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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95)화 (95/425)

남궁마제

볼 진(診) 그림 화(畵) : 화룡점정, 최종 제물(1)

요즘 진화를 괴롭히는 건 기억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왔기에, 이전보다 아는 것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번 백소하와의 대화에서 떠올린 기억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제왕검에게 구출되는 그 시점 이전의 기억이 흐릿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 시절 기억을 다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특별한 것들, 강렬하게 남는 기억들은 다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어린 시절이 결코 평범하진 않았지. 기억들 태반이 그러한 것들뿐이라, 오히려 평범하게 인식해 버린 건가?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이렇게 기억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더 특별했다는 건데…… 실혼, 실혼.’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백소하의 말을 되뇌자, 다시 그때 떠올린 기억들이 스쳐 갔다.

불길하고 기분 나쁜 검은 구덩이.

그리고 살색, 사람들의 잔상.

하지만 여전히 그 기억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 * *

기억이란 생각과 입장에 따라 왜곡되기 쉬운 것이었다.

특히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더욱더.

백소하는 그런 기억을 떠올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했지만, 진화는 어쩐지 그걸 꼭 떠올려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며칠째, 틈만 나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도련님, 뭐 해?”

“아!”

“요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남궁구가 신기하다는 듯 진화를 보았다.

진화가 사람의 기척도 모르고 생각에 빠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순하고 무던할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남궁구가 아는 진화는 식충 꽃 그 자체라. 작은 벌레의 발자국에도 반응할 정도로 예민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그냥.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게 있어서.”

“……좋은 게 아니라면 붙잡고 있지 마라.”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너, 표정이 되게 안 좋아. 심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마치 두려움에 떠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남궁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남궁구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여튼 괜한 거 잡고 있지 마!”

“나, 참. 것보다, 무슨 일이야?”

괜히 성질을 내는 남궁구에, 진화가 화제를 돌렸다.

그에 남궁구도 반색하며 말을 꺼냈다.

“왕자! 걔 알아봐 달라며.”

“벌써 알아봤어?”

“아무리 칠왕자라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 게다가 본가에서도 이미 오왕부 쪽 움직임은 보고 있더라고.”

“본가에 연락한 거야?”

“아니, 현기 형님께 물어보니까 술술-이던걸.”

“아…….”

호현기는 소가주인 남궁진휘의 보좌였다.

지금도 정의맹 군사부에 남은 남궁진휘 때문에 양청현에 남아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남궁진혜에게 멱살 잡혀 적호단에 끌려가다가 겨우 살아남았으니.

호현기라면 남궁진휘를 도와 본가와 꾸준히 연락 중이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제갈세가와 오왕부 사이에 혼담은 예전부터 오가고 있었나 봐.”

“혼담?”

“제갈세가가 옮겨 오면서 장강 상류 유통권을 잃었으니까. 어떻게든 배를 띄우고 싶어 하는데, 양자강 유통권은 오왕부가 잡고 있으니.”

“제갈세가는 잃어버린 수로(水路) 유통권을 얻고, 오왕부는 제갈세가의 무력을 빌릴 건가? 자칫 양주 자사의 경계를 살 가능성을 무릅쓰고?”

“그럴 가치는 있지. 제갈한테는. 제갈가주가 굉장히 영민하게 끈을 잘 댔지, 뭘 약속했는지는 몰라도.”

수로는 배를 띄워 한 번에 많은 물품을 옮길 수 있는 반면, 필요한 인원과 경비가 적었다. 게다가 요즘같이 나라가 흉흉한 시국에는 육로보다 훨씬 안전했다.

즉, 현시점에선 수로 유통이야말로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큰 사업이라는 것이다.

제갈세가에서는 뭘 내주더라도 가장 원하는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정의무학관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꽃피우는 작전이랄까. 오왕부의 왕세자부터 구왕자까지, 무려 아홉 명의 나이가 비슷해. 그런데 왕세자를 제외하고도 여덟이나 있는 선택지 중에서 굳이 이왕자와 칠왕자를 뽑은 건, 그나마 제갈세가 여식과 사랑을 꽃피우기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둘밖에 없어서라나.”

“나머지는 뭘 하고?”

