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티끌 진(塵) 될 화(化) : 기꺼이 나쁠 것이라(1)
정의맹 연맹회의.
하나같이 이름난 무림 명사들이 굳은 얼굴로 고심에 빠졌다.
“주작단도 문제지만 남궁세가 직계 영애가 그곳에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느 무사들 목숨이 더 귀하고 덜 귀하고가 아니라, 남궁세가 직계 거기에 적호단, 여인이라는 점에서 저들이 분풀이와 조롱의 상징으로 삼기 쉽다는 것입니다.”
“아직 저들이 모르고 있다 하지 않았소?”
“참으로 송구한 말씀이나, 우리 진혜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아! 흠흠. 시간이 없군요.”
남궁조의 말에 다들 민망한 얼굴로 납득했다.
그 모습에 부군사로서 회의에 참석한 남궁진휘는 굳은 표정은 유지했으나 얼굴색이 붉어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송구합니다.”
“아닐세. 다 맹의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 아닌가. 임무에 나선 무인을 비난하는 법은 없네.”
남궁진휘의 사과에 무당의 장로 운허진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운허진인의 말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귀한 남궁세가의 영애가 몸을 사리지 않고 적호단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정도 무림의 많은 후기지수에게 귀감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상징성을 가진 만큼 지금과 같은 위험성도 커지니.
그런 문제라면 남궁진혜뿐 아니라, 여기 정의맹을 이끄는 이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때, 총군사인 제갈가주가 나섰다.
“남궁세가나, 적호단과 주작단에 적을 둔 무인들을 가진 많은 맹의 동지들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하지만 정의맹이 대처할 방향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귀천성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기로 정하였고, 그들의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과 타협하지 않는 방향에서, 고립된 적호단과 주작단 단원들을 구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갈가주의 말에, 사람들이 남궁진휘를 보았다.
그래도 피를 나눈 여동생의 일이니, 자연스럽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칙에 관해선 정의맹보다 확고한 곳이 남궁세가였다.
다른 세가보다 직계 가족이 적은 곳이었지만, 귀천성과의 전쟁 때부터 타협은 없었다.
“다시 조사단을 꾸릴 것입니다. 진법과 환술에 능한 제갈세가의 학사 한 분과 적호단, 창궁무애단 그리고 당문암호대에서 선발할 것입니다. 추적조가 움직인 경로를 따라 위치를 파악하고, 발견 즉시 기습 작전을 펼칠 예정입니다.”
“위험한 발상이네. 놈에게 들킨다면 잡혀 있는 이들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네. 끔찍하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화산파 장로 육합신검 구선용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기만책을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만책요?”
“조사단이 잘못되면, 조사단의 목숨과 잡혀 있는 추격조의 목숨 모두 위험합니다. 감수할 위험이 너무 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들이 원하는 거래를 하는 척 접촉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당문 대리인인 고독권 당성문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갈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홍의생들 중 천살지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 간 놈들입니다. 아직 맹 내에 첩자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칠왕자로 확신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도 누가 첩자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군사부, 그것도 부군사가 첩자로 밝혀진 데다, 그 외에도 감찰당과 비선당, 명성당 등등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부터 집행부의 실세까지 많은 이들이 잡혔다.
수많은 이들을 아직 심문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추가로 잡혀 오고 있었다.
첩자 색출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언제 끝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허어!”
한쪽에서 탄식이 터졌다.
같은 편을 믿을 수 없어서 더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니.
안타깝고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결국 제갈가주와 남궁진휘가 내놓은 방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아까운 희생이오. 실패했을 경우 대비책은 있는 것이오?”
“없습니다.”
“천살지체라는 그의 정체를 가지고 시도해 볼 수는 없는 것이오?”
“천살지체는 역천비록에 적힌 제물에 관한 것입니다. 귀천성의 역천대법이 정확히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귀천성의 부활에 결정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많은…… 아까운 이들을 잃는다고 해도, 그에 대한 보호가 더 중요합니다.”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아미타불. 조사단을 꾸리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마시오. 그리고 기습 공격에는 실패했을 경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인원 동원합시다.”
