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97)화 (97/425)

남궁마제

볼 진(診) 그림 화(畵) : 화룡점정, 최종 제물(3)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화전조차 하지 않는 곳.

밤이 되면 마을에는 연기조차 오르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만 시끄러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일정한 박자로 바람이 지났다.

탓. 탓. 탓.

담벼락을 뛰어넘는 소리가 났다.

산 중 마을에서 유일하게 담벼락이 있는 집.

담벼락에 가렸던 불빛이 비치자, 나무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휙-!

나뭇잎 하나가 창문 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창문이 열렸다.

휙-!

나무 위에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창문 안으로 들어갔다.

“많이 늦었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흑면 흑의의 인영을 질책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벌써 살성의 조건까지 해석했다고? 허허, 제갈가주, 그자가 정말로 역천비록을 보았군.”

제갈무진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눈을 빛냈다.

차갑게 굳은 표정만큼이나 눈빛이 시리도록 날카로웠다.

‘제갈성진…… 그동안 나조차 속이고 있었단 말이지.’

“허허, 재미있구나.”

제갈무진이 날카로운 눈빛 그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문혜에게 서두르라고 전해라. 끝이다.”

제갈무진의 말과 동시에, 검은 인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갈무진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저 녀석의 복귀가 늦었다. 세뇌는?”

“문제없습니다. 지시어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문 쪽에서 나타난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문혜의 정보는 어찌 되었느냐?”

“아직 없습니다. 뻔하지요, 그 뺀질이 놈. 혼자서 아껴 먹고 있을 겁니다. 제가 애들을 좀 풀까요?”

구레나룻부터 턱수염이 풍성한 사내가 잔망을 떠는 모습이 퍽 웃겨 보였지만, 제갈무진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어. 언제부터였을까. 남궁진휘? 애송이가 제법이지만 일의 방향을 틀 정도는 아니야. 역시 제갈가주가 눈치를 채면서부터인가?’

제갈무진은 제갈가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일이 틀어졌다 생각했다.

“일을 서둘러야 한다. 문혜 쪽은 두고, 양주에 전갈을 넣어라. 양주의 구렁이를 압박해서라도 정보를 가져와.”

“양주요?”

사내가 조금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제갈무진이 사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곳을 뜨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한다. 남궁진휘와 제갈후현, 모두 처리해야지. 그건 네 몫이다.”

“오오! 맡겨만 두십시오! 흐흐흐!”

제갈무진의 말에 사내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곧 제갈무진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그 영감도 끈이 좀 떨어진 것 같아서 영 찜찜합니다. 잠시 소식을 끊으라는 연락이 왔지 않습니까?”

“허허, 이놈아, 그 능구렁이가 제왕검의 밑에서 숨죽이고 있던 게 수십 년이다. 잡히면 죽은 듯이 늘어졌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조이고 웅크린 세월이 얼마인데. 놈이 웅크렸다면 힘들기는 하겠다만, 그만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할 위인이 아니다.”

“예. 그럼 밑에 놈들에게 좀 쪼아 보라고 전하겠습니다. 흐흐흐!”

잔뜩 신이 난 사내가 나가고, 제갈무진은 그림자가 던진 나뭇잎을 보았다.

“바람이 불기 전에, 바람을 멈추면 그만이지.”

파스스스.

나뭇잎이 부서져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에 사라졌다.

* * *

바람이 많이 부는 밤.

제갈가주가 창문을 닫았다.

의선문의 별채.

창문 하나 없는 연학원에 비하자면 방비가 느슨하다 싶었지만, 창문 밖에는 적호단원 다섯이 지키고 있었다.

“백매단까지 투입했습니다.”

“좋은 판단이야.”

남궁진휘의 말에 제갈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제갈가주라면 지나는 말로도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제갈가주가 많이 내려놓긴 내려놓은 듯했다.

“군사부 일은 어떻지?”

“괜찮습니다. 아직 문서를 처리하는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요.”

“차차 익숙해지면 늘 일이지.”

가볍게 조언하는 제갈가주의 모습에 남궁진휘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지내니 마치 친구 아버지 같군.’

적대적이지 않은 제갈가주는 생각보다 자상한 상사였다.

만약 제갈후현과의 관계가 지금 달랐다면…….