“셋은 굴러다니는 게 빠를 것 같은 돼지인데 정혼자가 있고, 다른 셋은 처첩이 줄줄이 딸린 호색가들뿐이라. 자식 농사가 아주 글러먹었어. 왕비 소생인 이왕자는 혼인에 신중하다 보니, 칠왕자는 학업에 바빠서, 둘만 혼기를 채우고도 정혼자가 없다네.”

남궁구의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온 나라가 혼란할 때다.

무림의 대세가라면 어지간한 장군부나 권문세족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졌으니, 군권이 없는 오왕부라면 제갈세가만큼 좋은 선택지도 없을 것이다.

“칠왕자에 대해서 알아 온 건?”

“특별할 건 없었어. 다만, 한 가지. 다른 왕자들은 다들 왕사들을 두고 교육을 받았는데, 칠왕자만 학문에 뜻이 높아서 송림학관에 따로 수학했대.”

“송림학관?”

“태사까지 지낸 유명한 학자의 문하라네.”

“왕자인데, 외부에서 수학을 했다고?”

사실 학자나 학관에 대해서는 진화나 남궁구나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진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황족들은 장성하기 전까지 혹은 장성한 후라도 외부 출입을 삼간다는 것이다.

후계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진화만 해도 남궁세가 선발대회가 있기 전까지 창천원 밖으로는 나간 일이 없었다.

“뭐, 어때. 그 왕자들이 정의무학관에도 와 있는데. 되게 유명한 학자인가 보지.”

“흐음. 하지만 왕자인데…….”

“도련님, 넌, 그 왕자를 뒈지게 팼고.”

“…….”

계속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아서일까.

쉽게 수긍하지 못하던 진화가 남궁구의 반박에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귀인에서 칠왕자를 낳고 소용에 올랐대. 외척이 남정의 대호족인데, 처지는 그리 좋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건 왜 그렇지?”

“대호족이든 뭐든, 지방 호족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애매한 위치거든. 평민들이 보기에는 꽤 높은 귀족이지만, 황족이 보기엔 평민이나 다름이 없지. 게다가 현 오왕의 정비가 태복령 집안 출신이야.”

“이왕자의 친모 말인가?”

“그래. 사실 태복령에 비하면, 오왕이 초라할 지경이지. 그쪽은 실제 금줄을 잡은 곳이고, 오왕은 황제의 눈치나 살피는 이복동생에 불과하니까. 양주 금싸라기에 오왕을 보내 준 것도, 사실 태복령이 힘을 쓴 거라더군. 그래서 양주 자사가 오왕을 무시하는 거고.”

“결국…… 후궁 소생의 왕자라는 것 외에 특별할 건 없다는 건가?”

“……뭐, 그렇지.”

짧은 시간에 꽤 많은 것을 알아 왔지만, 결국 진화의 말대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진화는 칠왕자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무공이 출중하다는 이왕자도 입학식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진화의 시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개 학자라는 칠왕자가 저와 정확하게 눈을 마주치다니.

‘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어.’

역시, 수상쩍었다.

“그 송림학관이라는 곳. 거길 조금 더 파 봐. 그리고 무학관에 오기 전에는 뭘 했는지, 주변 인물들은 어떤 인물인지도.”

“흐음, 알겠어.”

남궁구도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특별하게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남궁구는 단편적인 정보를 믿느니, 진화의 감을 더 믿었다.

“지부장님이나 소가주님께 말해서, 협조 좀 구하지 뭐.”

남궁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누가 시킨 거냐고 묻는다면 진화의 이름을 방패처럼 내밀 거였다.

* * *

같은 날.

남궁진휘에게 연통이 와서 진화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남궁세가 장원에 남았다.

그날 밤, 한동안 조용하던 제갈가주가 그림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제물의 조건이 적혀 있었다고요? 역천비록을 해석한 겁니까?”

진화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려서도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어 애늙은이라 불리던 진화라, 그가 이 소식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남궁진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제갈가주는 이미 오래전에 역천비록 해례본을 복구했다. 한동안 정의맹이나 세가의 일까지 제쳐 두고 역천비록 해석에 들어갔고.”

남궁진휘가 말하는 것보다 제갈가주의 수고가 훨씬 컸다.

