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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91)화 (91/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이야기 화(話) : 이전 생엔 없던 이들(3)

나하연과 팽수의 비무가 파국으로 치닫고, 백의생들의 무학제 결승은 결국 삼파전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때에…….

“기권합니다!”

남궁구가 기권을 결정했다.

상대가 진화였기에, 가신으로서의 위치를 지킨 것이다.

결승까지 와서 본인에게나 관중에게나 아쉬운 일이겠으나, 다른 세가에서도 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이러기 있는가?”

“뚱뚱땡중이나 뇌전에 통구이가 되라고. 난 사양이야.”

현오의 항의에 남궁구가 얄밉게 내뺐다.

남궁구 못지않게 만사 대충을 표방하던 현오지만, 그는 기권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진화와 현오의 결승이 결정된 것이다.

“하하하, 남궁 시주와는 한번 겨뤄 보고 싶은데, 그러다가 자칫 의생장이 되면 어쩌지?”

“……의생장?”

현오의 말에 진화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외적으로 진화의 경지는 절정을 넘어선, 몇몇 이들 사이에선 초절정에 올랐다 알려졌는데, 그럼에도 현오는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퉁퉁한 눈두덩과 어울리지 않게 두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소 먹을 것 이외에는 매사 의욕이 없고 게으른 모습이었다.

오후 수련을 위해 진화와 나온 때에도, 만두만 사고 소림에 가지 않고 도망가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선배 나한들에게 끌려가던 현오였다.

‘어떻게 무승이 됐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화는 날카롭게 빛나는 눈이 현오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무공에 뜻이 없다면 무학관 차석은 할 수 없었겠지.’

진화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진화를 보는 현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위협적이군.’

아직은 현오보다 작은 키, 꽃 같은 얼굴이 잔잔하게 웃으니 후광을 두른 듯했다.

하지만 현오도 같이 웃을 수 없는 것이, 진화에게서 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를 압박하는 듯했다.

일 년 가까이 옆에 있다 보니 익숙해져서인지, 그저 뽀얀 병아리 같은 친구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상대가 되고 보니 찌릿찌릿한데. 아주 흉악한 병아리였어.’

현오의 볼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시작하라”라는 무사부의 신호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갔다.

* * *

진화의 놀란 눈이 날카로워졌다.

쉐에에엑!

코앞으로 다가온 현오에게 진화가 몸을 두 동강 낼 듯 검을 휘둘렀다.

놀란 듯 몸을 기울여 피한 현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가온 현오는 금빛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 주먹으로 진화의 옆구리를 노렸다.

퍼-억!

“이크!”

진화의 발에 맞은 현오가 휘청이며 물러섰다.

검을 쓰면서 박투술을 같이하는 것이 진화의 아버지, 남궁경이 추구하는 실전 검술이라.

이전 생에서 진화는 스승을 찾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의 검을 보고 익히며 자랐다.

하지만 현오 또한 소림에서 가장 많은 실전을 겪은 각우를 사부로 두었다.

파파파팟---!

펑! 퍼—엉!

현오의 오형팔권법이 연무장을 파헤치며 사방에서 진화를 공격했다.

하지만 진화가 있는 곳과 동시에 현오가 있던 곳 역시 연무장이 터져 나갔다.

그사이 진화 또한 현오에게 뇌기를 쏘았기 때문이다.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진 공방.

“와아아…….”

잠깐의 틈 사이에도 함성조차 크게 나오지 않았다.

진화와 현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단히 공격적이군.’

‘살벌하네, 남궁 시주.’

서로가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진화는 현오의 실력이 궁금했고, 현오는 진화와 이런 비무를 기대하며 연무장에 올랐으니,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가네, 남궁 시주!”

“제가 먼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든 진화와 현오가 가운데서 부딪쳤다.

진화의 검격에 현오가 들어오자, 뇌전이 번뜩이며 현오의 어깨를 노렸다.

하지만 현오는 걱정하지 않았다.

금강불괴는 아니더라도 금침의 경지까지는 이룩한 육체라.

무복이 베이는 정도로 그치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정면으로 장을 뻗었다.

“큿!”

검이 어깨 살갗을 파고든 것을 느낀 현오가 놀라서 내공으로 튕겨 냈다.

퍼--엉!

