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불 화(火) : 진화의 원수들(4)
제왕무적단주 남궁경과 부단주 남궁해, 일조 조장인 고승진이 공산 포구에 내렸다.
남궁경은 갓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남궁해와 고승진은 호위무사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요양 가는 주인을 따라나선 느낌입니다.”
“얼굴을 안 가려도 될 뻔했어. 누가 남궁제일검이 저렇게 비실거린다고 상상이나 하겠어?”
“닥……쳐!”
이제야 겨우 단단한 땅을 밟았건만, 남궁경은 울렁이지 않는 땅에 새로 적응해야 할 판국이었다.
속으로는 ‘다신 배를 타지 않겠다.’ 수백 번도 넘게 다짐하면서 말이다.
“저기네요, 도선소.”
갓 아래로 남궁해가 조용히 말하고, 일행은 익숙한 듯 도선소를 찾았다.
큰 포구일수록 배와 사람이 많이 몰려들고, 포구의 수로를 이용하는 배들이 얽히거나 부딪히지 않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큰 포구에는 포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표국과 상회 들이 연합을 맺고, 포구에 상주하면서 배들을 정리하는 도선사들을 두고 있었다.
도선소는 배의 운행을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객이나 승객 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배를 안내해 주거나 간단한 전서나 표물을 보관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남궁경과 남궁해, 고승진이 공산 포구의 도선소에 발을 들였다.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던 중, 남궁경이 딱 한 사람을 찾아 앞장섰다.
-늘 갓을 쓰고 갔다고 했는데, 이 갓을 알아보는 인간은 저놈뿐이군.
찰나에 지나가는 눈빛만으로 단번에 알아보았다.
남궁경이 극심한 뱃멀미에도 불구하고 수하들을 보내지 않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남궁경이 한 청년의 앞으로 가자, 청년이 시원하게 웃으며 남궁경을 맞았다.
“요번에는 좀 늦으셨네요!”
남궁경이 말없이 전서를 내밀었다.
모두 남궁문에게 들은 대로였다.
“소실 맞지요?”
청년이 전서를 분류하면서 하는 말에, 남궁경이 준비한 동전 한 푼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 남궁문의 말대로라면 두말없이 동전을 집었어야 할 청년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게 아닌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청년이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참…… 저번에 남궁 지부의 다른 분이 은자 하나를 주고 가셨어요.”
‘다른 놈이 왔다 갔다고?’
청년의 말에, 갓 아래로 남궁경의 눈이 커졌다.
그걸 모르는 청년은 오랜만에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기분이 좋아진 듯 말을 이었다.
“은자 하나면, 전서함 보관비를 하고도 여섯 달은 거뜬하죠.”
있지도 않은 전서함 보관비를 들먹이는 건, 봐줘야 한다.
청년은 남궁경이 알아차리기 전에 은근슬쩍 넘어갈 속셈이었다.
“솔직히 찾아가는 사람이 몇 달이나 안 나타나는…… 어어? 커헉!”
기분 좋게 말을 있던 청년은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리고 놀랄 새도 없이 멱살이 잡혀 몸이 떠올랐다.
“컥!”
찢어질 듯 커진 청년의 눈에, 사나운 맹수와 같은 눈동자가 들어왔다.
순간, 청년은 심장이 멈춘 듯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런 청년의 귓가에 맹수가 으르렁거렸다.
“야, 방금 한 말,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봐.”
눈앞에 있는 사나운 맹수 같은 사내의 한 팔에 온몸이 딸려 올라갔을 때는, 청년은 차라리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흐윽. 흑…….”
“그만 울어! 누가 뭘 했냐?”
눈물을 빼는 청년을 보며, 남궁경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덩치 크고 시커먼 청년이 순결을 잃은 아가씨처럼 다소곳하게 앉아서 울고 있는 건, 눈알을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결해 보였다.
“정리 좀 하자. 그러니까 소실로 온 전서를 가져가는 놈은 안 온 지 석 달이 넘었다고?”
“흐윽. 예.”
“그런데 전서를 주고 간 놈은 그걸 알고?”
“흑……!”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남궁경은 다시 울컥 열이 받았지만, 꾹 참았다.
기절한 걸 깨웠더니 가족이라도 죽은 듯이 우는 걸 겨우 달래 놨는데, 그 짓을 또 반복할 수는 없었다.
“전서를 가지고 오면 주는 돈이 쏠쏠하니, 전서 가져가는 놈이 사라졌다는 걸 말 안 했다는 거지?”
“흑. 흑…….”
“야 이, 씨! 대답을 하라고!”
“으아악! 예! 예, 그렇습니다! ……흐흑! 허-엉!”
