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이를 진(臻) 재앙 화(禍) : 역천의 운명을 가진 이들(1)
진화가 악몽 같은 기억에서 깨어나던 시간.
제갈지현은 새로운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사하시지요. 제 첫째 여식입니다.”
“……제갈지현이라 합니다.”
웃으면서 저를 소개하는 제갈가주의 옆에서, 제갈지현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순간, 제갈지현은 자신이 마치 저자에 진열된 싸구려 도자기가 된 듯했다.
누가 사 갈지도 모르면서 눈길을 끌기 위해 화려하게 채색한 도자기처럼, 새로 산 고운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반질반질 윤을 낸 도자기처럼, 제갈가주의 눈치를 보며 웃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하하하! 상당히 미인이시군요. 본 왕자는 오왕부의 이왕자, 한문태라 하오.”
이왕자는 하후진처럼 크고 강인한 체격을 하고 있었다.
정의무학관 식당에서 남궁진화에게 얻어터진 것이 양청현 저자까지 퍼져 나갔는데, 여전히 거만한 태도였다.
기대한 적도 없었건만, 생각보다 훨씬 더 실망스러운 위인이었다.
음흉해 보였던 칠왕자가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였다.
“일전에 뵈었지요.”
“예. 다시 뵈니 반갑습니다.”
친근하게 인사하는 칠왕자에, 제갈지현이 이왕자에게 한 것처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 두 사람은 먼저 인사를 나누었군요. 하긴 같은 무학관에 있으니, 오가다 만났겠습니다.”
“예, 일전에 소저를 보고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화가 멈추면 분위기가 불편해져 버릴까, 제갈가주가 어색하지 않게 끼어들었다.
칠왕자의 태도 때문인지, 이왕자와 인사를 나눌 때보다는 한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에 이왕자가 불편한 듯 표정을 굳혔다.
“앞으로 두 왕자님이 무학관에서 삼 년 동안 유학하시는 동안, 불편한 것은 없는지 네가 잘 챙겨 드리거라.”
“예, 아버님.”
“하하, 그간 제가 바빠서 대접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서로 안면을 익힐 겸 식사나 함께할까 청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갈가주의 말처럼 오늘은 그저 서로 얼굴이나 보면 될 일이었다.
앞으로 삼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그동안 두 사람 중 누구와 혼인할지 천천히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오왕부에서 왕자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긴 유예기간을 둔 것부터 그들이 그만큼 제갈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
제갈지현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점심을 하고 나오는 길.
퍼억!
“읏!”
한문혜는 유약한 학자답게 갑작스러운 충격에 휘청이며 신음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보니, 이왕자가 심술궂은 얼굴로 한문혜를 비웃고 있었다.
“이 약삭빠른 놈. 내가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고새를 못 참고 쪼르르 달려가서 꼬리를 흔들어?”
“말이 심하십니다.”
애초에 이왕자를 자극하길 바란 것이나, 면전에서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을 당하자니 짜증이 솟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만할 이왕자가 아니었다.
“심하긴 뭐가 심해? 그럼 아니란 말이냐? 여우 같은 새끼. 넌 본래부터 그랬지. 허연 낯짝으로 살살 웃으면서 꼬리 흔드는 것 하나는 잘했잖아?”
“그만하시죠. 나와서는 더욱 입조심이 필요하다는 것, 몸소 느끼고도 아직 부족하십니까?”
“뭐야? 이 새끼가!”
이왕자가 크게 발끈하며 한문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자신은 온갖 심한 말로 비아냥거리다가, 상대가 조금 비꼬는 걸로 흥분하는 꼴이라니.
그런 이왕자의 모습에 한문혜는 그를 상대하고 있는 시간이 무용하게 느껴졌다.
‘무림에 나온 김에 확 죽여 버릴까.’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자랑하는 그 같잖은 체격과 무력 따위, 나의 현이라면 조각조각 베어 버릴 것인데.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애석하지만 이런 모자란 놈이라도 핏줄은 대단한 걸 타고나서, 지금 이왕자를 죽이고 나면 왕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힘이 생기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 더 살려 놔야지.’
