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볼 진(診) 그림 화(畵) : 화룡점정, 최종 제물(5)
“지금 쫓아가고 있다는군.”
제갈가주가 무겁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하긴, 아니 그렇겠는가.
제갈무진의 흉계에 휘말려 제갈세가가 두 보는 족히 퇴보하였을 것이다.
제갈가주가 세워 놓은 위상이 무너지고, 그보다 더 많은 다른 문파와 세가와의 관계를 잃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 명의 자식을 잃고, 소중한 후계자의 미래를 잃었다.
제 잘못도 없진 않겠으나, 제갈무진의 교묘한 조종에 휘말린 것이 더욱 컸다.
남궁진휘는 제갈가주가 제갈무진에게 이를 갈고, 또 가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식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지…….’
어째서 남궁진휘의 머릿속에 자신의 아버지도 아닌 가문 회의에서 깽판을 부리던 남궁경이 생각나는지.
남궁진휘가 얼른 고개를 털어 버렸다.
“그런데 배신자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갈세가의 배신자, 특히 제갈무진과 연결되어 있다는 배신자는 오로지 제갈가주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
그의 뒤를 쫓기 위해 적호단을 보내긴 했지만, 불안감과 함께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갈가주가 남궁진휘를 보았다.
그의 질문에 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가, 결국 입을 뗐다.
“귀천성은 환술과 세뇌, 암시가 발달된 곳이야. 전쟁이 심화되면서 많은 문파와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혼현마제의 환술과 첩자에 의해 암살당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이후 정사를 가리지 않고 각자 그림자들에게 충성을 강제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장치들을 만들었네. 미리 약속된 암호일 수도 있고, 세뇌나 암시, 혹은 오래전부터 학습된 버릇일 수도 있지.”
제갈가주의 말에 남궁진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루뭉술 말해 주긴 했지만, 남궁세가의 고홍암풍단이나 천리호정단을 생각하면 자세히 물을 필요도 없었다.
예시로 든 것 중 하나가 제갈무진에 의해 깨어지고, 그것을 알아본 것이리라.
실제로 남궁진휘의 추리가 맞았다.
그날따라 그림자의 복귀가 늦었었다.
* * *
“늦었구나.”
대답은 없었다.
그런데 있어야 할 대답도 없었다.
제갈가주의 눈매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말을 걸었다.
“서상아와 장문상단 사이에 연락이 있었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제갈가주는 그림자에 걸어 둔 세뇌가 깨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의사는 소리로 전달한다는 것이 첫 번째, 바람으로 존재와 위치를 알리는 것이 두 번째. 약속과 세뇌, 이중의 장치 중 두 번째가 무너졌다. 놈들이 내 그림자의 정신을 건드렸다는 것이지.’
인간의 정신은 매우 섬세하고 위태로운 것이라.
하나의 강렬한 명령을 세뇌시키면서 정신을 무너뜨리면, 이전에 공들여 놓은 것도 함께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엄청난 기술자가 있어서 기억과 습관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해도, 무의식까지 완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일찍이 전대 가주인 천수현인 제갈길현이 전대 혼현마제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 일차적으로 그림자들이 뚫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제갈가주는 첫 번째 약속 외에도 그림자들조차 알지 못하는 두 번째 장치를 하게 되었고, 이번에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놈이 숨은 곳을 찾아낸다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남궁진휘가 물었다.
그러자 제갈가주가 엄격한 상사의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
“정의맹이 귀천성과 전쟁을 시작한 이래, 이십 년 전부터 하나의 확고한 원칙이 자리해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귀천성에 한해서 이유, 목적, 사유 불문. 언제 어느 때든 적의 죽음을 최종 목표로 한다.”
“……선수필사(先手必死)로군요. 적호단주와 적호단이 대기 중이고, 외부로 나간다면 주작단이 움직일 겁니다.”
제갈가주의 냉정한 엄명에, 남궁진휘가 화답했다.
* * *
붉은 무복을 입은 인영들이 땅과 나무 할 것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저 밟는 곳이 길인 양, 험한 숲을 헤졌다.
“앞에!”
쿵!
“우아악! 멈춰! 젠장!”
땅을 달리던 홍의생들 십여 명이 함정에 빠졌다.
그 위로 몇 명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더 떨어졌다.
