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불 화(火) : 진화의 원수들(3)
중원오악 중 중악으로 꼽히는 숭산은 소림사가 있어 유명해졌지만, 본래는 소림사가 명산을 찾아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라.
부드럽게 다듬어 놓은 듯한 바위 절벽.
산맥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울창한 숲.
우거진 숲 안으로 흐르는 맑은 물과 세찬 폭포.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을 품어 줄 듯 거대하고 푸근하고.
가까이 들어서면 숨이 막힐 듯 웅장하고 위대하니.
마치 부처님의 품과 같지 않은가.
소림은 그저, 부처님의 품과 같은 거대한 산맥의 산봉우리 하나에 자리했을 뿐이었다.
그 거대한 숲에 숨겨 놓은 동굴이라니.
“실로 운이 좋았군.”
“당가암혼대원이 옥혼진에 걸려들고, 마침 그 대원이 암기를 쓰는 자였다고?”
“예. 갑자기 튀어나온 암기에 놀란 주작단원들이 나무를 베어 내면서 그 암혼대원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베어 낸 나무가 쓰러지면서 못 보던 절벽의 동굴이 나와? 허! 그야말로 천운이로군!”
제갈가주의 감탄에 남궁진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단과 함께 제갈세가와 당문 그리고 정파 무인들을 차출한 일원이 몇 날 며칠을 숲을 헤맸다.
하지만 길도 없는 숲을 헤치며 뭔가를 발견하는 건,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혼현마제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동굴을 찾은 것은, 정의맹 입장에서는 천운이 닿았다고 할 수 있었다.
“동굴에서 비명횡사한 아이들이 천 명이 넘는다라…….”
제갈가주가 쓰게 웃었다.
천 명이 넘는 적이라 생각하면 좋은 소식이나, 그중 태반이 고작 열 살 남짓의 어린 소년들이라 생각하면 웃을 수 없었다.
그때, 남궁진휘가 덤덤하게 말했다.
“귀천성도에게 나이는 따져 무엇하겠습니까.”
제갈가주가 놀란 눈으로 남궁진휘를 보자, 남궁진휘가 피식 웃어 보였다.
“왜요? 남궁세가가 이런 말을 해서 놀랍습니까?”
“아니라곤 못 하겠군. 누구보다 정의로움을 부르짖던 남궁이 아닌가.”
“남궁이 지키는 건, 남궁의 정의입니다.”
“남궁의 정의라…….”
“어느 누구도, 세상 모든 정의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남궁진휘를 보며 제갈가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남궁만의 정의. 저 나이에 저만한 확신과 신념이라…… 후현이와는 격차가 크구나.’
누군들 자기 자식을 욕하고 싶겠냐마는, 제갈가주는 남궁진휘의 뛰어난 점을 볼 때마다 제갈후현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잘못이다. 성과를 바라기 전에 신념을 먼저 가지도록 해 줬어야 했는데…….’
제갈가주의 입안이 썼다.
제갈후현을 남궁진휘와 비교할 것 없이, 남궁가주에 비하자면 저 또한 실패하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제대로 했었더라도 이렇게 되었을지 모른다.
자식 농사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좋은 종자, 기름진 땅, 우수한 기술 그리고 하늘의 뜻이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자식을 몰아붙인다고 제 마음대로 될 리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안 것이다.
“정의무학관 관주님께서 정상 수업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는군요.”
“그거야 예견되었던 일이 아닌가?”
“관도생들을 데리고 숲으로 가고 싶으시답니다. 아직 혼현마제의 옥혼진이 남아 있으니, 귀천성의 진법을 경험하는 큰 교육이 되겠다고요.”
“관도생들이 옥혼진을?”
제갈가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갈세가 연학원의 학사들도 처음에는 해체를 힘들어했던 것이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나름의 체계와 대응법을 마련해 가고 있었지만,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일을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에게 맡긴다니…….
“죽을 위험은 없으니 고생을 좀 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남궁진휘의 표정에 초조함이 떠올랐다.
제갈가주는 이제 남궁진휘의 표정만 보아도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진화, 지난 전투 이후에 제대로 된 몸보신도 아직 못 시켰는데, 또 불편한 숲에서 밤이슬을 맞히겠다니…… 걱정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남궁진휘를 보며, 제갈가주는 말없이 정의무학관에서 온 협조 공문에 허가(許可) 인장을 찍었다.
