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불 화(火) : 진화의 원수들(2)
검은 관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연무장.
그 앞으로 연단이 마련되어 수십 개의 위패가 올려져 있었다.
모두 지난 전투에서 죽은 이들의 것이었다.
적의 시신과 한데 섞인 시체 조각과 따로 부검을 진행한 이들, 치료 중간에 나온 사망자까지. 시신의 수습이 늦어져 이제야 겨우 장례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희생자들의 장례는 나흘간 정의맹 맹주 운현대사의 주도로 이뤄졌다.
많은 이들이 정의맹 대연무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수십 개의 검은 관이 주는 무게감과 빼곡하게 자리한 위패에 적힌 아는 이름들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데 거기에 흐느낌과 곡소리까지 들리면서, 결국 방문객의 마음까지 진탕시켰다. 수많은 죽음만큼이나 거대한 슬픔이 양청현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런 중에, 진화 또한 남궁진휘, 남궁진혜와 함께 빈소를 찾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빈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진화에게 쏠렸다.
스멀스멀 퍼진 소문이 제법 많이 알려져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와 현오가 귀천성의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대로 소문이 퍼진다면 곧 대부분 사람들이 알게 될 듯했다.
다만 정의맹 수뇌부와 남궁세가에서 걱정하는 부분은, 이번에 진화와 현오를 노리는 귀천성을 막기 위해 벌어진 전투에서 많은 희생이 났기에, 혹시 그 원망이 진화와 현오를 향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의맹 수뇌부는 혼현마제가 정의무학관에서 소란을 피우고 정작 의선문에 직접 나타난 것을 들어, 놈들이 진짜 노린 것은 역천비록이라며 원흉을 돌렸다. 거기에 모두 힘을 합해 혼현마제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죽어 나간 것은 정의무학관에서 일어난 전투라. 여론은 정의맹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려하는 대로 흘러간 것도 아니었다.
“남궁의 소공자가 귀천성 제물이었다며? 좀 불길하지 않아? 남궁과 소림에서는 왜 저런 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예끼! 이 사람아, 그게 정파인으로서 할 소리인가?”
“아니, 나는 그냥…… 저 사람들만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 뭐 그런 거지.”
“귀천성 놈들은 없는 것도 찾으러 쳐들어올 놈들이라는 걸 몰라? 그것보다는 ‘저 공자들이 어린 나이에 고생했네.’ 하고 생각해야지!”
“죽어 가는 정의맹 무사들을 위해서 남궁의 소공자와 현오 스님도 귀천성 놈들과 죽기로 싸웠다며.”
“아, 그 소리도 못 들었나? 귀천성 놈들의 패악질이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하늘이 우리 뇌화공자의 검에 천벌을 내려 줬겠는가!”
“우리…… 뇌화공자?”
“……크-흠!”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남궁진휘와 남궁진혜의 표정이 굳어 갔다.
하지만 진화만은 꿋꿋하게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문파 장로나 대주, 유가족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가며 인사를 전했다.
“영웅의 죽음에 몹시 송구합니다. 영웅의 의기와 용맹에 기대어 목숨을 이어 가는 만큼, 저 또한 영웅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싸우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앳된 기색이 역력한 소년이 눈을 빛내며 진심으로 전하는 인사였다.
게다가 그 소년이 남궁세가 소가주와 함께 올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남궁세가의 직계였으니.
비탄에 젖어 있는 동문이나 유가족조차, 함부로 분노나 원망의 말을 쏟아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진화가 건네는 말이 그 어떤 위로보다 망자의 명예를 드높여 준다며 되레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소공자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제 사제는 하늘에서도 떳떳할 것입니다. 부디 하늘의 순리대로, 사제의 뜻을 이어 강호의 정의를 지켜 주십시오.”
사실, 진화가 죽은 이들의 뜻을 이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죽은 이들 태반이 진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문의 결정에 의해 전투에 나선 이들이었다.
미안해하려면 그들의 윗전이 미안해해야 할 것이고, 죽은 이들에게 어떠한 신념이 있었다면 그들의 사문에서 알아주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 진화는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겪었다.
강호에서 약자는 쉽게 남의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진화는 남궁세가의 든든한 비호로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이전 생에서는 귀천성 제물 출신이라는 게 꼬리처럼 붙어서 그를 정도 무림의 애물단지쯤으로 낙인찍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진화는, 자신의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여론을 상대하는 요령, 남에게 화풀이 당하지 않는 처신, 상대의 원망을 뒤집어쓰지 않는 언변 등을 익혔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진화가 잡고 있던 손을 다시 한번 꼭 쥐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뽀얀 얼굴로 침울한 표정을 하고 나가는 진화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았다.