“피해!”
파사사삭---!
진화가 남궁구의 팔을 끌어당기자, 남궁구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쇠봉이 지나갔다.
“와, 씨.”
뒤를 돌아본 남궁구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대체 어느 무사부가 제자의 평가에 철봉으로 머리를 노린단 말인가.
“관청에 고발하자!”
“그냥 생사결전을 신청해.”
“그건 내가 불리하잖아!”
진화와 남궁구는 자리로 되돌아가는 철봉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바로 뒤를 쫓아오던 현오가 두 사람을 지났다.
“두 남궁 시주는 입보다 발을 더 빨리 놀리는 것이 어떠시오?”
“따지고 보면 현오 너 때문이야! 오림보다는 낫다며!”
“낫소.”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단언하는 현오를 보며, 남궁구는 대체 오림이라는 곳이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졌다.
다만, 일단 지금은 살아서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것이 먼저였다.
“오옴-!”
쿵!
“크아아악!”
“으악! 도, 도망쳐!”
“망할 대머리 귀신들!”
비명과 고함 속에 원성이 가득한 가운데, 나한들에게 잡힌 홍의생들이 포로로 묶였다.
함정에 걸린 홍의생들은 죽은 것으로 치부되어 무학관으로 돌아갔다.
모두의 부러움을 안고.
“후아!”
몸을 던지다시피 붉은 금줄을 넘어 목표 지점에 들어온 남궁구가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헉. 헉. 진짜 부처님 보고 돌아오는 줄……. 헉. 헉.”
현오는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남궁교명과 팽수, 팽신도 말도 없이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조용히 숨을 고른 진화만 멀쩡한 얼굴이랄까.
갑 조 전원이 목표 지점에 도착한 가운데, 당혜군과 나하연, 하후미미와 새롭게 병조에 합류한 아미파 공경도 눈에 띄었다.
을 조에서는 관서겸과 제갈상만 겨우 도착해 있었다.
“이게 다인가?”
진화의 말에 홍의생들의 시선이 숲을 향했다.
하지만 조용한 숲에선 누가 또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열한 명이군.”
그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에서 누군가가 몸을 날렸다.
쿠-웅!
큰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 이는, 꽤 충격이 있었는지 곧바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끄응…….”
신음을 내며 몸을 뒤집은 이는, 황보정이었다.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 듯 안색이 창백한 황보정의 뒤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붉은 금줄 밖에서 각우를 보며 홍의생들이 비명을 삼켰다.
“하나, 둘, 셋…… 총 열둘이로군.”
목표 지점에 있는 홍의생들을 하나하나 세면서 씨-익 웃고 사라지는 각우의 모습에…….
“……파하!”
“소, 소림승이 뭐 저래!”
“미친! 간 떨어지는 줄.”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고 말았던 홍의생들이, 각자 간과 심장의 안위를 챙겼다.
어쨌든 각우가 총 열둘이라 했으니, 이제 더 나타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적의 추격에서 벗어난 후, 작전 지역을 탈출하는 실습이지만…… 우릴 진짜 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냐?”
남궁구가 얼떨떨한 듯 물었다.
남궁구뿐 아니라, 몇몇 이들은 현오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나한들도 미쳤다고! 돌 집어 던지는 사람까지 봤어. 소림에 정식으로 항의할 거다.”
“이대로 가다간, 민머리만 보면 발작하는 병이 걸릴 것 같아.”
“내가 죽으면 존속살해, 아니 동문 살해죄까지 날 대신해서 물어 주게.”
현오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큰 문제, 다시 저 숲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정에 떨어진 놈들이 부럽군.”
“포로들이 제일 불쌍하지. 의리상 구해 주자고.”
“인심 쓰는 척하지 마, 원래 구해야 하는 시험이라고.”
관서겸의 말에 제갈상이 힘에 겨운 와중에도 딴지를 걸었다.
이번 홍의생들의 평가는 정확하게, 적진에서 최대한 많은 아군을 살려 탈출하는 것이라.
“일단 쉬고 의논해 보지.”
모두들 힘들고 지쳐, 의욕도 희망도 없는 상태라.
진화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번 평가의 가장 큰 문제는, 혼자 탈출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정보가 너무 없군.”
진화가 운을 떼자, 하나둘 말을 보탰다.