* * *
웅성웅성.
갑자기 백, 홍, 청의생 모두 대연무장에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거의 이백오십여 명이 넘는 관도생들이 한군데에 모이자, 각자가 떠드는 소리에 대연무장이 시끌시끌했다.
특히 이번 기수 홍의생들, 그중에서도 남궁진화와 홍의십수라 불리는 상위권 관도생들은, 정의무학관 내에서도 유명인사였다.
다른 관도생들의 시선이 몰려든 와중에, 진화와 갑 조 일행도 여느 관도생들처럼 수군거리고 있었다.
“왜 모이라고 한 거지?”
“구, 너도 모르나?”
“글쎄, 나도 들은 바는 없는데.”
그때, 단상으로 수석 무사부들과 함께 정의무학관 관주 나무열이 등장했다.
금룡일권 나무열은 당당한 풍채와 호전적인 성품으로 유명했지만, 정의무학관을 맡은 후로는 공식 행사 외에는 두문불출하던 차였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나무열과 함께 자신들 사이에서 똑같이 대기하고 있는 나하연에게 향했다.
하지만 나하연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관주를 보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자랑스러운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아, 얼마 전 우리 집이라 할 수 있는 숙소가 털렸다. 남들이 집을 지켜 주는 동안 너희들은 편하게 늘어졌겠지?”
지금, 대연무장에 관도생들을 모아 놓고 비난을 하려는 건가.
웅성웅성.
관도생들 사이에서 의문과 변명, 불만이 새어 나왔다.
“닥쳐라--! 실력이 없어서든, 뭐든! 전투에서 제외되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여긴! 앞으로 귀천성과의 전쟁을 이끌어 나갈 예비 영웅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다시 술렁거렸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소리가 작아졌다.
“누구보다 잘 싸울 수 있지 않은가?”
“예-!”
관주의 물음에 관도생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백, 홍, 청의생이라 하나, 경험이 부족할 뿐 귀천성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숲으로 가라! 거기 혼현마제가 만들어 놓은 함정과 진법이 남아 있다!”
“…….”
기세 좋게 대답하던 관도생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록 적은 없지만, 그 손으로 직접 함정에 걸려 보고 진법을 해체해 보면서 부족한 경험을 채운다! 그래서 다음번엔 진짜 적과 맞서라!”
“예-!”
“백의생이든, 홍의생이든, 청의생이든.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정의무학관 관도생이고, 미래에 전쟁을 이끌어 갈 주역이다-!”
“와아아아아--!”
정의무학관주 금룡일권 나무열의 말에 고무된 관도생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관주 나무열과 수석 무사부 각우와 홍채연, 사진명이 흡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야전 실습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부님이 이번엔 또 뭐로 평가시험을 치르냐고 화를 내신 것이 떠오르는군.”
“귀천성이 해 놓은 걸, 털도 안 뽑고 먹겠다는 건가.”
“겸사겸사 그동안 숙소도 고치고 말이지.”
갑 조 조원들이 한심하다는 듯 달아오른 관도생들과 무사부들을 보았다.
“…….”
관주의 연설에 잔뜩 흥분한 관도생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며 같이 약간 고무되었던 진화는, 스윽 붉어진 귀를 가리고 일행의 시선을 피했다.
‘당장 본가에 누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독살 시도라면, 아직 조금 시간도 있고. 일단은 정의맹에서, 광마전 잔당이 숨은 곳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니까. 정의맹의 힘으로 광마전을 칠 수만 있다면, 남궁세가는 어떤 희생도 없이 안전할 수 있어.’
진화는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은 제쳐 두고, 당분간은 무학관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동굴 안은 언제나 횃불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낮인지 밤인지,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끄으…….”
동굴 벽에 박힌 사슬에 양팔이 묶인 채 매달려 있던 사내가 작게 신음을 내었다.
그러자 옆에서 급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경원, 살아 있나?”
“……끄으…….”
생사를 확인하는 물음에, 사내가 목소리를 내려다가 결국 신음으로 답을 했다.
피를 토할 정도로 비명을 지르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으면 됐어. 죽일 작정이 아니면 오늘은 자네가 아니라 내 차례일 테니, 조금이라도 몸을 쉬고 있게.”
“……끄으…….”
“걱정 말게. 버티고 있으면, 며칠은 살려 주겠지. 그사이에 반드시 방법을 찾겠네.”
