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그림 화(畵) : 화룡점정, 최종 제물(2)
제물이 되는 조건.
“하.”
코웃음이 났다.
멋대로 사람을 골라 제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천뢰기나 혼돈지체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이전 생에 의선은 역천지체에 대한 것까지는 밝혀내었는데…… 그게 제갈세가의 역천비록이 아닐 수 있는 건가? 아니야, 아직 최종장에 대한 해석이 남았어. 기다려 보자.’
중요한 것은 최종장을 해석할 때까지 역천비록을 지켜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화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여전히 찝찝하게 남은 것이 있었으니.
‘검은 구덩이와 그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그리고 이번에 떠오른 약사발을 들이켜고 쓰러지던 아이들과 내 손에 들린 듯한 약사발…….’
진화는 쓰러지는 아이들을 보던 제 시선을 떠올렸다.
섬뜩하고 두렵게 느껴지던 첫 번째 기억과 달리, 약을 보는 제 시선에서는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진화는 어렴풋이 제가 그 약을 견뎌 내었음을 알았다.
‘내 혼돈지체 때문에 그 약을 견뎌 낸 것인가.’
그렇다면 살성이라는 것도, 그런 조건들 중 하나가 아닐까.
* * *
갑자기 각우의 수업이 자율수련으로 대체되었다.
대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던 진화의 눈에 갑 조 사람들과 병 조, 나하연과 당혜군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특이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강했다.
괜히 지금 홍의생들을 역대 최고의 기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혼돈지체를 타고난 진화조차, 이전 생에선 서른 후반에서야 검기를 뿌리는 경지에 닿았었다.
아무리 내공심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돌고 돌았다 한들, 확실히 눈앞에 있는 이들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없던 이전에도 저들은 저렇게 강했을 것인데, 그럼에도 참변을 피하지 못했다. 게다가 저들의 죽음에 대해 자세한 조사가 이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회자가 되지도 않았었다. 소림 각우의 제자, 팽가와 당문의 직계, 패황권문의 둘째…… 모두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가문과 사문의 기대주들인데.’
마치 남궁진휘의 죽음과 비슷했다.
귀한 남궁세가 소가주의 죽음인데, 그저 사고로 밝혀진 것으로 납득해야만 했던.
‘형님뿐이라면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세가에서 저들 모두의 죽음을 덮을 순 없어. 이유도 없고. 그렇다면 단 한 곳. 모든 사람들이 저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납득할 수밖에 없고, 그 일을 거론하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불길한 곳, 귀천성밖에 없지!’
갑 조 일행과 나하연, 당혜군을 보는 진화의 눈빛이 일렁였다.
진화는 이전 생에 있었던 저들의 죽음 배후에 귀천성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과연 저 많은 사람들이 사고에 휘말릴 수 있을까.
남궁진휘의 사고도 사실은 진화 때문에 뒤틀린 것이었다.
어쩌면 비영문의 첫 번째 습격 때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저들 또한 귀천성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왜 저들이었을까.
‘설마, 저들 사이에 그 살성이 있는 건가?’
진화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잠시 후.
진화가 수련도 하지 않고 일행을 보고 있자 남궁구가 진화의 곁으로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남궁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화에게 물었다.
지난번 이후로, 남궁구는 종종 진화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도 역천비록에 대해 생각하는 거야? 제물의 조건인가 그거?”
“제갈무진은 이미 제물의 조건에 대해 기록된 앞부분 연구가 끝났어. 조건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자세히 알 거야.”
“조건을 알면, 먼저 제물을 찾을 수도 있다?”
“어차피 역천비록의 뒷부분과 제물, 둘 다 필요할 테니까.”
“그렇긴 하지만…….”
남궁구는 진화가 그 기억을 떠올리고 있지 않다는 데에 안심한 듯, 웃으면서 진화의 옆에 퍼져 앉았다.
“왜? 저들 사이에 그 살성이 있는 것 같아? 하긴 저 인간들이라면 귀천성이 노릴 정도로 독특하긴 하지.”
남궁구가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진화의 시선을 따라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팽가 쌍둥이. 특이하긴 하지. 저 힘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팽가 쌍둥이가 수련을 한답시고 연무장 바닥 판석을 뒤집고 있었다.
“그런데 쟤들은 살성과는 거리가 멀지 않아? 화는 물론이고 짜증 한번 내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확실히, 팽가 쌍둥이의 기행은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들의 성격 자체는 평화와 안정 그 자체였다.
