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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132)화 (132/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불 화(火) : 진화의 원수들(1)

진화에게는 복수를 다짐한 자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귀천성이었다.

남궁세가를 멸문시킨 자들.

남궁세가 본가를 습격해서 모두를 도륙한 것은 광마제였지만, 그 외에 무수한 죽음에는 귀천성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전 생에서도 진화는 그들을 모두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 날뛰었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모두 죽이리라! 어떤 죽음도 상관없다! 그냥 매일매일 죽어 가는 날벌레처럼 의미 없는 죽음, 순식간에 찾아온 자비로운 죽음, 지옥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러운 죽음, 그 어떤 것이라도. 그저 놈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 * *

제갈무진의 정체가 혼현마제 무뇌평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무림은 충격에 빠졌다.

정사 연합의 대반격으로 혼현마제, 환희제, 광마제를 죽이고 역천마제에게 부상을 입히며, 마침내 귀천성의 진격을 멈추었었다.

그런데 지금, 광마전의 광룡귀면대가 등장하고 혼현마제까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앞선 모든 승리들마저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정의맹이 술렁이는 와중에 제갈가주가 이틀 동안 칩거했다.

혼현마제가 도망치긴 했지만, 정의맹 또한 혼현마제가 노리던 제물과 역천비록을 지켜 내었으니.

정의맹 소속 문파들 사이에서는 제갈가주와 혼현마제가 ‘한 번씩 주고받았다’ 혹은 혼현마제는 모든 세력을 잃고 도망쳤으니 ‘제갈가주의 판정승이다’라는 평이 다수였다.

하지만 천수현인 제갈길현을 혼수상태에 빠뜨린 혼현마제가 뻔히 제갈세가에서 수십 년을 위장하고 있었던 일은, 제갈가주에게 큰 충격을 준 듯했다.

물론, 광마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진화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진화의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제갈가주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갔을까?”

“도련님은 그게 궁금하냐?”

“그렇잖아. 아무리 적호단의 수가 많았다고 해도, 혼현마제라면 충분히 노릴 수 있었어. 게다가 그런 걸 놓치는 놈들도 아니고.”

진화가 눈빛을 가라앉히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보며, 남궁구와 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갈가주가 안 죽어서 아쉬운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있어.”

“어휴, 독하다, 독해.”

“아미타불, 저 중생은 극락 가긴 틀렸소.”

“…….”

둘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남궁교명이 현오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땡중, 너는 너 자신이나 걱정하지그래? 광룡귀면대 일부가 베개에 머리나 사지가 터져 나가 죽었다던데.”

“헛, 흠흠, 흠, 안 그래도 요즘 백일치성을 드리고 있소.”

“그게 죽은 놈들의 극락왕생이 아니라, 너 좀 봐 달라고 비는 거였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지 않나. 인생은 원래 혼자네.”

현오가 하나 남은 만두를 입에 털어 넣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백일치성을 위해 파르라니 깎은 민머리가 끄덕거리는 고갯짓을 따라 반질거리기까지 했다.

“이 마당에 대단하지 않아? 충격으로 칩거했다면서, 그 와중에 언제 준비해서 제갈 영애의 정혼식까지 진행한대?”

“글쎄, 오왕부에서 불똥이라도 튈까 봐 그러는 걸 수도. 무려 왕자를 잡아 가뒀으니.”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말에, 현오는 왕자를 납치했던 놈들이 할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입에 만두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

왕자라는 말에, 생각에 빠져 있던 진화가 눈을 빛냈다.

“이만 가 보지, 만두도 없는데.”

진화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째 마지막 말이 콱 박힌다. 안 그래, 뚱뚱땡중?”

“음? 앙 오으게스.”

“아이, 땡중! 다 씹고 말해!”

“도련님, 이상한데. 초대받았다고 제갈세가 정혼식에 순순히 간다고? 진짜 구경하고 싶은 게 어느 쪽이야? 아름다운 정혼녀, 아니면 갇혀 있는 왕자?”

남궁구가 진화의 옆으로 바짝 따라왔다.

그리고 그 뒤를 현오와 남궁교명이 따랐다.

“앙궁 시주, 삐졌소?”

“삼키고 말하라고, 넌 밥상머리 교육도 안 받았냐!”

“맞소. 난 부모 얼굴도 모르오.”

“아, 난 그런…….”

“동자승 출신이니, 따지려거든 각우 스승님께 따지시오. 하하하하!”

“야! 이, 씨!”

진화의 주변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언제부터인가 진화의 주변에 그들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 * *

제갈세가.

진화가 귀천성만큼이나 복수의 칼을 벼르던 곳이었다.

남궁세가의 불행을 발판으로 삼았던 곳.

