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116)화 (116/425)

남궁마제

티끌 진(塵) 될 화(化) : 기꺼이 나쁠 것이라(5)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극한까지 차오른 긴장과 흥분 속에 있다가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찾아온 평화에 현실감이 사라진 듯했다.

아직도 피를 울컥 뱉어 내고 있는 목 없는 시체.

방금 전까지 움직이고 있던 이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혼자 우뚝 선 소년.

흑단같이 검은 머리칼과 붉은 옷이 축축하게 젖어서 처연한데, 희고 아름다운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것은 붉디붉은 피라.

투명하리만큼 맑은 눈이, 무덤덤하게 보고 있는 것이 죽어 널브러진 시체라니.

소름 돋을 정도로 간결하고 서늘한 장면이라, 평생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무인들조차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여러 무단의 무인들은 경악과 경외를 담고 소년을 보았다.

뇌화공자(雷花公子).

그 별호가 이처럼 어울린다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위태로운 꽃 같은 소년은 천둥 번개처럼 갑작스럽고 위험했으며, 경이로웠다.

진화가 눈을 깜박일 때까지,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경험 많은 남궁조와 모용관천도 마찬가지라.

모용관천은 자못 심각한 눈으로 진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

“진화야-!”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던 기묘한 광경 속으로 남궁진혜가 뛰어들었다.

“괜찮아? 아휴, 더럽게 이게 뭐야? 예쁜 얼굴에 더러운 게 다 튀었네. 이리 와, 닦자! 저 개새끼는 죽을 때까지 똥 뿌리고 쳐 죽고 지랄이야! 아, 물론 우리 진화가 똥 맞았다는 건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언제 다 회복을 한 건지.

남궁진혜가 평소와 다름없이 달려가서 더러워진 진화의 얼굴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궁진혜는 신경질적으로 목 없는 시체는 물론 진화의 주변에 있던 시체들을 발로 걷어차 치우고는, 진화의 얼굴을 붙잡고 문질러 댔다.

그녀가 손을 댈수록 피가 닦이기는커녕 피 칠갑이 되는 듯했지만, 진화는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그 또한 어떤 의미로는 할 말을 잃게 하는 광경이었다.

“허허허, 우애가 좋군.”

“저 미친 망아지 같은 년.”

남궁진혜가 발로 설렁설렁 시체를 치우는 걸 보며, 남궁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인질로 있던 추격조는 몇몇 부상자를 제외하고 모두 무사했으며, 주작단과 매화단이 현홍사에 매달렸던 조사단의 시체도 모두 수습했다.

조각조각 흩어진 그들의 시체는 신변 확인이 불가능해 보였기에, 아마도 한데 모아 화장하여 위령비를 세울 듯했다.

귀천성과의 전쟁에서는 익숙한 장례 방식이었다.

죽은 교성흑오대는 그조차도 없었다.

한쪽에서 교성흑오대의 시체를 한 번에 모아 놓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숫자가 많아서 구덩이를 파서 묻는 건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놈의 시체는 가져가지.”

“저자는 누구입니까?”

“신원은 모르네. 하지만 교성흑오대를 이끌던 자인 듯하니, 의선문 부검대에 올려 보지.”

“알겠습니다.”

남궁조가 뇌평의 시체만 콕 집어 수습을 맡겼다.

“아, 저자의 머리는 저쪽쯤에 있을…… 남궁진혜-! 그거 밟지 마라---!”

남궁조가 기겁하며 막 뇌평의 머리를 밟아 터뜨리려던 남궁진혜에게 소리쳤다.

“인석아! 대체 죽은 놈 대가리는 터뜨려서 뭐 하게!”

“아, 이 새끼 주둥아리를 잡아 째려고 했는데, 그건 못했으니까 이거라고 해야죠!”

“글쎄, 그걸 해서 뭐 하게! 진화야, 여기 이 망나니 좀 데려가라!”

“누님, 그런 짓을 하면 신발 버리십니다.”

남궁조와 남궁진혜, 조용히 서서 누님의 팔을 끄는 남궁진화까지.

남궁일가의 난리를 보며, 주작단주 구격용이 조용히 뇌평의 머리를 챙겼다.

* * *

남궁진혜가 인질로 잡혀 있던 주제에 개선장군처럼 돌아오고, 다른 추격조 일원들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죽은 조사단원들의 장례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가운데, 정도 무림은 귀천성의 악랄한 음모에 다시 한번 승리했다며 자축했다.

하지만 정의맹 수뇌부들은 이것을 결코 승리라고 말하지 못했다.

특히 남궁세가의 분위기가 심각했다.