하지만 이미 현오의 장을 왼손에 두른 뇌기로 태워 버린 진화는, 현오의 동작이 이어지지 못한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쉐에에에엑--!

“우악!”

현오가 급히 몸을 굴렀다.

지난 비무 때처럼 능청스럽게 땅을 구른 것이 아니라 다급하게 몸을 날리는 모습이 어찌나 날렵한지.

아마 당혜군이 보고 있다면 분노를 뿜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유가 없어진 현오를 내버려 둘 진화가 아니라.

쉐에에엑--! 퍽! 퍽!

진화의 검이 현오를 궁지에 몰았다.

천뢰제왕검법은 남궁세가에서 가장 파괴적인 검술이라.

공격 일변도로 이어진 연속기에, 진화의 뇌전은 힘을 축적하듯 더 거세게 번뜩였다.

‘지금…… 응? 웃어?’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던 진화가 본능적으로 검을 연무장에 박았다.

퍼----엉!

궁지에 몰리면서도, 현오가 진화에게 금강붕산권을 날린 것이다.

연무장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돌과 흙이 튀었다.

“크아아앗-! 하하하하하!”

폭발을 뚫고 현오가 튀어나왔다.

진화의 검에 베인 상처들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현오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현오가 이렇게 적극적이었나? 눈까지 붉어졌네. 어지간히 흥분했나 보군.’

수련은 물론이고 각우의 실전 수업도 죽지 못해 한다던 현오였다.

그랬던 현오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격을 퍼붓다니.

진화가 현오의 공격을 막아 내며 조금 신기하다는 듯 현오를 보았다.

현오의 이러한 얼굴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그때가, 베개로 비영문도를 때려죽일 때였나?’

현오가 호들갑을 떨면서 베개로 비영문도의 머리를 깨던 것을 떠올린 진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보니 매번 사부 욕할 것이 없다.

그 사부에 그 제자가 아닌가.

“많이 즐거운가 봅니다.”

“응? ……하하하하! 아니야, 아파서 웃은 걸세.”

진화의 말에 현오가 멈칫하며,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각우 사부님과 많이 닮아 보이는데요.”

“에끼, 그런 욕을 하면 극락왕생하기 힘들 걸세. 하하하하!”

“스님이 자꾸 악담을 하……시니, 빈틈! 공격이 큽니다!”

퍼억---!

“큿!”

진화가 달려드는 현오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뛰어올라, 검으로 현오를 내리꽂을 듯 낙하했다.

“헛!”

너스레를 떨 시간도 없이 현오가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팟---!

“으악!”

천뢰제왕검법 무수전뢰(無水傳雷)가 연무장을 뚫고 나오며, 그걸 현오를 연무장 밖으로 내던졌다.

“……와!”

현오가 저도 모르게 가슴을 매만졌다.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남궁진화, 승!”

“와아아아아아-----!”

화려한 공격에 이어진 시원한 결말이 무학제의 대미를 장식하고.

연무장으로 이제까지 중 가장 큰 환호가 쏟아졌다.

“하하하하! 정말 대단하군.”

현오는 언제 죽도록 진화에게 공격을 퍼부었냐는 듯, 볼살을 투실거리며 능청스레 웃었다.

“소림 산문까지 도망하셨다기에 안 믿었는데, 현오가 빠르긴 빨랐군요.”

“제발 당 소저가 안 봤으면 좋겠군.”

“하하하하!”

현오의 말에 진화가 크게 웃어 버렸다.

어디서 짙은 투기가 느껴지는데, 그걸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 * *

정의무학제까지 모두 끝이 나고서도 진화의 일상은 그대로였다.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수련을 하는 반복이었다.

평가는 모두 끝났지만, 애초에 정의무학제의 목적은 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후 정의맹을 이끌어 갈 동량이 되기 위해, 삼 년 동안은 휴업조차 없을 예정이었다.

진화는 여전히 숙청관에서 머물렀고,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진화와 동기들에게 백의가 아닌 홍의가 주어졌다는 것이랄까.

남궁교명은 부지런히 의선문에 다니더니,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고 있다며 진화에게 보고했다. 진화는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개인사였다.