그리고 남궁세가 사람들의 목숨을 방패처럼 휘둘렀던 곳.

그때의 제갈세가는 소가주 제갈지현이 이끌던 곳이었다.

“와아, 정혼녀가 참 곱네.”

“아, 무림 최고의 재녀라는 지당화(智儻花)가 아닌가!”

“왕자님이라니! 허허, 제갈세가가 혼처 자리를 아주 잘 잡았구먼! 여기서 정혼식을 한 번 하고, 이 년 후 왕부에 가서 정식 혼례를 치른다지?”

“자식들이 그리되고, 그나마 제갈가주가 한시름 놨겠구먼.”

비록 미모로 유명한 것은 천상화 나하린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제갈지현 또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평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는 붉은 칠이 닿아서 그런지, 선이 가는 이목구비와 함께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화려한 붉은 옷에 가려지지 않는 가녀리고 꼿꼿한 자태는 단아한 기품이 흘러넘쳤으니.

정혼자의 자리에 서서 인사하는 건장한 사내, 이왕자 한문태의 얼굴에도 오늘만큼은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눈에서 칼 쏘겠네. 왜 그래?”

“아니, 난 그저…… 제갈지현이 제갈세가가 아니라 왕부를 선택한 것이 신기해서.”

이왕자와 함께 미소를 머금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제갈지현을 보며, 진화 또한 스르륵 입꼬리를 말았다.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건가? 제갈후현이 죽지 않았으니, 제갈가주가 너를 소가주 위에 앉힐 리 없지. 앞으로도 실의에 빠져 가문의 실권과 군사부의 일을 맡길 리도 없을 테고. 제갈후현을 안 죽이길 잘했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진화의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맺히자,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진화에게 모여들었다.

술렁이는 분위기에, 제갈지현의 눈길도 진화에게 향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차갑게 내려앉는 눈빛에, 진화가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얼굴이 쓸 만하지. 네게 가야 할 관심까지 앗아 오고 있으니.’

진화 또한 자신이 오늘 잔치의 주인공들에게 가야 할 관심을 빼앗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진화가 그녀에게서 빼앗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고작 사람들의 관심이지만, 앞으로 내가 빼앗을 건 너의 안위와 영달, 네가 바라던 권력, 그리고 미래까지. 이전 생에서 네가 남궁세가 사람들의 목숨을 바치고 얻었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갈세가는 지금의 힘없는 세가로 계속 머물며, 앞으로 진화가 귀천성과 싸우는 데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전 생의 남궁세가가 그러했듯 건실한 후계자도 없이…….

진화의 눈이 한쪽에서 웃고 있는 제갈후현에게로 향했다.

제갈후현은 제갈지현의 혼사를 이곳의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때, 진화의 곁으로 소가주 남궁진휘와 남궁진혜가 웃으며 다가왔다.

“진화야.”

“형님! 누님!”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남궁 소가주님과 남궁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화와 일행 또한 남궁진휘와 진혜를 반갑게 맞았다.

천하제일 남궁세가.

구름이 흐르는 푸른 하늘처럼 청명한 천풍무의를 입은 남궁세가 직계들이 한곳에 모이자, 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쏠렸다.

분위기를 느낀 제갈후현의 웃고 있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저 병신 새끼는 가자미보다 못생긴 게 왜 가자미같이 째려보고 지랄이야.”

“진혜야, 남의 집 잔치에서 소란 피우지 마라.”

“내가 뭘.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저 새끼의 웃는 낯보다 우는 낯을 더 좋아해.”

남궁진휘가 철없다며 남궁진혜를 타박하는 것을 보며, 진화가 조용히 입꼬리를 내렸다.

* * *

남궁진휘가 일행을 데리고 제갈가주와 주인공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남궁구와 남궁교명, 현오는 슬그머니 내빼고 싶어 했지만, 남궁진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소승은 왜…….”

“하하, 맹주님이 오시긴 했지만 소림의 대표로 인사는 해야지.”

“제가 소림의 대표라고요?”

“마라승 각우 님을 초대했는데, 인사는 본인이 가는 거라고 자네를 보낼 거라 하시더군.”

“…….”

남궁진휘가 친절하게 ‘사부가 네게 떠넘겼다.’라고 알려 주고서야, 현오가 입을 다물었다.

남궁진혜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그녀 또한 두 팔이 멀쩡한 옷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 장식까지 당하고 끌려온 차였다.

“남궁세가에서도 왔는가.”

“경사 축하드립니다.”

“직계가 모두 와 줘서 고맙네.”

제갈가주가 예상외로 반갑게 남궁진휘를 맞이했다.

그리고 남궁진휘의 뒤로, 코뚜레에 코가 뚫린 소처럼 줄줄이 딸려 온 이들에겐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 혼사로 제갈세가가 날개를 달겠군요.”