“주작단과 적호단, 창궁무애단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무당 현문단을 지원하겠습니다.”
“모용세가 은하대도 합류하겠습니다.”
“화산 매화단도 나서겠네.”
예상대로 남궁세가에 우호적인 세력에서 먼저 나서 주었다.
“군사부에서 최적의 전력을 구성해서 조사단을 출발시키겠습니다.”
제갈가주의 말과 함께, 회의가 끝났다.
회의 결과에 따라, 제갈가주와 남궁진휘가 지휘하는 군사부에서는 무사 하나하나의 신상과 정보를 확인해서 조사단을 파견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다음 연맹회의에서도 보고되지 않았다.
* * *
휘리리리릭---!
“이런! 모두 피해……!”
쉐에에엑!
“적이다-!”
“발각되었다! 모두 철수한다! 신호 보내!”
쉐에에엑---!
챙! 챙!
조사단은 현홍사를 대비하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처음에는 추격조의 흔적을 찾아 움직였고, 흔적이 끊기자 예상 경로를 따라서 조를 나눠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서쪽 계곡을 향해 가던 조사단이 습격을 받은 것이다.
까마귀들의 습격이 시작되고, 조사단은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며 빠르게 숲을 나갔다.
그리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주작단원은 다른 조사조가 있는 곳에 철수 신호를 보냈다.
지이이이익!
쉽게 불이 피어올랐다.
“후우.”
철수 신호를 맡은 주작단원이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철수를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그의 눈에 깜깜한 하늘에 희미한 연기가 오른 것이 보였다.
자신이 피운 것이 아니었다.
“왜……!”
다른 곳도 당한 것인가!
놀란 눈을 뜨는 순간, 두 개였던 연기가 하나 더 늘고, 하나하나 늘더니 마침내 다섯 개가 되었다.
조사단이 나누었던 다섯 조 전부가 신호를 올린 것이다.
쉐에엑--!
“헉!”
챙-!
주작단원이 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그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오는 검은 미처 보지 못했다.
푸-욱!
“큭!”
질긴 가죽이 뚫리는 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주작단원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한 고통에 쓰러졌다.
꿀렁꿀렁 몸을 빠져나가는 피를 막을 힘도 없이 쓰러진 그의 위로, 그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뇌평이 벌써 돌아온 것이다.
“쥐새끼 같은 새끼들이 기웃거리긴.”
뇌평이 죽은 주작단원을 보며 이죽거렸다.
그의 곁으로 교성흑오대원들 몇 명이 내려왔다.
“남은 놈들 전부 처리해.”
“충.”
뇌평의 싸늘한 명령이 떨어지고, 교성흑오대이 바쁘게 움직였다.
스스스스슷--!
새가 날아오르고 고요한 숲이 흔들렸다.
잠시 후, 싱그러운 풀 내음 사이로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일이 끝나고 피 묻은 검을 턴 뇌평이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피를 뒤집어쓴 듯, 뇌평의 온몸이 피 얼룩으로 가득했다.
“또, 또, 성질을 부렸구나.”
“쥐새끼처럼 움직이는 놈들을 보며 전부 찢어 죽이고 싶어져요.”
제갈무진의 타박에 뇌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예상대로 주작단과 적호단, 남궁 놈들에 제갈세가 학사 두 놈과 당문 놈들이 합류했더군요.”
“처리는?”
“보시는 것처럼 지저분하게 했죠, 흐흐흐!”
뇌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옷자락에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온몸의 피를 빼내듯 난도질하고, 살 거죽들은 나무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머리통은 친절하게 입구에 놔뒀습니다. 한 놈을 살려 보냈으니, 놈들이 와서 본다면 깜짝 놀라 겁을 먹을 겁니다.”
뇌평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에 피를 취한 맹수처럼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뇌평을 보며 제갈무진이 자애롭게 웃었다.
“놈들에게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알려 줘야지. 잡혀 있는 놈들 중 몇의 목도 함께 보내거라.”
“오, 팔딱팔딱 제일 싱싱한 놈들로 보내겠습니다!”