“야, 아니, 그러니까…… 아, 씨. 이걸 목청을 따 버릴 수도 없고.”
“흐어어어엉!”
결국 폭발한 남궁경이 청년을 울리고 말았다.
한쪽에서 남궁해와 고승진이 있는 대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청년과 남궁경을 째려보았다.
남궁경은 한숨을 쉬며 청년이 충분히 울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간 지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우리가 오기 얼마 전에, 어떤 놈이 와서 남궁 지부라며 은자를 주고 갔단 말이지?”
“흐윽. 예…….”
“그게 언제야? 복장이나 외모는 기억하나?”
“흑윽. 그냥, 그냥 귀한 나리 옷을 입었고…….”
“귀한 나리 옷?”
“나리들이 지금 입은 옷 같은 것요. 킁.”
청년은 눈이 부어서 앞이 안 보이자, 이제 좀 덜 무서운지 말을 길게 이어 갔다.
“지금부터 사흘 전에 왔는데…… 까만 얼굴에 광대가 좀 튀어나와 있었고, 나머지는 갓을 써서 잘…….”
“잘, 뭐!”
“모르겠습니다. 흐어어엉!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킁! 공돈이나 좀 벌려고, 흐윽! 여기 도선사들 다 하는 것인데요. 흐어어어엉---!”
청년이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남궁해와 고승진은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남궁경의 인내심은 드디어 한계에 달했다.
“아우- 씨! 못 해 먹겠네! 야, 얘, 챙겨! 화공 하나 불러서 그림으로 그리게 해! 빌어먹을, 도무지 말이 통해야 말이지!”
남궁경이 고함을 질렀다.
남궁해와 고승진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흑! 왜…… 으아악! 살려 주세요! 다 말할게요! 아니, 다 말했다고요! 흐어어어억!”
청년은 제왕무전단 단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비명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남궁경이 완전히 질린 듯 한숨을 쉬었다.
몇 달째 전서를 가져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앞으로 다시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혼현마제가 정의맹에 쫓겨 세력을 잃고 모습을 감추었다니, 잠깐 동안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동안, 혼현마제가 추격을 방지해 남아 있는 연락망을 모두 끊을 수 있었다.
남궁경이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개새끼! 우리 진화한테 광마전 개들은 보내? 애를 그만큼 괴롭혔으면 됐지!’
남궁 지부.
말 그 한마디에 혹시나 확인만 하자는 생각이었건만, 이로써 정말 세가의 안이든 밖이든, 귀천성의 첩자 놈이 또 존재한다는 것은 알아내었다.
본인들의 안위나 세가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경이나 남궁가주로서는 세가 안에 있는 첩자나 공산 포구에 있는 귀천성도를 잡아서, 진화의 코앞에 닥친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전서를 가져가는 놈이 사라졌다 하니…….
‘하루라도 빨리 첩자 놈을 잡아서, 혼현마제를 찾아야지. ……젠장! 감히 세가를 배신한 놈이 또 있다니!’
잘 눌러 오던 분노가 터지듯, 남궁경의 눈빛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 * *
푸-욱!
“컥. ……커……헉…….”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비명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목에 박힌 쇳조각을 잡고 쓰러졌다.
목에 박힌 쇳조각을 빼자, 바닥으로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끄득. 씨발!”
방금 사내의 목에 쇳조각을 꽂아 넣은 인영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독기로 가득한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 움직이던 눈이 다시 바닥에 쓰러진 사내에게 향했다.
“크윽……!”
죽은 사내의 품을 뒤지는 중, 인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스름한 횃불 빛에 보이는 등은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살가죽이 너덜너덜하다시피 찢어지고, 한쪽 손은 완전히 우그러진 듯 움직이질 못했다.
고통을 참고 겨우겨우 한쪽 손으로 열쇠를 찾은 인영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횃불 아래 나타난 얼굴도 심하게 맞은 듯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부어오른 상처조차 백매단주 강룡현개(江龍賢丐) 맹규의 맹렬한 눈빛은 가리지 못했다.
“경원아, 괜찮냐?”
“예. 살아는 있습니다.”
“달릴 수 있겠냐?”
“겨우 살아만 있다니까…….”
“새끼! 고생했다. 일어나라, 나가자.”
맹규가 죽은 듯 매달려 있던 오경원의 사슬을 풀었다.
곧 숨이 끊어질 듯하던 오경원도, 사슬을 풀자 제 발로 조용히 땅에 내려섰다.
“자.”
맹규가 오경원의 앞으로 환알 하나를 내밀었다.
오경원이 망설임 없이 환알을 씹었다.
“이거 어디에 숨겨 뒀던 거예요?”