* * *
진화의 처신은 정의무학관에서도 빛을 발했다.
“와, 엉망이네.”
“오 층은 복구가 한참 걸릴 것 같은데.”
“삼 층 어떤 녀석이 창문을 여는데 머리카락이 붙은 가죽 조각이 떨어져 내려서,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더군.”
엉망이 된 숙청관을 보며,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제로 정의무학관에는 여기저기 부서진 흔적과 뜯겨 나간 벽, 이리저리 흩뿌려진 핏자국 등 아직 채 수습하지 못한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유 모를 휴가를 받았다 돌아온 숙청관과 인내관 관도생들은, 사정을 알고 크게 놀랐다.
숙청관의 난장판을 본 대부분의 관도생들이 시간을 내어 빈소를 찾았다.
많은 관도생들이 죽은 사람들과 사문으로 얽혀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관도생들은 죽은 이들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꼈다.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의 주변 혹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 것이다.
한동안 정의무학관에 불안감과 우울감이 자리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진 퇴관을 신청했을 정도였다.
다행한 것은 그 못지않게 많은 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것이랄까.
“벌써 검기를 한 장이나 발출했다지?”
“초절정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 저 나이에, 정말 대단하네.”
“우리 사형이 적호단에 있는데, 듣기로는 삼 층에서 떨어진 머리 가죽 조각이 현오의 소행이라는데. 진짜일까?”
정의무학관에도 소문은 돌았다.
정의맹 주요 문파 출신에 건너 건너 얽힌 관계라, 밖에서 도는 소문 이상으로 자세한 사정이 퍼져 나갔다.
거기에 많은 이들이 같은 관도생으로서 큰 활약을 보인 진화와 현오에게, 호승심을 느끼거나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진화와 현오가 이번 습격의 원흉이 되는 귀천성 제물이었다는 것에 대해선…….
“저 뚱뚱땡중, 빈소에서 또 퍼질러 앉아서 눈물 콧물 질질 짰다며?”
“눈뜨고 못 봐 줄 지경이었다더군. 점창파 장로님을 끌어안고 통곡하느라, 운현대사 님이 따로 사과까지 하신 모양이야.”
“허! 베개로 귀천성 놈들 대가리를 터뜨려 죽인 놈이…….”
남궁구가 한쪽에서 벌건 코를 훌쩍이며 만두를 먹고 있는 현오를 보며 혀를 찼다.
창궁무애단 선배의 목격담에 의하면, 베개로 사람을 다져 놓는 건 처음 보았다고 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은 포동포동한 볼살이 만두를 씹느라 실룩거리는 것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후덕하니 만만해 보이는 얼굴이 천살성이라는데, 누가 믿겠냐?”
“외모 덕이라면…….”
남궁구의 말에 남궁교명이 말끝을 흐렸다.
한쪽에서 진화가 이를 악물고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나하연과 호명기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진화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나하연이 ‘내 가슴이 더 찢어진다오!’ 하며 수련을 말리고, 진화가 땀을 닦을 때마다 호명기가 ‘공자님, 몸을 혹사시키지 마십시오!’ 하며 수건을 건네고 있었다.
그들 외에도 진화의 뒤에서 수군거리던 많은 관도생들이, 침울한 얼굴로 송아지 같은 눈을 깜박이는 진화와 마주친 이후에는 귀천성의 ‘귀’ 자도 꺼내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외모를 이용하고 있군. 빌어먹을 세상.”
“…….”
남궁구의 욕지거리에, 남궁교명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선 진화가 남궁구와 어울리고 있는 남궁교명을 보았다.
어제, 진화는 남궁진휘에게서 남궁도와 그 일파의 처분에 대해서 들은 것이 생각났다.
‘남궁도와 그 일파라…….’
진화에게 그들은 남궁세가를 불행하게 만든 원수들이었다.
이전 생에서 남궁세가가 힘도 못 쓰고 귀천성에 당한 데에는, 남궁도의 실책이 가장 컸다.
남궁도는 제왕검과 남궁가주가 독에 당한 상태에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썼다.
귀천성과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도, 양주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보다 긍지 높은 남궁세가 무인들을 호위로 쓰며 제 신변만 챙기기에 급급했다.
