.
“와! 저 용력 봐라. 팽가 쌍둥이보다 더하다!”
“용력만으로는 적호단주에 버금간다는 선배니까. 모자란 것이 없는 것으로는 이기기 힘들 거다.”
진화의 말을 들었을까.
채-앵!
제갈지현이 검을 빼 들어 옆에서 베어 들어오던 월후도를 막았다.
“우아아아--!”
사람들의 탄성이 터졌다.
확실히 겉보기엔 가녀린 제갈지현이 곰처럼 큰 사내와 맞서는 것은 탄성을 부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딪히는 순간, 제갈지현이 얼마나 훌륭하게 상대의 무게를 흘리고 기운의 강약을 조절했는지 알아본 무인들의 놀람은 그보다 더 컸다.
그동안 제갈지현이 무공으로는 그렇게 돋보이지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숨기고 있었던 걸까?”
“그렇겠지. 어중간하게 잘해 봤자 괜히 제갈후현의 경계만 살 뿐이었을 테니.”
“지금은 제갈후현이 없어서?”
“벌써 제갈세가 직계가 두 명이 죽었어. 제갈후현은 쓰러져 있고. 제갈세가의 비극에 사람들의 동정심이 향하고 있을 때, 저 여자가 마지막 희망처럼 보이면 어떨까?”
“글쎄.”
남궁구는 말 대신 그의 시선이 답했다.
주변 가득 제갈지현에게 일방적으로 응원을 보내는 사람들뿐이었다.
“가진 미모와 상황, 그걸 이용하는 지략에 예상을 웃도는 무공.”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참 머리를 잘 쓰는 여자였다.
진화는 점점 하후진의 힘에 밀리다가, 다시 붉은 검사를 피워 올리는 제갈지현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제갈지현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제 하후진이 우승하더라도 제갈지현의 명성이 더 높아질 것이었다.
“어, 저거!”
남궁구가 놀라서 소리쳤다.
제갈지현의 날렵한 움직임과 몰아붙이는 공세를 잘 막아 내던 하후진이 빈틈을 찾아 파고들었다.
퍼억-!
하후진이 제갈지현을 발로 차 거리를 벌린 뒤, 뒤로 물러서는 그녀를 보며 뛰어올랐다.
하후진의 몸이 공중에 뜬 순간…….
쉐에에엑---!
제갈지현의 소천성검 설중매화가 날아갔다.
꽃잎 하나하나가 흩날리듯 붉은 기운이 하후진의 앞에서 산개했다.
“크읏!”
꽃잎이 하후진의 몸을 스치며 옅은 상처를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끝이군.”
진화의 말과 동시에, 하후진의 월영도에 제갈지현의 검이 장외로 날아갔다.
“와아아아아---!”
우승자는 이변 없이 철혈소도(鐵血小刀) 하후진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 소리는 당당하게 서서 패배를 인정한 제갈지현에서 더 많이 쏟아졌다.
얼마 전 제갈용성까지 죽으면서 임시 소가주 위에 오른 제갈지현.
이제야 진화가 알던 제갈세가가 되었다.
위험한 임무마다 방패 들듯 남궁세가 무사들을 돌리면서, 뒤로는 약해진 남궁세가의 이권을 빼앗던.
‘저년을 어찌해야 할까?’
지금 당장은 제갈세가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이면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지만, 현재 제갈가주가 역천비록의 해석을 돕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임시’라는 것도 이전과 달랐다.
제갈후현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일까.
‘역시 제갈후현이 깨어난 뒤 지켜보고 결정해야겠지. 네가 쫓겨날지, 밀어낼지. 뭐가 어찌 되었든 한동안 아등바등해야 할 거다.’
도도한 얼굴 가득 만족감을 숨길 수 없는 듯.
진화는 당당한 기세로 연무장을 내려가는 제갈지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고즈넉한 밤.
제갈무진이 가만히 죽간에 글자를 채워 가고 있었다.
아니, 그걸 글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언뜻 보면 어린아이의 그림이나 먼 외국의 문자 같기도 하여, 제갈무진조차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쓰고 있었다.
“스승님.”
“문혜, 왔느냐?”
제갈무진은 백면의 서생을 문혜라고 불렀다.
문혜를 부르는 제갈무진의 입가엔 미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기억을 꺼내서 역천비록을 다시 작성하고 있다. 곧 나머지 역천비록을 가져오면, 정의맹에 있는 그것은 없애도 될 것이다.”
제갈무진은 스스로 이립(而立)을 넘어서는 세상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불혹(不惑) 이후에는 세상에 어려운 것이 사라졌다 자신했다.
그런데 귀천성의 비록을 다시 작성하자니, 그 조심스러움 때문인지 새롭게 글자를 써 보는 듯 재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혜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제갈가주가 나섰다고 합니다.”
“……흠.”
문혜의 말에, 제갈무진이 붓을 놓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계속 말을 하라는 듯 눈빛으로 문혜를 재촉했다.
“역천비록의 해석에 제갈가주가 나섰습니다.”
“그치가 어떻게?”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제갈가주가 없어진 해례본을 다시 작성했다고 합니다.”
“흐음.”