“글쎄. 그것도 남궁세가의 협조가 중요하지 않겠나.”

제갈가주가 오왕부와의 혼사를 그토록 원했던 것은 수로의 유통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양주 쪽의 수로 유통은 남궁세가가 절반 이상을 쥐고 있으니.

앞으로 제갈세가는 남궁세가와 협력을 하든, 경쟁을 하든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눈으로 칼 쏘는 사람들이 또 있었네.”

“……닥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안 들릴 리 없었지만, 남궁진휘와 제갈가주는 끝까지 웃는 얼굴로 대화를 마쳤다.

“축하합니다.”

“하하하하! 감사하오.”

정혼의 당사자들에게도 다들 짧게 한마디씩 전했다.

물론 중간에 진화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때는 분위기가 살짝 얼어붙었지만 말이다.

“우아, 두 방을 치네.”

“미모로 정혼녀에게 한 방, 과거 부끄러운 역사로 정혼자에게 한 방인가. 과연.”

이번에도 남궁구와 현오가 다 들리도록 수군거렸지만, 이왕자와 제갈지현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 못 들은 척하며 웃는 얼굴을 유지해 냈다.

그렇게 화기하고 애매한 분위기 속에 무사히 축하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하필 남궁진휘와 제갈후현이 마주치고 말았다.

“축하……드릴까요?”

“네 축하는 필요 없어.”

“왜요, 여기서 제일 기뻐 보이시는데? 생각하는 대로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뭐야?”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도무지 애매하게 넘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웃으며 시비 거는 남궁진휘와 그 시비를 그냥 넘기지 않고 험하게 받는 제갈후현을 보며, 남궁진혜와 일행이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일행에는 진화도 당당하게 껴 있었다.

“내 면전에서 비웃고 싶었던 거냐? 이제 대놓고 날 무시하고 싶어서?”

제갈후현이 남궁진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물었다.

어차피 제갈후현이 남궁진휘와의 대련에서 폭주하면서 살기를 드러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제는 숨기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내가 왜 당신을 무시하겠습니까? 오해입니다.”

적의를 숨기지 않는 건 남궁진휘도 마찬가지였다.

“오해라고?”

“오해죠. 무시는 업신여기거나 깔보는 건데, 난 당신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난 당신이란 사람 자체를 싫어하거든요. 지금도 상종하기 싫어서 빨리 가려던 참입니다.”

“너……!”

“이제는 두고 보자고 못 하겠죠? 처지가 그러하니. 또, 미친 척하고 덤빌 게 아니면, 이제 길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제갈후현은 후계자 자리뿐 아니라 군사부나 정의맹 요직에서 활동할 기회마저 잃었으니, 이미 두 사람의 경쟁 관계는 제갈후현의 폭주와 함께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진휘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패배자를 한 번 더 짓밟았다.

“우아, 칼을 쐈네, 쐈어.”

“진짜 칼부림 나는 거 아니야?”

“이제는 못 하지.”

진화의 말처럼, 더 이상 제갈가주의 눈 밖에 날 수 없었던 제갈후현이 이를 갈며 물러섰다.

이전 생에서 남궁진휘를 죽이고 결국엔 스스로도 죽이고 말았던 제갈후현이었다.

지금은 그토록 이기고 싶었던 남궁진휘를 두고 혼자서만 몰락한 자신을 보며, 매일 스스로를 죽이고 싶진 않을까.

진화는 한때 제갈의 미래라 불렸던 자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 * *

그리고 또 한 명.

밖이 잔치 분위기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제갈세가의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선 분노에 찬 고함만이 가득했다.

“젠장! 젠—장!”

칠왕자 한문혜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정의무학관 습격이 있은 즉시, 제갈지현과 제갈세가 무인들에 의해 제압당해 구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감히! 감히 날 속여-!”

한문혜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악을 계속했지만, 제갈지현은 손수 그의 혈도를 눌러 내공까지 묶어 두었다.

“나는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어요. 제갈세가를 가질 수 없다면, 왕비라도 될 것이라고.”

“제갈세가를 준다고 했잖아!”

“제갈세가는 당신 따위가 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날 속인 건가!”

“유감이에요, 조금만 더 멍청했더라면 당신을 택했을 텐데.”

“으, 으아아아---!”

제갈지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문혜가 분노를 토했다.

“하아. 하아…….”

한참 고함을 토한 한문혜가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혼현마제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오왕부를 필요로 할 터.

오왕부에는 여전히 혼현마제가 만들어 놓은 세력이 남아 있었다.

“내가, 이대로 끝낼 것 같아? 간사한 계집! 왕부로 돌아가 반드시 복권할 거다. 그래서 너부터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한문혜가 살기를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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