“어디 잡혀 있는지도 모르지.”
“사실 난 걔들이랑 별로 안 친해.”
“우린 그들을 모른다.”
“각우랑 나한들도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공격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죽을 정도의 상처까지 내 줄 수 있네.”
“…….”
마지막 현오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조금 쉬고 나서 더 피곤해진 듯, 현오가 눈 밑이 까맣게 꺼진 얼굴을 당당하게 들어 보였다.
물론 모두들 현오에게 심정적으로 공감했다.
어쨌든 그들끼리만, 이곳을 탈출해야만 하는 이유는 많았다.
정보 부족, 친분 부족. 전력 부족.
이상한 이유도 있었지만, ‘생존’을 목표로 한다면 이 자리에서 튀는 것이 정답이었다.
“다들 정신줄 잡아요! 이 평가는 ‘얼마나 많은 아군을 살려서 탈출하는가’라고요!”
당혜군이 모두의 의지를 붙잡았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 수준 차이가 있다는 건 각우도 알아요.”
물론, 그녀 또한 존칭은 없었다.
“상위권 사람들이 목표 지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많다는 걸 각우가 몰랐을 리도 없는데 이런 평가를 넣었다는 건, 핵심이 ‘아군을 살려서’라는 부분에 있다는 거죠.”
진화는 그녀가 왜 당문의 후계로 떠오르는지 이해했다.
사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모두가 다 아는 것이었다.
다만 심정적으로 인정하기 싫은 것일 뿐.
실제 목숨이 달린 상황이면 모를까.
이건 단지, 죽을 만큼 힘든데 딱히 죽지는 않는 시험일 뿐이었다.
평가 점수만 조금 희생하면 되기에, 쉽게 회피하거나 외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회피 욕구를 누르고 모두를 설득하는 당혜군의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절제력이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홍의생장은 진화였다.
“다들 그만하고 모이죠. 어차피 가야 한다면, 빨리 평가를 끝냅시다.”
진화의 말에 모두가 몸을 바로 세웠다.
당혜군의 설득에 심드렁하던 사람들이 단번에 태도가 진지해진 것이다.
“작전은 세워 봤자 무용지물이지만, 숲을 헤쳐 올 때 보면 나한들이 우리를 앞서가진 않는 듯합니다. 그러니 일단 발이 좋은 사람이 앞장서고, 힘이 좋은 사람들이 뒤를 맡죠.”
진화의 말에, 홍의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누군가를 찾았다.
일 년을 함께 보내며 굳이 맞붙지 않아도 서로의 실력과 특징은 알고 있는 사이였다.
특히 갑 조와 을, 병 조 사람들은 조별 대항전에서 서로를 지근거리에서 살필 시간도 있었기에, 쓸데없는 의논 시간은 버려도 되었다.
“저와 남궁구, 나하연이 앞에 서고, 뒤는 팽수, 팽신, 황보정이 맡죠.”
진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황보정만 눈을 크게 뜨고 진화를 보았다.
그에게 중요한 역할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난 편백림 평가에서 단둘이서 팽수, 팽신 형제와 팽팽하게 맞붙었던 이들이 황보정과 단승호였다.
비록 단승호의 폭주로 평가는 끝이 났지만, 진화는 물론 홍의생들 모두 황보정의 강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각우 사부와 나한들, 모두 적이라 생각하고 공격합니다. 죽기 싫으면 우릴 놓아주겠죠.”
“오!”
“그래 선수 필승 하자고!”
진화의 말에 반가운 탄성이 터졌다.
“탈출은 해가 뜨기 전. 인시에 시작합니다.”
* * *
해가 진 직후의 어스름함.
해가 뜨기 전의 어수선함.
인간과 동물이 가장 피로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림에선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나무 위에 빼곡하게 올라섰다.
숲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음?”
잠을 자고 있던 각우가 눈을 떴다.
숨의 밀도가 높아진 느낌이라.
홍의생들의 습격을 예상한 각우가 기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쳐라!”
나무 위에서 어둠이 날아들었다.
각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뛰쳐나갔다.
“침입자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쉬고 있던 나한들과 포로로 잡힌 홍의생들이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쉐에에에엑---!
운이 좋지 않은 몇은, 그저 검은 어둠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모두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