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이를 진(臻) 재앙 화(禍) : 역천의 운명을 가진 이들(3)
이전 기억을 찾으면서, 진화가 알게 된 것은 천살성과 혼돈성만이 아니었다.
진화가 되찾은 것은 그곳에 있던 모든 것이었다.
광마제의 얼굴, 간수, 환경, 생활하던 것.
거기서 함께였던 이들과 죽은 이들.
그리고 헤어졌던 사람.
현오는 진화가 헤어졌던 사람이었다.
갑작스러운 진화의 말에 놀라는가 싶더니, 현오가 현오처럼 웃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호선을 그린 눈매에, 볼살이 투실투실 올라가 실룩거리고 입꼬리가 내려가듯 활짝 벌어진 얼굴.
“왜 이제야 알아보는 거야?”
현오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처음 보자마자 확신했단 말일세. 그런 인물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흐흐흐흐! 기억을 못 하고 있었던 건가?”
“……많이 변했네.”
이건 진화의 기억 탓만 할 수 없는 거였다.
하마터면 기억을 찾은 뒤에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알아볼 만한 이목구비가 전부 살에 파묻혔으니, 마지막에 눈동자에 떠오른 붉은 환영이 아니었다면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소림에서 뭘 먹었기에 그렇게 살이 찌는 거야?”
진화의 물음에 현오가 피식 웃으며 만두를 들어 보였다.
“자네가 남궁세가에 구해진 것처럼 나도 소림 사백조님께 구해졌어. 이후에 각우 사부님께 거둬져서 쭈-욱 있었고. 아무도 날 죽인다고 하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는 삶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란 말이지.”
“…….”
현오의 말에 진화가 공감했다.
하지만 그게 현오의 말을 납득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진화가 빤히 쳐다보자, 현오가 눈을 눈두덩 살로 덮으며 시선을 피했다.
“사실 내가 ‘그’ 체질이 아닌가. 고기를 안 먹으면 견딜 수가 없네.”
“…….”
진화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현오를 보았다.
그러자 현오가 되려 어디 찔린 사람처럼 필사적이 되었다.
“아, 아니, 진짜일세! ……꼭 피를 봐야 살 수 있다 그런 건 아닌데, 뭔가 한 번씩 주체할 수 없이 살기가 끓어올라.”
이번에는 좀 진지해 보여서, 진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지체 또한 몸 안에 뇌전을 움직이니, 천살지체 또한 그러한 특징이 있으리라.
“살생을 할 수 없으니, 염불을 외고 불도식을 하며 정신수양을 하는 거지. 살생 욕구를 고기로 달래는…… 식욕으로 전환했네.”
“아.”
어쩐지 소림에서 저 땡중을 그냥 두더라.
모두가 가졌던 의문이 이제야 풀렸다.
사실 그동안 말들이 많았다.
현오가 파계가 되거나 각우에게 다리가 부러져도 백번은 부러졌을 일을 태연하게 하고 있었으니. 그러면서도 소림 나한들이 현오를 아끼고, 현오 또한 그들과 정이 깊어 보였다.
그래서 다들 소림이 현오의 집안에 큰 빚을 졌거나, 사실 숭산이 현오 집안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천살지체를 타고난 이유라면, 저 먹을 것에 미친 스님을 소림이 그냥 두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네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네. 무학관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남궁세가에서 살려 주셨어.”
진화를 구한 것은 제왕검이었지만, 진화를 살린 것은 남궁세가의 가족 모두였다.
진화의 말에서 진심을 읽은 현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하네. 뜬금없이 중이 되었지만, 천살의 운명이라니. 차라리 중이 낫지. 게다가 다른 걸 생각할 것도 없이, 소림이 내 가족이네. 사형제들이 내 부모고 형제고 친구지.”
현오의 말에 이번에는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오도 싱긋이 웃어 보였다.
“네가 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둘이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을 거라…… 아니, 자네가 웃을 땐, 간수를 죽였지.”
“네가 손을 잡고.”
“흐흐흐흐! 그립지는 않은 기억일세. 그래서 말인데…….”
웃고 있던 현오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까 그자 맞나?”
천살의 운명보다 스님이 낫다고 하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가 눈 안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매단과 주작단은, 홍의생들 중에 누구인지 모를, 아, 어쩌면 이제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 정의맹주께서 결단을 내렸다면. 어쨌든 정의맹 무사들은 놈들이 노릴지 모를 홍의생들을 보호 중인데, 개방의 제자는 왕자를 훔쳐보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 저놈이라고…… 으드득!”