“알면 뱉고 싶을 텐데?”
“……젠장.”
맹규의 농담 아닌 진담에 오경원이 사약을 먹듯 환알을 삼켰다.
그리고 옷자락을 조용히 찢었다.
찌이이이이…….
“운공이나 할 것이지, 바쁜데 뭐, 아야. 씨댕아…….”
오경원이 맹규의 우그러진 손에 철판 하나를 받치고 단단하게 감았다.
맹규는 뜻하지 않은 고통에 크게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촉촉해진 눈으로 오경원을 째려보았다.
“비명 하나 없이 자기 손을 부순 인간이 엄살은.”
“그건 승매환(昇魅丸)을 먹고 한 거지, 개새끼야!”
“거짓말은. 방금 내가 먹은 건, 보약입니까? ……됐어요.”
오경원은 제게 승매환을 주기 위해 맨정신으로 자신의 손을 부순 단주를 진지하게 보았다.
백매단원들은 일급 이상의 위험한 침투, 잠입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승매환이라는 환단 하나씩을 지급받는다.
의선문에서 특별 제작한 환단은 고문을 견딜 수 있도록 고통을 둔화시키고 순간적으로 기력을 낼 수 있도록 양기를 끌어 올리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고문을 견디고 탈출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은 고통 없이 죽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고맙습니다.”
“닥쳐.”
이틀간의 고문을 견디느라 자신의 승매환을 쓴 오경원을 위해, 맹규가 자신의 것을 아껴 두었던 것이다. 본인은 죽기 직전의 채찍질과 뼈를 부수는 고통을 그대로 견디면서 말이다.
오경원의 눈에 눈물과 함께 독기가 차올랐다.
“기운 좀 차렸냐?”
“예.”
“그럼 순식간에 앞에 있는 놈들 처리하고 오지게 튀자.”
맹규와 오경원이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푹!
“컥!”
“뭐…… 윽!”
사슬을 고정하던 쇠못을 감옥 밖에 있는 간수의 목에 꽂아 넣은 두 사람은, 그대로 달려서 창을 통해 뛰어내렸다.
풍---덩! 펑!
갑작스러운 물소리에,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귀면을 쓴 사내들 몇이 감옥으로 뛰어왔다.
“이런, 탈출이다---! 놈들이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광마전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 * *
백의생, 홍의생, 청의생까지.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이 넓은 숲으로 흩어졌다.
조별로 나눠진 관도생들에겐 주작단원 둘과 제갈세가 학사 혹은 당가 암혼대원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이상하네…….”
“어디, 저쪽?”
“아니, 방금까지는 이쪽이었는데, 이제는 저쪽에서 더…….”
현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남궁구가 가는 눈초리로 현오를 째려보았다.
“다시 제대로 냄새를 맡아 봐.”
“잠깐, 구. 자네 자꾸 나를 사냥개 취급하는 듯한 느낌이네만?”
“사냥개는 무슨. 걔들이 얼마나 날씬한데. 그러니까 우리 뚱뚱땡구, 헛꿈 꾸지 말고 어서 냄새나 맡아요. 풀냄새가 안 나는 곳이 어디예요?”
“으으. 내가 참는다. 아미타불, 관세음님, 저놈 보세요…….”
현오가 남궁구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진화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그들을 모르는 척했다.
뒤에서는 주작단원 둘과 학사 한 사람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허허, 참. 실로 연구 대상이로군.”
“하하하, 그렇죠? 설마, 옥혼진의 입구를 냄새로 찾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홍의생 갑 조는 현오의 덕에 우수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설마 냄새로 은밀하게 숨겨진 옥혼진을 찾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옥혼진은 일부러 일정 공간의 기운을 어그러뜨림으로써 숲의 기운으로부터 동떨어지도록 만든 것인데, 현오는 그 점을 반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짙은 숲 내음이 풍겨 오지 않는 곳을 냄새로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앞은 옥혼진인데…… 왜 이쪽에서 피 냄새가…… 어어, 저기!”
현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피 냄새를 말하는 순간, 갑자기 가만히 있던 진화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도련님-!”
“남궁 공자!”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재빨리 진화의 뒤를 쫓고, 현오와 팽가 형제도 뒤를 따라갔다.
당황한 주작단원들도 한 사람이 학사의 곁에 남고 급히 뒤를 쫓았다.
정의무학관 평가 중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하다니.
낙제점을 각오하는 것은 물론,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장소이니만큼 정의맹에서 돌발 행동만큼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진화가 달려 나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느낌, 이 기운……!’
평생을 쫓았던 느낌이었다.
피가 눅진하게 달라붙는 듯한 기운.
‘광마전 놈들이다!’
진화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숲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