“네가 위험하게 되었구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남궁도가 세가를 빠져나갔다.”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깜짝 놀랐다.

“남궁도가요? 어떻게요?”

“남궁문이 배신했다는구나. 남궁도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부터 일성상단을 손에 넣고 있었다. 단주인 여주평도 모르게, 모든 것이 일거에 넘어갔구나. 남궁문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척 귀천성과 교류를 하고 있었어. 제왕무적단이 덮치기 전에, 비밀 통로를 통해 귀천성에서 준비한 배를 탔다는구나.”

남궁도가 귀천성과 손이 닿아 있다는 것은, 비약이 나왔을 때부터 의심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제왕무적단을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남궁문이 세가의 분위기를 읽고 먼저 움직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큰아버지께서 남궁문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신 것입니까?”

“아버지도 설마 처자식을 모조리 버릴 줄은 모르신 거지.”

진화의 물음에 남궁진휘가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

정파의 한계였던 건지, 남궁세가의 한계였던 건지.

누구도 임신한 아내와 어린 딸을 버리고 남궁도를 택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놈의 처와 자식은 어찌 되었습니까?”

“일단 잡아들였다. 하지만 버림받은 이들이 뭘 알겠느냐. 어찌 보면 그들이 제일 가엽게 되었지.”

남궁진휘는 버려진 이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을 동정하고 있기엔, 당장 남궁세가에도 불씨가 던져졌다.

“남궁도와 남궁문이 너에 대해 귀천성 놈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제가 광마제의 제물이었다는 걸 알았겠군요.”

“흐음, 제갈무진도 네가 천살지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천살지체를 찾겠지. 그리고…….”

“저 또한 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광마제의 최종 제물이었다는 걸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거기에 생존자는 진화밖에 없었다.

광마제가 제왕검과 다른 고수들에게 당하면서, 최종 제물이었던 진화가 역천대법의 직전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광마전 놈들이 곧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

이전처럼 두렵진 않았지만, 불안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심장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마전 놈들이 저를 찾아올 것입니다.”

이전 생에 그랬듯이.

진화의 눈빛이 사뭇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궁진휘는 그런 진화를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걱정 말거라. 우리가 너를 지킬 것이다!”

남궁진휘가 진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이 형을, 어른들을, 남궁세가를 믿거라.”

단단하게 빛나는 눈.

진화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전 생엔 제일 먼저 죽어 버렸던 주제에 대단히 듬직하게 말한다 싶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음으로써 남궁세가가 강건했다.

이전과 다르다는 건, 이제 그 누구보다 진화가 가장 잘 알았다.

“부검을 하면 나오겠지만, 뇌평이 그 약을 먹은 듯했습니다. 칠왕자 또한 그 약에 손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칠왕자까지?”

“그자, 무공이 꽤 강했습니다. 근육이 그렇게 빈약한데도요.”

“하나 그자가 약에 손을 대었던들 그걸로 뭘 어찌한단 말이냐?”

“그 약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선에겐 해약이 있고요. 귀천성에 충성하는 자가 아니니, 언제고 다시 말이 통할 자입니다.”

“그래?”

일전에도 그러했듯, 눈빛이 미심쩍었다.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한다니, 칠왕자의 약점을 파 봐야겠구나.”

남궁진휘가 눈빛을 달리하며 말했다.

하지만 진화는 칠왕자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칠왕자처럼 신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은 ‘자기 자신’ 그 자체가 약점이라.

진화가 본 한문혜는 누군가를 배신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 자였다.

“그나저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더구나.”

“이상한 점요?”

“양주에 나타난 귀천성도의 인상착의가 네 손에 죽은 자와 비슷하다는구나.”

“누구, 뇌평이요?”

“뇌평?”

“아, 그…… 사람이 일전에 그리 말한 듯합니다.”

아직 귀천성도의 신원이 완전히 파악되기 전이라.

진화가 대충 둘러댔다.

“그래? 어쨌든 숙부님이 본 인상착의와 완전히 일치한단다.”

“그 뇌평이 양주에서 남궁도를 탈출시키고, 또 이곳에 와 있었다고요?”

남궁진휘의 말에 진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뱃길이라지만, 시간상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 * *

일이 정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문혜가 조용히 움직였다.

남궁진화에게 납치를 당한 만큼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제갈무진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멀리서 보면 꼼짝없이 칠왕자로 믿을 만큼 유사한 대역을 두고, 제 측근인 이태성과 차를 마실 시간 동안 급히 움직였다.

뇌평의 일이 실패했다고 들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당분간 여기에 집중하라더니, 난 왜 찾는 거지?’