“게다가 특이한 거로는…… 저 여자가 최고지.”
“아.”
남궁구의 지적에 진화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 나하연이 어느새 팽수의 옆에 가서 판석을 뒤집는 걸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육체적 조건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괴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화의 시선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나하연이 고개를 돌려 진화를 보았다.
그리고 중년 파락호처럼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입술을 내밀다가…….
퍼—억!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라니까!”
당혜군에게 대차게 뒤통수를 때려 맞았다.
“특이하기만 한 거지만. 가끔 저 얼굴에 우리 아버지가 보여, 저 소리 찰진 거 봐라, 큭큭큭!”
당혜군에게 끌려가는 나하연을 보며 남궁구가 킬킬거렸다.
그리고 당혜군을 보며 물었다.
“당혜군은 어때?”
갑작스러운 물음에 진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남궁구의 의도를 알기에 표정을 풀고 웃어 보였다.
당혜군, 어린 나이에도 독심화라 불리는 당찬 무인이라. 여인의 몸으로 당문의 가주 위에 당당하게 도전 중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오라버니인 녹수룡 당혜평도 금의장이 될 정도로 인재였지만, 당가 내부에선 당혜군에 대한 평가가 좀 더 높다고 했다.
“저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지.”
진화는 당혜군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그때, 당혜군이 현오에게 접근했다.
“땡중, 이거 마셔.”
“오, 목이 탔는데 고맙소이다.”
당혜군이 누가 봐도 수상쩍은 차를, 수상쩍은 시점에 주는데, 현오가 그걸 냉큼 받아먹었다.
꿀꺽꿀꺽 잘도 마시는 현오를 보며, 당혜군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돌아섰다.
“저 여자가 정상적이라고? 살성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저 차에 독이 들었다에 내 화창한 미래를 건다.”
“……필요 없어.”
아무래도 당혜군의 독심은, 포기를 모르는 성격을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현오는 이미 백독불침에 달한 것 같았다.
진화의 시선이 현오를 향했다.
특이한 것으로 따지자면 이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일 것이라.
소림의 승려였고, 이름난 무승인 각우의 직전제자였다.
그럼에도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수련이 힘들다고 몰래 산문을 타고 도망 나오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경계심도 없이 당혜군이 준 것을 마시고, 수련은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놀랍도록 강했다.
‘소림승에게 살성이라니, 말도 안 되지만…….’
하지만 문득, 지난 무학제에서 상처 입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무를 즐기던 현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베개를 들고 비영문도들을 터뜨리던 모습.
‘혹시…….’
진화의 눈이 심상치 않게 빛나자, 남궁구도 덩달아 현오를 보았다.
때마침 현오가 진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웃으면서 방실하게 올라가는 볼살이 의심의 싹을 눌렀다.
게다가 저 볼살을 넘어 퉁퉁한 턱살에 항아리를 넣은 듯한 배라니.
“살성이 저 살성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진화의 혼잣말에 옆에서 ‘파핫!’ 하는 남궁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궁 시주, 오늘 무학관 식당에서 만두를 한다는군. 총숙수님의 만두는 못 참지. 어떠신가?”
“……가시죠.”
백발백중 마구니처럼, 현오의 말에 진화가 냉큼 따라나섰다.
현오의 유혹에 넘어간 진화를 나하연이 부러운 듯 쳐다보다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구가 곁에 다가온 남궁교명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너, 저 중에 누가 제일 특이한 것 같냐?”
“남궁진화.”
“그치?”
남궁교명은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살성에는 누가 가장 가까운 것 같냐?”
“…….”
“그치?”
남궁교명은 답하지 않았지만, 남궁구는 답은 들은 듯했다.
* * *
현오의 말처럼, 오늘 무학관 식당의 만두는 맛있었다.
왜 전직 소림 총숙수가 고기만두를 이렇게 잘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성반점에 버금갈 맛이었다.
“애초에 소림 숙수가 고기만두를 내오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고기를 만지는 건 괜찮습니다.”
“하긴. 소림 무승들은 사람을 먹진 않지만 사람을 죽이긴 하잖아?”
“……저 마귀를 물리치소서. 관세음보살.”
뼈를 때리는 남궁교명의 말에 현오가 불호를 외며 고기만두를 먹었다.
식당 한가운데서 열심히 고기만두를 먹는 스님을 신기해하는 이들은, 이 광경을 처음 보는 백의생들뿐이었다.
“고기를…… 드시는군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진화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를 향했다.