한문혜가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한문혜가 팔로 이왕자의 손을 내리쳤다.
퍽!
“윽!”
이왕자는 생각보다 훨씬 아팠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한문혜는 태연하게 이왕자가 구겨 놓은 옷을 정리했다.
“보는 눈도 있는데 자중하시지요. 천박한 건, 피를 타고 내려오나 봅니다.”
“너 이 새끼!”
태복령, 태복령.
그 태복령이 사실 마차를 운영하던 초라한 평민 출신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운이 좋아 당금 황제의 마부가 되어 지금의 자리까지 벼락출세를 한 것이라.
지금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부와 권력은 모두 움켜쥐었지만, 출신만큼은 그의 어리석은 손자조차 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이왕자는 늘 천한 후궁 태생이라며 한문혜를 비아냥거렸지만, 실상 한문혜의 어미는 대대로 명망 있던 지방 호족 출신이니.
‘그래도 태복령이라, 괜히 황실까지 나서면 골치 아파지니까. 힘을 가지고 나면 네놈의 어미와 할아비까지 날려 주마!’
그 힘이란 것을 빨리 가지기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스승의 명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스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빨리 성공시킬수록, 천하는 더 빨리 혼란스러워질 테니.
혼란은 곧 황족들에게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문혜가 꿈꾸고 있는 기회였다.
“제갈가주가 오왕부에 우리에 대한 소식을 전달한다고 했는데. 부왕께서 무슨 연유로 이 만남이 늦어졌는지 궁금해하실 겁니다.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분인데, 형님의 소식을 어찌 전하셨을지…….”
“뭐? 너, 이 씨! 두고 보자! 한 번만 걸려 봐!”
한문혜의 말에 놀란 이왕자가 급해졌다.
무림, 양청현에서 남궁진화가 얼마나 관심이 집중된 사람인지 모르는 이왕자는, 그의 일이 저자에 파다하게 깔린 것도 몰랐다.
하지만 한문혜의 말처럼 제갈가주가 연통을 보냈다면, 결코 제게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알았다.
무림 영웅담에 나오는 악당처럼 다음을 기약한 이왕자가 급히 움직였다.
어머니에게 연통을 보내서, 제갈가주의 전갈을 빼돌릴 작정인 듯했다.
“하하, 멍청하긴.”
설마 제갈가주가 할 일이 없어 그런 사소한 것을 적어 보낼까.
한문혜는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제 말에 꽁지 빠지게 달려가는 이왕자의 뒷모습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짓궂은 면이 있으신지는 몰랐습니다.”
“아, 소저.”
한문혜가 깜짝 놀랐다.
학사에 불과한 그가 제갈지현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전혀요. 재기 넘치는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그런 제가 점수를 좀 딴 건가요?”
한문혜의 너스레에 이번에는 제갈지현이 조금 웃어 보였다.
우위에 있는 형제에게 한 방 먹여 주는 모습이 마음에 든 듯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문혜의 말에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저치보다는 제가 나을 것입니다.”
“……차차 두고 보지요.”
제갈지현이 굳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한문혜를 지나쳤다.
모처럼 좋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리자, 한문혜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렵군.”
역시 친분을 쌓고 나누는 것보단, 거래가 더 편한 듯했다.
* * *
진화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진휘는 급히 정의맹으로 들었다.
진화는 그곳에서 고통스러웠던 부분, 제가 독하게 굴었던 부분은 빼고, 알게 된 정보만을 전했다.
이제 확실해진 것은 제갈세가의 역천비록이 제 것이 아닌, 천살성을 찾는 것이었다.
혼자 남은 뒤, 진화는 동경을 보며 매끄럽게 웃어 보았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이런 것은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아마도 이전 생에서도 천살성이나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 안에 혼돈성이 있다고 했나?’
진화가 동경에 비친 눈동자를 보았다.
동경 안에서도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그 간수들도 악마의 눈이라고 했지. 그건 그냥 내가 그들을 집요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광마도 그렇고, 여기 안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진화가 제 눈을 보며 광소를 터뜨리던 광마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기억해 낸 얼굴.