결국 남궁세가가 본가까지 적의 침입을 허락한 데에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멍청이가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라.
그런데 이틀 전, 남궁도와 그 일파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남궁도의 시신은 묘를 쓰는 걸 허락받지 못하고 들짐승에게 던져졌고, 그의 이름은 족보에서 지워지며 이유까지 명시되었다.
남궁세가 직계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벌이었지만, 제왕검이 그것을 허락했다.
남궁백과 남궁문, 그들의 일가와 수하들은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고, 남궁도의 외척들 역시 남궁도를 도운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대신 전 재산을 배상으로 바치게 했다.
다만 남궁도를 잡는 데에 도움을 준 남궁문의 처와 자식, 처가 사람들은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칼에 남궁도의 심장을 찌른 진화에 비하면 자비로운 처결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진화의 원수들 중 한 축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궁교명을 보는 진화의 눈빛이 조금 복잡해졌다.
진화가 겪은 남궁교명은, 이전의 남궁교명과 같으면서 다른 사람이었다.
본래 남궁교명은 남궁세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 그 점은 이전 생과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결론은 완전히 달라졌다. 진휘 형님이 계시니, 지금의 남궁교명은 세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인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전 생에도 남궁교명은 생면부지 외부인인 내가 아닌 제 손으로 남궁세가를 잘 이끌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전 생에서 남궁도에게 반발하던 것이 과연 권력 다툼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도망만 다니는 남궁도 대신 권력을 잡고 나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남궁교명을 겪으면 겪을수록 의문이 생겼다.
아니, 사실은 진화가 남궁교명의 입장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라.
‘그들의 욕심이나 그들이 한 행동은 이전 생과 같았다. 결과는 달라졌지만 죄가 사라진 건 아니지. 하지만 동시에 남궁경옥의 반성, 남궁문의 변심 그리고 남궁교명이 보이는 신뢰와 충성심도 진짜야. 결국, 모든 것은 남궁세가가 강인해야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줄 뿐이구나.’
진화는 죄는 죄이나, 상황에 따라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또한 남궁교명을 보며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는 자신도.
진화는 남궁교명과 눈이 마주치자, 괜히 쑥스러워서 눈을 돌렸다.
‘이제 진휘 형님은 물론이고 제왕검과 가주님이 굳건하게 계시니까. 게다가 남궁도까지 사라졌으니, 이제 내부에서 남궁세가가 흔들릴 일도 없겠…… 잠깐! 남궁도와 그 일파가 모두 잡혔는데…… 왜 그들 중에 제왕검과 가주님을 중독시킬 만한 자가 없는 거지?’
순간, 진화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남궁도의 수하들과 그 일족을 모두 잡아들였지만, 창천원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이전 생에 제왕검과 남궁가주의 중독은 내부 소행으로 의심받았는데 말이다.
진화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 * *
한동안 역모로 들썩이던 남궁세가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죄인들의 처결이 모두 끝이 났고, 바쁘게 돌아다니던 무사들이 일상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더러 공산 포구에 가라고?”
“정확히는 제왕무적단에서 공산 포구의 일을 맡으라는 거지.”
“그러니까 또 그 빌어먹을 배를 타라는 거잖아! 아, 난 못해, 배 째요!”
남궁가주의 말에 남궁경이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았다.
남궁가주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태연하게 그를 보았다.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형님이 그 악몽 같은 고통을 안다고?”
“멀미로 고생했다는 건 들었다.”
“형님이 날 못 봐서 그래! 배에서 내릴 때, 죽은 남궁도 대가리보다 내 얼굴이 더 퍼렇게 질렸다고!”
남궁경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에 남궁가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그런다. 남궁문의 말로는, 공산 포구에 소실로 전서를 보내는 것이 ‘남궁 지부’의 연락 수단이라는데, 그 말이 영 걸려서 말이다.”
“남궁도도 죽은 마당에 대체 뭐가 걸린단 말이오?”
“이상하지 않느냐, 왜 남궁도가 아니라 남궁 ‘지부’라 하는지?”
남궁가주의 말에, 남궁경도 자세를 바로 했다.
남궁경의 눈빛도 대번에 진지해져 있었다.
“남궁도 말고 또 누가 있을 것 같소?”
“그걸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벌써 튀지 않았을까?”
“일단 접촉해 보아라. 튀었다면 다행이고, 안 튀었다고 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제길…….”
남궁경이 결국 남궁가주가 들고 있는 전서를 가로채며 얼굴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