칠왕자 한문혜였다.
“아, 송구합니다. 따로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변변치 않아서요.”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 진화에게 예의 바르게 말하자, 그를 경계하던 남궁구와 남궁교명도 떨떠름한 얼굴로 나서지 못했다.
그때, 한문혜를 가만히 보던 진화가 고개를 까딱했다.
“남궁진화입니다.”
“……아! 제가 소개를 잊었군요. 오왕부의 한문혜라고 합니다. 일전에 소란이 있었던 분의 동생 됩니다.”
잠깐 멈칫하면서 눈 끝을 좁히던 표정.
진화는 예의 바른 소개에 앞서 스쳐 간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사과라니 무슨 일입니까?”
“아, 그 형님께서 의선문에 계시니, 저라도 대신 송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문혜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았다.
‘잠시 어울려 주지.’
갑자기 접근한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사과는 괜찮습니다. 이미 대가를 물었습니다. 무림에선 한번 대가를 문 일을 다시 묻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진화의 말처럼, 무림에선 남을 희롱하고 함부로 시비를 걸고 난 뒤, 단지 사과로 끝나는 일은 드물었다.
유감스럽게도 상대가 약자라면 사과하는 일이 없었고, 상대가 강자라면 이왕자처럼 호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진화는 이왕자에게 충분히 대가를 물었다.
물론 진화가 진짜 전달하고 싶은 의미는 그게 아니었지만.
역시나 대답을 들은 한문혜의 표정이 불편한 듯 굳었다.
듣기에 따라 평민이 왕자에게 따로 죄를 물었기에, 사과는 필요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뒤에서 한문혜의 측근들이 발끈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한문혜는 불편해 보이는 표정을 억지로 풀었다.
“그렇군요, 이곳은 무림이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어렵지만 납득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다분히 연출된 모습이라.
그의 의도대로 뒤에 있는 측근들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진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문혜가 진화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도의와 상식에 맞춰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림은 많은 것이 다른가 봅니다.”
진화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한문혜의 눈초리가 고기만두를 먹고 있는 현오를 향했다.
“사람이 사는 곳엔 마땅히 도의와 상식이 먼저라 생각했는데, 제 실수입니다.”
아…….
진화는 한문혜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애초에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대의 기분을 망쳐 버리기에는 말이다.
“이미 대가를 치르고도 사과를 하는 건, 모든 사람들이 과하다고 생각할 일이지.”
진화가 사르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투를 바꾸었다.
감히 자연스럽게 왕자를 하대하는 진화의 모습에, 뒤에 있던 측근들이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진화는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무림도 같아. 아무리 외모가 특출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희롱하면 안 되며, 같은 잘못에 대해 두 번씩 죄를 묻지 않아. 그리고 후배는 선배에게 공손해야 하지.”
싸아아악.
한문혜는 갑자기 등줄기로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신음이 들렸다.
“크윽.”
“으윽! 흑. 머…….”
쿵.
진화를 노려보던 한문혜의 측근들이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문혜가 고개를 들어 진화를 보았다.
진화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마치 그의 속을 꿰뚫고 있는 듯 섬뜩했다.
“다만 무림에선 약자가 많이 불리하지, 그것도 아주 많이.”
진화의 말과 눈빛이 한문혜를 압도했다.
진화가 뭔가 알 리도 없건만, 한문혜는 진화가 뭔가 다 알고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느껴졌고,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 불쾌해졌다.
한문혜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내었다.
그리고 입꼬리가 떨리는 걸 감추며 고개를 까딱이고 물러났다.
“중요한 걸, 배웠습니다. 그럼.”
뒤에서 진화의 시선이 따라붙을세라, 한문혜와 그 측근들이 도망치듯 식당을 나갔다.
그때였다.
허겁지겁 도망가던 한문혜의 측근들 중 하나가 발이 엉킨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한문혜에게 부딪히려는 순간.
한문혜가 눈 깜짝할 새에 발의 움직임을 바꾸고, 차갑게 굳은 인상으로 매섭게 측근을 노려보았다.
“허!”
진화가 콧김을 뿜으며 웃었다.
순식간에 몸에 닿지 않는 거리로 발을 빼고 중심을 찾는 모습.
분명 보법을 밟은 것이었다.
무예에 관심이 높은 이왕자와 달리, 학문에 뜻이 높다던 칠왕자가.
“보면 볼수록 수상쩍은 놈이군.”
진화가 도망치듯 식당을 나가는 한문혜를 보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