“일의 속도보다 정확성을 키워. 지난 자재 예산에 오문이 있더군, 어설프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도록.”

아무래도 이 사람과는 잘 지내지 못하리라.

남궁진휘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지금쯤 소식이 갔겠군.”

“세뇌가 통했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당분간은 진짜 정보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정보라…… 그래서 이렇게 군사부 일을 들고 다니면서 의선문으로 출근 중이지 않나.”

제갈가주가 짜증스럽다는 듯 책상 위에 쌓인 죽간들을 보았다.

그런 제갈가주를 보며, 남궁진휘가 책상 위에 죽간 보따리를 하나 더 올렸다.

“수정 예산안을 깜빡했네요. 수정 전의 것을 전부 기억하고 계실 것이니, 대조해서 누락시킨 것을 찾아 주시면 됩니다.”

“…….”

제갈가주가 싱긋 웃고 있는 남궁진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조금 전 남궁진휘가 했던 생각을 그대로 하고 있지 않았을까.

“군사부 첩자의 움직임을?”

“소심합니다. 거기 있는 예산안 숫자만 깔짝거리는 수준이랄까요. 아마 이쪽을 감시 중인 사람은 다른 경로를 통한 첩자인 듯합니다.”

“그렇군.”

남궁진휘의 판단에 제갈가주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휘가 군사부에서 찾아낸 첩자가 아니라 판단했다면, 그런 것이리라.

제갈가주는 적일 때의 남궁진휘와 동료일 때의 남궁진휘를 모두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능력만은 인정했다.

적어도 예민하게 사람을 읽어 내는 것은, 자신보다도 나았다.

남은 문제는, 다른 첩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인지, 어느 쪽에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이랄까.

“다른 첩자는 단서가 너무 없군.”

“모든 사람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의선문에 역천비록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의선문에 접근했을 것입니다. 모든 출입 명부를 보고, 행적을 조사할까 합니다.”

“주변인……!”

“주변……!”

동시에 같은 말을 꺼낸 제갈가주와 남궁진휘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를 외면했다.

“시간이 걸리겠군.”

“개방의 힘을 빌릴까 합니다. 제갈세가의 그림자도 빌리겠습니다.”

“그림자를?”

“제갈무진이 조금 더 급해지겠죠.”

“……좋군.”

남궁진휘가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이고, 제갈가주 또한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랐다.

* * *

정의맹과 의선문을 필두로, 양청현 저자는 마치 폭풍전야같이 아슬아슬하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동안 벌써 큰 전투만 두 번이라, 일각에선 귀천성이 본격적으로 준동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 와중에, 정의무학관만큼은 소란스러웠다.

본격적인 첫 번째 평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아침 식당 풍경부터 티가 났다.

일련의 백의생들이 입구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벌을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뒷짐을 진 손 위에는 절묘한 균형으로 물을 채운 가마솥이 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화 일행이 대수롭지 않게 지났다.

“식당에 독 풀다가 숙수님께 걸렸나 봐.”

“총숙수님?”

“아니, 막내 숙수님.”

“안일했군.”

“막내 숙수님들 근무 시간을 파악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교대 시간을 노려야 하는데. 쯧.”

어쩌면 정의무학관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관주나 무사부도 아닌 숙수들이 아닐까.

없는 곳에서는 황제 욕도 한다고, 관주나 무사부들에 한해서는 ‘대머리 사부, 왕사부, 백발마녀’ 등등 부르는 별칭이 존재했지만, 숙수들에 한해서만큼은 일절 그런 것이 없었다.

오히려 없는 곳에서도 꼬박꼬박 ‘님’ 자를 붙이는 것이.

“역천비록을 정의무학관 식당에 놓는 것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여긴 아무도 못 뚫을 거다.”

농담처럼 던진 남궁구의 말에, 팽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남궁구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작년에 호저문 제자 하나가 땅굴까지 팠는데, 걸렸다잖아.”

“고작 백 근짜리 솥뚜껑을 들지 못해 걸렸지. 수련 부족이었다.”

“그놈이 숙청관 지하도 팠는데, 하필 병 조가…….”

“근성 있는 시주였지, 나 시주 손에 사라졌지만.”

현오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다들 그 사연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습이 제일 효과가 확실했지. 임 조가 시작한 기습이었던가?”