현오가 한문혜를 향해 이를 갈았다.
살기를 드러내는 현오를 향해 진화가 말했다.
“걱정 마. 조만간 기회가 있을 거야. 내 눈을 보여 줬거든.”
“뭐?”
현오가 진화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럼 아까 급히 간 것이……?”
“놈이 정말 귀천성의 끄나풀이라면, 내 눈을 알아봤겠지. 나인 줄 알고 헐레벌떡 달려갈 거야. 주작단이든 개방이든 걸려 버리라지.”
“허!”
진화가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현오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볼살을 부들거리며 웃었다.
“흐흐흐흐흐, 역시, 남궁 시주는 여전하군. 혹시 진짜로 착해진 줄 알았네.”
“…….”
진화가 현오를 빤히 보았다.
서로 알아본 이후, 진화와 현오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만둣집에 줄 서러 가거나 남들 수련할 때 둘이서 어울린 적이 많았던지라,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후각은? 그것도 천살지체의 특질인가?”
“글쎄. 하지만 아닐걸.”
둘 다 서로가 천살성과 혼돈성을 타고났다는 것은 알지만,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특히 현오는 무공 진전이 빠른 것이나 가끔 살의를 느끼는 것 외는 별다른 것을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제까지 나보다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
현오는 이제까지 놀랍도록 특출난 후각을 천살지체의 특징이라 생각했지만, 진화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모든 감각이 예민한 것도 아니고 후각만 유달리 뛰어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쟤를 봐.”
진화가 남궁구를 가리켰다.
“난 이제까지 저 녀석보다 소리를 잘 듣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하긴 구 시주라면. 혹시 구 시주도 어떤 특별한 체질이 있는가?”
“그냥 특별하게 엿듣는 걸 좋아하지. 취미가 곧 특기가 된 경우랄까. 현오도 먹는 걸 특히 좋아하잖아. 식욕이 곧 감각 개발로 이어진 거지.”
“그런가…….”
“게다가 현오는 지난번 당혜군 낭자가 독향 주머니를 넣어 줬을 때도 몰랐잖아.”
“흠.”
진화는 후각이 특정 부분에만, 특히 먹는 것에만 반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난 사실 나 소저도 조금 의심했었네.”
“확실히, 저 힘은 특별하지.”
현오가 혹여 들릴까 봐 눈치를 보며 하는 말에, 진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팽가 쌍둥이가 오늘도 숙청관과 인내관 바위를 뽑아 들고 연무장을 돌고 있는 가운데, 그 옆에 나하연이 현해관 바위를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너는 혼현마제로 의심 중인 제갈무진이 찾고 있고, 나는 광마제의 제물이었으니까.”
현오에게는 숨길 것도 없었다.
그들은 함께 광마제의 제물 양육실에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듣기로 광마제에게 있던 역천비록은 총 일곱이라고 했어. 어쩌면 더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제갈세가에서 혼현마제에게 회수한 것을 더하면 총 여덟이야.”
“팔현마제가 각기 자신의 역천비록과 제물을 가진 것이라 생각하는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지.”
어쩌면 진화와 현오처럼 특별한 체질이나 무언가로 인해 제물이 될 만한 사람이 더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네가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해.”
“그럼 넌?”
“나는 제갈무진이 가진 역천비록의 제물이 아니야. 칠왕자가 놀라서 달려갔겠지만, 천살지체를 생각하고 나를 봐 봤자, 내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개방에서 칠왕자를 감시 중이었다.
거기에 맹주와 남궁진휘에게 미리 알려 놓는다면, 칠왕자가 귀천성과 접촉하는 것을 놓칠 리 없었다.
제갈무진이 숨은 곳을 알아내면 된다.
그리고 저들이 진화를 노리는 때에 제갈무진을 찾아내 죽인다면, 결국 귀천성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리라.
문제는 남궁진휘, 아니 남궁진혜를 설득하는 것인가.
진화가 남궁진혜를 생각하며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찌푸린 미간에도 불구하고 남궁진휘와 진혜를 향한 깊은 애정은 숨길 수 없었으니.
그런 진화의 모습을 보며 현오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못됐는지, 착해진 건지 헷갈리는군. 관세음보살.”
부디 저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 *
진화의 예상대로 한문혜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번개. 번개가 달랐어. 그 진득한 살기가…… 천지에 떨어지는 벼락 같았다고! 스승님은 내가 그걸 알아볼 것이라 하신 건가?’