제갈무진의 말에 뇌평이 신이 나서 나갔다.
주작단과 적호단이라면 정도 무림 정예 중에서도 정예라.
그들을 죽이라는 명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뇌평을 보며 제갈무진도 피식 웃었다.
제갈가주나 정의맹이 이렇게 나올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정의맹의 머리가 굳은 놈들은 꼭 피를 봐야 칼이 들어온 줄을 알지. 같잖은 명분에 얼마나 많은 목숨을 던질지 지켜보마.”
제갈무진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 * *
조사단으로 갔던 당문 암호대원이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은 그, 단 한 사람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교성흑오대에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교성흑오대와 맞붙은 적이 있었던 남궁진휘가 의문을 표했다.
주작단이나 적호단, 창궁무애단이라면 무위 면에서 그들보다 약간 우위에 있었다. 아무리 기습이라도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감각이 이상했습니다. 방향감각, 아니 감각 자체가 좀 둔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숲 전체가…… 환각에 당한 것도, 진법이 설치된 흔적도 없었는데, 학사들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중이었습니다.”
당문암호대의 말이었기에 더 신뢰가 갔다.
그들은 독이나 암기를 다루기에, 평소에 감각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게끔 훈련하기 때문이다.
“제갈무진이 숲 전체에 뭔가 해 놓은 모양이군.”
“추격조도 어딘가에 그렇게 가둬 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궁진휘의 말에 제갈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휘의 표정이 다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사단이 실패했다는 건 남궁진혜가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살려 보낸 것을 보면, 뭔가 반응이 있을 걸세. 놈이 쉽게 포기하지 못할 거래이니, 추격조를 죽이지 않을 거야. 구출단을 짜 놓고, 반응을 기다려 보세.”
“예.”
제갈가주가 남궁진휘를 위로하듯 말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남궁진휘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진혜야…….’
정의맹에만 의지하여 남궁진혜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화를 보낼 수도 없으니.
‘구출단에 양청현에 있는 남궁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한다! 그래도 안 된다면…… 본가에 급전을 보냈으니, 어른들의 조치를 기다려 봐야지.’
남궁진휘가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며, 어른들의 결정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진화는 그런 희망만으로 기다릴 수 없었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긍정적인 기대일 뿐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생에서 희망을 품고 또 품었지만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죽었다. 그리고 광마제의 대법을 망친 건, 온몸을 터뜨린 자해였으니.
결국 긍정적 기대보단, 극단적인 선택이 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글쎄. 네가 보기엔 무슨 짓인 거 같아?”
한숨을 쉬는 듯 묻는 말.
“본 왕자를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듯싶습니까!”
“나도 알아.”
여전히 태연한 대꾸.
한문혜는 더 이상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없었다.
놀란 마음이 좀 가시자, 수치심과 분노가 일었다.
“이이! 이건 멸망을 불러올 것이다. 아무리 본 왕자가 칠왕자라 해도, 네놈 따위의 목숨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아아아악!”
낮은 목소리로 협박하던 한문혜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발바닥부터 지독한 고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리의 혈맥을 모두 얼려 버리는 듯한 한기(寒氣)가 주는 고통이, 모순적이게도 다리가 타들어 가는 듯한 화상의 고통과 같았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에 한문혜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를 보며, 한문혜를 묶던 손의 주인이 깜짝 놀랐다.
“아,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왕자를 고문하면 어떡해!”
그때, 한문혜의 앞으로 다가온 인영이 여상하게 대꾸했다.
“왕자를 납치도 했는데, 뭘. 안 그래?”
“너…… 남궁진화!”
한문혜가 이를 갈며 저를 노려보는 눈빛에, 진화가 생긋 웃어 보였다.
조사단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화는 인내심이 다했다.
역시 희망이나 기대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이 나았다.
“이 일이 알려지면 정도 무림에서도 지탄받을 거다!”
“알 게 뭐야, 그런 거.”
다시 말하지만, 희망이나 지탄 같은 감정이나 말은 아무도 구해 주지 못한다.
그건 연신 협박을 해 대는 한문혜의 말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