“압권은 병 조지. 독한 여자들.”

남궁구의 말에 진화를 제외하고는 다들 한 번씩 몸을 떨었다.

특히 입으로 독 구슬을 쑤셔 넣던 당혜군의 광기는,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식당과 숙소를 뒤집어 전투를 방불케 한 중독 전쟁부터 편백림을 초토화시키고 시험 중단 사건까지 발생한 마지막 시험까지.

어떤 기수도 그들만큼 매 평가에 사건 사고를 만들진 않았으니.

그들 때문에 이번 백의생들에겐 없던 규정 조항까지 생겼다.

지금도 근처의 백의생과 청의생 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때, 백의생 무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들.”

지난번 도망치듯 식당을 나갔던 칠왕자는 무슨 생각인지 매일 아침마다 진화 일행에게 인사를 해 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진화와 일행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칠왕자는 꾸준히 무림에 대해 배웠다며 겸손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고, 전날 호되게 당했던 이왕자의 측근들 또한 이후로 진화 일행과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

“우리 왕자님은 이렇게 다니셔도 되나? 숙소를 함부로 비우면 큰일 날 텐데.”

“네? 숙소 말입니까?”

남궁구가 먼저 오지랖을 부렸다.

“선배로서 조언하는 건데, 침구나 쓰던 물건들 잘 확인해요. 원한 관계도 잘 파악해 놓고.”

“이런, 숙소에서 독을 쓰는 건 금지되었습니다, 작년 선배님들 덕에.”

조언을 빙자한 남궁구의 선방을 칠왕자가 기다렸다는 듯 받아넘겼다.

“……아하하하, 금지, 규약 이런 거 믿지 말아요, 언제나 악당은 근처에 있으니까.”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긴 방심하면 안 되겠긴 하더군요. 그럼, 식사 맛있게들 하십시오. 선배님들 평가도 잘 치르시고요.”

칠왕자는 저를 지목하는 듯한 남궁구의 충고까지 물 흐르듯 넘겼다.

그리고 일행을 데리고 사라지는 칠왕자의 뒤로, 남궁구가 입을 삐죽거렸다.

“저 재수 없는 놈. 제 형보다 더해.”

“그러면서 왜 매번 말을 섞는 거냐?”

남궁교명이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남궁구가 어깨를 으쓱하며 진화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말을 해야 어떤 놈인지 파악을 하지.”

남궁구를 대신한 진화의 대답에 남궁교명이 놀란 눈을 떴다.

“꽁꽁 숨긴 놈이랑 꽁꽁 숨긴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은 다르거든. 후자는 명백하게 관심을 던져 주길 바라는 거야. 그리고 뭔가를 내보이고 싶어서 안달하지. 뭔가 있어 보이고 싶어서 툭툭 던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신호를 보내.”

“남의 속을 긁는 건 내 특기지.”

옆에서 남궁구가 말을 보탰다.

그게 자랑스러운 것인가 의문은 들지만, 어쨌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남궁교명도 인정하는 바였다.

“뭔가 일어나면 저놈이겠지?”

“확실해지겠지. 놈이 오후에는 제갈세가로 간다던가?”

“왕자들의 임시 거처를 제갈세가로 한다더군.”

남궁구의 말에, 칠왕자의 뒷모습을 보던 진화가 슬쩍 웃어 보였다.

식당을 나온 뒤 인상이 굳어 버린 건 칠왕자, 한문혜도 마찬가지였다.

측근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 한문혜가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며 이필성에게 물었다.

“놈들이 이번에는 청림으로 간다던가?”

“처음 생긴 시험장입니다. 시험장으로 쓰던 편백림은 아직 복구 중이라고 합니다.”

“흥, 제 놈들이 친 사고가 제 놈들에게 화(禍)가 되어 돌아올 줄도 모르고!”

이필성의 말에 한문혜가 코웃음을 치며, 제게 충고랍시고 말을 던지던 남궁구를 비웃었다.

“놈이 최종 제물인지부터 확인한다.”

“그가 최종 제물로 확인된다면, 나머지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기회가 되는 대로 제물은 확보하고 나머지는 죽여야지. 스승님은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시니까. 놈들이 거기서 발버둥 치면서도 당당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한문혜가 가면처럼 매끄럽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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