잠이나 제대로 자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방대한 작업을 홀로 수행했고, 제갈무진을 쫓는 일을 남궁진휘와 적호단에 일임할 정도로 매달렸으니까.

아무리 맹주를 믿는다지만 군사부의 일을 남궁진휘에게 맡긴 것은 정의맹 총군사로서도, 제갈가주로서도 큰 모험이었다.

특히 그동안 정치적으로 움직이던 제갈가주를 생각한다면,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잠시나마 군사부를 맡기고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준 것은 큰 양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연구된 것에, 네가 해당되는 조건은 없더구나.”

“……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혼란스러운 듯 그를 보았다.

실제로 제가 제물이었는데, 없다니.

“역천의 운명을 타고난 자. 살성(殺性)의 기질을 보이는 자. 제갈가주가 연구한 역천비록엔, 살성의 기질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살성이라니, 그런…….”

진화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천뢰기(天雷氣)가 아니라 살성이라니!

이런 식의 전개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제갈무진의 손에서 만들어진 비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느냐?”

“예.”

“비약으로 없어진 혈맥과 비대해진 혈맥들. 약성의 조합이 심마에 빠뜨려 폭력성을 증가시키고 기운의 폭주를 유도한다고 하였지. 의선께서는 없어진 혈맥과 비대해진 혈맥이 그런 폭주를 견디도록 설계된 것으로 추측하셨다.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몸이 터져 나가지 않도록.”

“…….”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큰 것이리라.

남궁진휘는 차분하게 진화를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진화는 아직 실망하지 않았다.

남궁진휘는 진화와 살성이라는 말을 연관시키지 못했지만, 이전 생에서 복수심에 빠져 적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진화는 그 말이 크게 자신과 동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혼란스러운 것은, 천뢰기가 아니라 살성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실망하기는 일러. 천뢰기나 살성이나 어쩌면 하나의 특성일지도 모르지. 내가 반쯤 미쳐서 날뛰던 것처럼. 그런데 혈맥을 폭주하지 않도록 설계했다라…….’

번뜩.

진화에게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다 비틀어져 가는 팔로 약사발을 던지는 모습.

사방에, 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아이들.

‘……!’

진화에게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 비약. 혹시 제물이 되게끔 만드는 약을 실험하고 있던 건 아닐까요?”

“뭐?”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저도 ‘그곳’에서 어떤 약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곳이라 함은, 결국 진화가 발견된 곳을 말함이라.

남궁진휘는 그곳이 광마제가 역전대법을 펼치던 귀천비지임을 알아차렸다.

“그곳에서 약을? 그게 어떤 약인지 기억하느냐?”

“아, 그건…… 송구합니다. 기억이 흐릿해서…… 다시 잘 떠올려 보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떠올리지 말거라. 어린 시절 기억은 다 흐릿한 법이니까.”

남궁진휘가 남궁구처럼 기억을 떠올리려는 진화를 만류했다.

“어차피 어린 네게 어떤 약인지 알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네 생각에는 일리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약을 만들 이유도 없고, 완성된 약이라면 그걸 제갈후현을 통해 퍼뜨릴 이유도 없으니.”

약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만약, 그 제물의 조건을 안다면요?”

“지금쯤 제물을 찾고 있겠지. 하지만 제갈가주의 말에 의하면 비록의 연구 진행은 꼼꼼하게 챙겼다고 했다. 역천비록의 연구가 최종장에 들어서기 전에 들켰으니, 나머지 역천비록을 찾으러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궁진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후우, 진화야, 역천비록의 모든 연구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겉핥기 정도 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꾸나. 혹여 이번이 아니더라도, 역천비록은 제갈세가가 가진 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

“내가 최선을 다해 역천비록을 모아서 연구하도록 정의맹을 움직여 보마. 내 힘으로 안 된다면 가문에서 나설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형님.”

남궁진휘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남궁진휘의 말을 들은 진화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최종장! 나 또한 마지막 제물로 선택된 거니까. 나에 대한 건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역천비록은 이게 끝이 아니니까.’

제갈세가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을 찾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역천비록은 총 일곱 권.

천하를 전부 뒤져서라도, 이 빌어먹을 연결을 끊어 버리고 말리라!

진화가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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