제갈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갈길현이 그리되고 귀천성의 전리품에는 눈도 두지 않던 자가 그건 언제 보았을꼬. ……역천비록을 그곳에 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해례본을 없애면서 시간을 얻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천천히 이미 연구된 역천비록의 앞부분을 완성하고 뒷부분을 가져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변수였다.
“요즘은 하나둘, 내 생각을 벗어나는 변수가 많구나.”
“송구합니다.”
정보(情報).
모든 것은 제갈무진이 아는 것을 벗어난 것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갈무진에게 충분한 정보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건, 그의 눈과 귀가 제 일을 다 못했기 때문이라.
문혜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문혜의 정수리로, 차갑게 내려앉은 제갈무진의 시선이 꽂혔다.
“가져오려면?”
“의선문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적호단 전체, 아니, 정의맹 무단 전부를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역천비록의 뒷부분은 연구가 충분하지 않았다. 특히 제물에 관해선, 티끌만 한 불안도 없어야 하니. ……비록을 가져오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어떠냐?”
제갈무진의 말에 문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해석을 완성하셨는지요.”
“역천의 운명을 타고난 자. 최종 제물은 대체 뭐가 달랐던 건지 알아야겠구나.”
제갈무진의 눈길이 탁자로 향하고, 문혜의 시선 또한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거기엔 제갈무진의 다른 첩자가 보낸 전서가 도착해 있었다.
* * *
“우아아아아아---!”
어제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함성.
백의생들의 무학제, 백의제가 시작되었다.
이번 백의생들은 황금세대라 불리는 금의생들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등쌀에 정의무학제 최초로 입석 관람을 허락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물론, 관람석에 서 있는 사람들 특히 여인들 태반이 한 사람을 보러 온 듯했지만 말이다.
“뇌화공자다--!”
“꺄아아아--! 공자님!”
“공자님, 이기세요!”
진화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팔강전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그리고 팔강에서 진화의 상대는 남궁교명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언제부터였을까.
남궁교명이 진화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빛에서 보이는 저 깊은 신뢰는 다 뭐란 말인가.
진화는 어쩐지 꺼림칙했다.
떡을 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벌써 내 떡을 받아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시작하라!”
진화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뇌전이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진화는 시작하자마자 검에 기운을 실었다.
어차피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니 어쩌니 말이 퍼져 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들의 호의를 네 방패로 삼거라.”
남궁진휘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진화는 초반부터 강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천뢰제왕검법은 폭발적인 기운을 발산하면서 남궁 최고의 강맹함을 자랑하는 무공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본질은 음과 양의 조화가 깨어질 때의 하늘을 그리는 것이었다.
진화는 남궁교명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남궁교명의 안정적인 기운을 깨뜨렸다.
쉐에엑---!
남궁교명 또한 절정을 넘은 고수라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전투든 비무든, 상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
남궁교명이 창궁대연검법 필성호사(必聲虎死)로 진화의 뇌전을 막았다.
까----앙!
날카로운 검명이 울었다.
맹수를 몰아치듯 남궁교명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푸른 기운이 목덜미를 꽤 뚫는 송곳처럼 날카롭고 거셌다.
‘많이 발전했군.’
거세면 거칠기 쉽고, 날카로우면 부러지기 쉬운 법이다.
하지만 남궁교명은 어릴 적 가졌던 좋은 검세를 더 강하게 발전시켰다.
힘을 키우되 무뎌지지 않았고, 사나워진 만큼 더 영리해졌다.
‘대체 뭘까? 뭐가 널 이렇게 발전시켰을까.’
까-앙!
진화의 검이 성긴 그물처럼 공세가 약해진 쪽을 매섭게 때렸다.
‘오히려 이전이 더 좋은 환경이었다. 약 때문에? 아니, 그건 죽지만 않으면 오히려 내공의 흐름을 빠르게 도와주는 거다. 영약도 심심찮게 복용했었다. 그런데…… 왜 집안이 망하고, 아무 지원도 없는 이제야 더 발전한 거냐?’
채—앵! 챙! 챙!
진화가 남궁교명을 몰아쳤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뇌전이 번뜩였고, 남궁교명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남궁교명의 다리가 삐끗하는 순간.
쉐에에엑--!
한 호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섬전십삼검뢰 여여일식(如如一息)이 남궁교명의 날숨에서 하체를 무너뜨렸다.
“크헛!”
남궁교명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진화의 검이 그의 목에 가 있었다.
“남궁진화 승!”
“우와아아아아---!”
진화의 승리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연무장에 가득 쏟아졌다.
초반부터 호쾌하게 몰아치는 공방전 속에서 단숨에 결판이 난 화끈한 승부.
모두가 무학제에서 보길 원하는 비무였다.
‘그런데 왜 너까지 좋아하는 거지?’
진화가 당황한 눈으로 남궁교명을 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 승리에 환호한다지만, 단 한 사람, 기뻐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궁교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남궁교명이 제일 시원한 얼굴로 진화를 향해 웃고 있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중심을 더 단단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감사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공자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꼭 충심을 다해 보답하겠습니다.”
“……그래.”
의선문에서 몸이 다 나았다고 했나?
저놈은 왜 뭐가 다 정리된 듯, 후련한 얼굴인 거지?
진화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연무장을 내려가는 남궁교명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