백매단주 강룡현개 맹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는 옆에서 신음만 뱉고 있던 사내, 호성검 오경원에 비하면 멀쩡한 상태였다.
맹규가 백매단주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아직 그에겐 고문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맹규의 눈이 그쪽을 향했다.
어떤 무늬도 없는 검은 가면을 쓴 거대한 사내 하나와 험악한 귀면을 쓴 평범한 체격의 사내 둘, 그리고 어제 오경원을 고문하던 사내까지 총 네 명이 들어왔다.
검은 가면을 쓴 거대한 사내는 양쪽 어깨에 흑룡의 머리를 한 갑주와 검은 망토를 걸치고 긴 낫과 같은 창을 들고 있었는데, 백매단주 맹규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거대한 월삭은 마룡아? 그렇다면 저자가 광룡귀면대 대주 흑면마룡(黑面魔龍) 무맥이구나!’
백매단주 맹규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귀천성의 팔현마제를 제외하면 가장 잔인한 명성을 달고 있는 사내라.
아미파가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사천의 맹주 사천당문이 싸우기도 전에 본가를 버리고 도망치게 한 장본인이었다.
특히 아미파에서 흑면마룡 무맥과 광룡귀면대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아미파의 본문을 파괴하고, 여승들의 사지를 찢는가 하면 산 채로 내장을 뽑는 등 잔인한 손 속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그 광경을 보고 사천당문이 싸우기를 포기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흑면마룡 무맥은 광마제의 양팔이자 다리라 해도 무방한 사내라.
그는 광마제가 죽었다고 알려진 뒤, 무림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 구천의 마두가 주인을 따라 죽지 않고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혹여 정의맹에 복수를 꿈꾸는 것인가?’
맹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무맥의 시선이 맹규에게 향했다.
“날 알아보았군.”
“……!”
다시 한번 맹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들은 왜 잡았지?”
“요 근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늘었는데, 그중에서 몸놀림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잡아 보았습니다.”
귀면의 사내 중 웅귀의 가면을 쓴 사내가, 마치 산에 있는 작은 들짐승을 잡은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놈이 날 알아보는데?”
“어제 한 놈을 찔러보니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정의맹 백매단 소속이랍니다.”
“쯧. 정의맹 놈들이 냄새를 맡은 건가.”
웅귀를 쓴 수하의 말에 흑면마룡 무맥이 귀찮은 듯 혀를 찼다.
“혼현마제 늙은이가 귀찮은 것을 끌어왔군.”
“그래도 주인님의 물건을 확인한 것은 맞는지, 악수아 부대주가 수하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 그게 언제지?”
“송구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웅사, 네놈도 모른다고?”
“송구합니다.”
웅귀의 가면을 쓴 사내, 웅사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직 광마제만을 따르는 광룡귀면대의 특성상, 주인님의 부재중에 부대주들이 제멋대로 굴던 것이 한두 번이던가.
흑면마룡 무맥은 웅사를 탓하지 않았다.
“혼현마제의 개가 왔다 간 지 보름이 되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니, 애들 몇을 보내 봐라.”
“예, 알겠습니다.”
“단주, 이놈들은 어찌할까요?”
웅사의 옆, 원귀의 가면을 쓴 사내가 백매단주 맹규와 오경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흑면마룡 무맥의 눈이 한 번 더, 맹규에게 향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맹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기 시작하자, 맹규는 뱀이 온몸을 핥는 느낌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어떤 놈들인지 궁금하군. 알아낼 만큼 알아내고 죽여라.”
“충.”
백매단주 맹규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하던 무맥이 금세 흥미를 잃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정의맹의 턱밑에 흑면마룡 무맥이라니! 나가야 한다. 반드시 나가야 한다!’
맹규가 묶여 있는 양팔과 다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 * *
철-썩. 철-썩.
바다처럼 넓은 강은 파도도 바다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우—엑!”
하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배를 탄 남궁경은,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강물을 향해 고개를 박았다.
“우-에에엑!”
“……곧 내장까지 토하시겠군.”
“아니면 남의 내장을 끄집어내시거나.”
남궁경이 난간을 잡고 겨우 버티던 몸을 일으키곤,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창백한 얼굴에 걸음은 비틀거렸지만, 표정만은 살기가 등등하니.
그 모습을 보며 제왕무적단 부단주 남궁해와 고승진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