현오는 무학제 이후 각우와 선배들의 손에, 소림 본산으로 끌려갔다가 칠 주야가 지나서 왔다. 어떻게 소림에서 끌려갔다가 살이 더 쪄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팽가 쌍둥이 형제는 지난 무학제의 패배를 곱씹으며, 숙청관과 인내관의 바위를 들고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팽수는 나하연과 동수를 이뤘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분명 절대적인 근육량이 달랐다. 충격적이게도, 내 근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팽수에게 그런 굴욕을 준 나하연은, 본격적으로 진화에게 집적거렸다.

“해가 바뀌었어도 그대의 미모는 여전하군. 아니, 새하얀 눈 속에 피어난 강인한 꽃 같다고 할까?”

“……혼인의향서는 거절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에서 패황권문이 보낸 혼인의향서를 단칼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중원의 강인한 처녀로서, 그대 같은 꽃이라면 열 번이 아닌 백 번이라도 찍어 주지.”

퍼-억!

“미친년아! 남의 수업실에 왜 와 있는 거야?”

당혜군이 나하연의 뒤통수를 강렬하게 때리고는 그녀를 데리고 갔다.

당혜군은 심심찮게 현오의 독살을 시도했는데, 오히려 요즘 현오는 독의 맛을 알아 가는 듯했다.

진화는 그녀가 스스로를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알아챌지 궁금했다.

“저긴 썰렁하네.”

“기존 청의생들이 동의생이 되면서 싹 빠져나갔으니까.”

잠잠한 숙청관, 인내관과 달리, 현해관(賢諧館)은 대대적으로 청소와 단장을 했다.

새로운 백의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관도회는 왜 소집되었지?”

“새로운 집행부끼리 대면식도 할 겸, 새로 선발대회를 준비해야 하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다른 건 다 선배들이 하는데, 우리는 해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

진화의 대답에, 지난 선발대회에서 홍채연의 독약 맛을 톡톡히 본 현오와 남궁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새로운 선발대회 준비까지 시작되자, 진화는 벌써 정의무학관에 온 지 일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무명의 백의생복을 벗고 입은 붉디붉은 홍의생복은 여전히 어색했다.

그리고 진화가 홍의생복의 붉은색에 익숙해졌을 즈음, 신입 백의생들이 들어왔다.

* * *

백의생들의 입관식이 있는 날.

진화는 이전에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홍의생들을 이끌고 입관식에 참석했다.

대연무장에 선 백의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흐흐흐, 파릇파릇하다.”

“너보다 나이 많은 이들도 있을 텐데?”

“…….”

무학관의 입관은 조건만 맞으며 누구나 가능하기에, 저 중에 태반은 진화나 남궁구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이번에도 대단한 사람들이 입관했다던데?”

“대단한 사람들?”

“오왕부의 형제들이 왔다네.”

“오왕부? 왕자들이 왔단 말이야?”

남궁구의 말에 남궁교명과 현오, 팽가 형제도 관심을 보였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것이 모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진화 또한 흥미로운 눈빛으로 백의생들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흥미였다.

‘이전 생에선, 왕가 사람이 정의무학관에 들었다는 건 들어 본 적 없었다.’

어떤 일이든 일과 일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변화가 있다면, 그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있는 법.

그리고 진화는 이제, 제 주변의 변화 대부분이 자신과 자신으로 인해 일이 틀어진 적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양주는 남궁세가의 터전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양주를 다른 의미로 지배하는 오왕부의 사람이 이곳에 왔다라…….’

아군인지 적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 혹은 남궁과 결코 무관할 수 없으리라.

때마침, 관도생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진화의 눈에 들어왔다.

큰 키와 두꺼운 목, 건장한 덩치.

하후대장군부의 사람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한 외양의 사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화는 어쩐지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내 하나가 유독 신경이 쓰였다.

“백의생장이 왕자인가?”

“아니. 그냥 이왕자가 제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우겼다나 봐. 웃기지?”

“그 뒤의 사람은?”

“허! 도사네. 칠왕자. 대체 어떻게 왕자들만 쏙쏙 고르는 거야?”

알 수밖에.

남궁구는 놀랍다는 듯 진화에게 물었지만, 진화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하얀 얼굴의 칠왕자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칠왕자, 이름은 뭐지?”

“칠왕자? 글쎄. 한문……예, 해? 혜! 한문혜!”

남궁구의 대답을 들으며, 진화는 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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