진화가 지금까지 떠올렸던 얼굴은 이전 생의 마지막 순간, 마르고 늙고, 추악한 탐욕만 남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떠올린 광마는 훨씬 더 젊고 활기찬, 탐욕과 야심이 가득한 모습이라.
“오히려 깨부술 맛이 있겠구나!”
진화가 지금의 광마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웃음…….
어릴 적 간수를 죽이고 싶을 때,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방긋 웃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건가.
속에서 흉계와 살심이 들끓자 웃음부터 나왔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 것조차 감수했던 원한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때.
파지지직--!
진화의 살기에 반응한 것인지, 진화의 눈동자에 뇌기가 번뜩였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랐다.
‘뭐지?’
놀란 진화가 눈을 더 크게 뜨고 제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니, 눈을 크게 뜰 필요도 없었다.
동경 안에서도 빛나던 새까만 눈동자 안에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너무 새파래서 차라리 흰색으로 보일 만큼 환한 번개, 수십, 수백 개가.
“이게 눈 안에 깃든…… 혼돈성?”
한 인간의 안에 우주가 있듯, 진화의 눈동자에도 우주가 있었다.
진화의 눈과 입이 호선을 그리며, 동경 속 진화가 환하게 웃었다.
혼돈성을 알게 되어 기뻤냐고? 아니.
진화가 기뻤던 부분은…….
“써먹을 수 있겠어.”
혼돈성을 먼저 알았으니, 이것으로 적을 농락할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번 대대적으로 첩자를 색출했음에도 아직 남아 있는 적을 모른다.
하지만 적도 아직 천살성은 물론 혼돈성도 알지 못할 테니.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면 그만 아니겠는가.
동경 안에서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이 말하는 선동처럼, 간수가 말하던 악마처럼도 보였다.
‘악마 같은 눈을 했다고? 상관있나. 귀천성을 부수기 위해선 기꺼이 악마가 될 작정이었거늘.’
진화는 동경 속 자신의 얼굴이 퍽 만족스러웠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가끔 못돼 먹은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나 원래 못됐었구나.”
진화가 동경 안의 저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진화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진휘가 곧장 정의맹주를 찾았다.
출발과 동시에 연통을 보내 제갈가주 또한 불렀다.
“천살지체는 천살성을 타고난 자라…… 천살성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 듯하군.”
남궁진휘의 말에 제갈가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궁진휘는 일부러 진화가 혼돈성을 타고난 광마제의 최종 제물이었다는 이야기는 뺐다.
정의맹주라면 몰라도, 아직 제갈가주를 완전하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콩을 콩이라고 해도, 남들보다 비싸게 팔 인간이었다.
“살성이라는 말이 천살성의 그 살성을 뜻하는 거였나.”
“진화의 말로는 거기 있던 모든 아이들이 약을 받아 마셨다 했습니다. 아마도 제갈무진의 비약처럼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괜찮은 약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호, 괜찮은 추측이군. 의선의 말에 따르면 그 비약이 강박과 감정 기복이 커지고 환영을 보다가 실혼까지 유발한다고 했으니, 얼추 살성의 특성들과 비슷한 부분이지 않나.”
“약을 먹여 만들어 놓은 몸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남궁진휘와 제갈가주는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고 경계하면서도, 일적인 부분에서 뭔가 정보를 취합하고 앞으로의 일을 추측하는 데에는 잘 맞는 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그마저도 썩 달갑지 않은 눈치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천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제갈가주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정의맹주를 보았다.
남궁진휘 또한 덩달아 맹주를 보았다.
정의맹주 운현대사는 천살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현대사가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낮게 불호를 외었다.
“부디 굽어살피소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남궁진휘는 운현대사에게 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제갈가주는 그 이전부터 그 뭔가를 눈치채고, 말꼬리를 흐리며 운현대사를 기다린 듯했다.
마침내 운현대사가 두 사람과 눈을 마주하며 말을 꺼냈다.
“소림의 비서에 천살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소.”
“역시……!”
운현대사의 말에 남궁진휘가 탄성을 내었다.
“맹주께서는 천살성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제갈가주가 운현대사에 대해 더 잘 알았다.
제갈가주의 말에 운현대사가 감출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