불안하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남궁진화는 제 일을 덮겠다고 했고, 저 또한 납치에 대한 건 입을 닫겠다고 합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 가옥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피부 위로 따갑게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라.

‘설마 내가 말한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아니야, 괜한 느낌이겠지.’

한문혜가 긴장된 얼굴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리는 제갈무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살짝 안심한 한문혜가 문을 열고 들어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한문혜가 제갈무진에게 숙였던 고개를 드는 순간.

한문혜는 그제야 제갈무진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제갈무진의 앞에, 왜 이제까지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짙은 존재감을 풍기는 사내를 본 것이다.

흉측한 귀면갑을 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의를 입은 사내는, 교성흑오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광마전에서 오신 손님이다.”

“아, 예.”

“이 아이가, 오왕부의 그 아이일세. 자네가 도와줘야 할 아이이지.”

제갈무진의 말이 있고서, 귀면갑을 쓴 사내가 한문혜에게 고개를 돌렸다.

‘헙!’

한문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눈이…… 검어?’

한문혜가 놀란 눈을 뜨고 사내를 보았다.

다시 보아도, 귀면갑 속 사내의 눈이 흰자 하나 없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짐승과 사람의 눈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흰자가 있어서 눈동자의 움직임과 감정을 잘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라. 그런 의미에서 사내의 눈은 짐승과 같았다.

제갈무진에게 상대의 눈을 통해 속내를 잘 읽어 내는 재능을 인정받았던 한문혜조차도, 사내의 눈에서 다른 것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숨이 막힐 듯이 까마득한 악의만 느껴지는 눈은 처음이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남궁진화 그자와 비슷하군.’

두려움을 느낀 한문혜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역시 뇌평이 실패한 것입니까?”

한문혜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저와 경쟁 관계로 스승님의 곁을 떠나지 않던 뇌평이 보이지 않자,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문혜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던 것인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뇌평은 제 임무를 다하고 갔구나.”

“예?”

한문혜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제갈무진을 보자니, 섬뜩한 확신이 심장에 꽂혔다.

‘뇌평이 죽어? 죽었다고?’

평소 서로를 거꾸러뜨릴 생각만 하는 관계였다.

한문혜 입장에선 뇌평만 없다면 교성흑오대 대주 자리는 제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뇌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그의 죽음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문장으로 그의 죽음을 전하는 제갈무진의 모습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한문혜가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속을 숨겼다.

그런 한문혜를 보며 제갈무진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확인은 해 보았느냐?”

“예. 홍의생들을 보호하는 중에, 주작단의 인원이 딸리니 몇몇 인물에게 호위를 집중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몇몇 인물?”

“아무래도 무리를 지어 함께 다니는지라 한 명 한 명 확인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만, 의심되는 이들은 있습니다.”

“그렇다는군.”

한문혜의 말에, 제갈무진이 귀면갑을 쓴 사내를 떠보는 듯 말을 전했다.

“곧 주인이 깨어나신다.”

“오, 광마제가? 허허허, 그거 좋은 소식이군.”

사내의 말에 제갈무진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없으니 전부 죽이고 데려오지.”

귀면갑을 쓴 사내의 광오한 말에 한문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놈들이 정의무학관에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정의맹 한복판에 있는 놈들을 어떻게 전부 죽이겠다는 건지, 대책 없이 오만하기만 한 사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갈무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사내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천하의 광룡귀면대 부대주의 말이라면 믿을 만하지.”

사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한 제갈무진의 반응에 한문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아는 스승은, 질 것 같은 승부는 하지 않는 사람이라.

스승이 저렇게 말했다면 정의맹 한복판을 공격하는 것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가만, 광룡귀면대 부대주라고? 광룡귀면대라면…….’

한문혜도 소문으로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스승의 교성흑오대처럼, 귀천성 팔현마제가 각자 친위 무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광마제의 친위대는 역천마제조차 섬기지 않는, 오직 광마제를 위한 신도들이라. 귀천성에서도 불패의 신화를 가진,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광전사들이라 들었다.

한문혜가 새삼 귀면갑을 쓴 사내를 살폈다.

그때, 사내가 한문혜를 보았다.

“이봐.”

“……!”

“주군의 것을 찾아 줬으니, 상을 주지.”

“……네?”

바보같이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한문혜는 저도 모르게 실룩거리는 입술을 어찌할 수 없었다.

머리로 진화의 말이 스쳤다.

“괜찮겠어, 정파 주제에 나와 거래를 해도?”

“알 게 뭐야, 난 우리 누님만 괜찮으면 돼.”

그래, 나도 알 게 뭐란 말인가.

“곧 소식이 갈 것이다.”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한문혜가 덥석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밑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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