한문혜가 쓴 전갈이 나무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전갈을 가져간 교성흑오대원이 길도 없는 숲을 내달렸다.
나무 위 자신들만 아는 현홍사 위를 타고 달리며, 빠르게 숭산 자락을 빠져나갔다.
스슷.
교성흑오대원이 지나가고, 그가 지난 나뭇가지 위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하얀 가면, 하지만 특별히 눈 쪽이 붉은 가면을 쓴 백매단원이었다.
숲을 지나던 교성흑오대를 쫓았던 것이 분명한데, 그가 갑자기 멈춰 버렸다.
급히 따라온 다른 백매단원들이 그의 옆에 모여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백매단원 하나가 급히 물었다.
들키지 않으려 한참 떨어져서 쫓았는데, 여기서 더 거리가 멀어지면 더 이상 쫓기 힘들었다.
사실 이미 놓친 것일지도.
하지만 단원의 물음에, 붉은 눈의 백매가면을 쓴 사내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나뭇잎 속에 살짝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현홍사다. 저걸 밟으면 다칠 것이고, 흑조보와 달리 밟으면 침입자를 알리는 거겠지.”
“아! 단원들에게 현홍사를 건드리지 말고 추적하라 지시하겠습니다.”
“나는 맹에 가서 이 일을 알려야겠다. 놈이 숭산 자락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칠왕자는 잡아들이지 않고요?”
“오왕부의 왕자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단원을 보내서 칠왕자의 감시를 늘려라.”
“충.”
백매단주의 명령에 충실히 답한 백매단원들이 바쁘게 숲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한문혜의 전갈을 무사히 받은 제갈무진은, 전갈을 받자마자 교성흑오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든 현홍사를 끊어라.”
“충.”
쫓고 쫓기는 관계에 생사가 달리게 된 지 오래.
추격술이 발전하는 만큼 그것을 피하는 쪽도 발전을 하게 된다.
“백매단이로구나.”
제갈무진의 기감이 현홍사를 통에 거미줄처럼 주변 숲으로 뻗어 있었다.
물론 그만큼 백매단이 가까이 다가온 것이겠지만, 그걸 두려워할 제갈무진이 아니었다.
“배웅 다녀오겠습니다.”
교성흑오대 또한 겨우 백매단을 피하라 키운 무단이 아니었다.
뇌평이 모처럼의 전투를 반기며 교성흑오대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제갈무진은 곧 산새를 울릴 짐승의 울음과 짙은 혈향을 기다리며 한문혜의 전갈을 펴 들었다.
“……!”
제갈무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저 역천비록의 행방이나 알아 올까 했던 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번개……라고? 뇌평! 뇌평-!”
드물게도 제갈무진이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교성흑오대를 끌고 나섰던 뇌평이 조금 뒤에 급히 돌아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허겁지겁 달려온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제갈무진은 뇌평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놈들에게 속았다! 남궁진휘, 그 앙큼한 것이 나를 속였어!”
남궁진화에 대해 경지를 넘었느니 그렇지 않느니 말들은 많았지만, 무인의 경지라는 것은 본인 입으로도 밝히지 않는 것이 무림의 오랜 관습이었다.
무림에 나가면 실력의 서 푼은 감추라는 말이 있듯, 무위를 감추는 것도 무림인의 중요한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공공연히 떠들어 대지만 앞에서는 쉬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약에 일찍 대해 알려진 것, 비영문의 일이 틀어진 것 그리고 제갈세가에서 발각된 것까지, 그의 예상을 벗어난 발 빠른 움직임들을 남궁진휘의 짓이라고 알고 있었다.
정의맹의 공식적인 보고가 그리 갔으니까.
역천비록을 회수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남궁진휘로 인해 제갈가주가 적극적으로 나서 버린 탓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두 그 애송이 꼬마가 끼어들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스승님!”
“양주에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전하거라! 더 모을 것도 없이, 양주 늙은이를 쥐어짜든, 요구를 전부 들어주든, 아니 남궁 전체를 들쑤셔서라도 그 양자, 남궁진화에 대한 모든 것을 가져오라 해, 전부!”
“충.”
제갈무진의 분노에 뇌평이 굳은 표정으로 움직였다.
‘빌어먹을, 한문혜. 대체 뭘 알아냈기에 스승님이 저러시지?’
분명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는 듯하여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은 스승의 명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