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과거와의 조우(1)
과거.
남궁도와 가주 위에 오른 남궁교명이 본가를 영성현으로 옮길 때였다.
남궁세가는 남은 세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맹에 도움을 요청했고, 맹에서는 백 명의 무인을 보내 주었다.
많은 수였지만 충분하진 않았다.
겨우겨우, 딱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만 보였달까.
쉐에에엑---!
파지지지직---!
“크아아악!”
바닥에 쓰러져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놈들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그리고 뇌전을 흘려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목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던 놈들은 곧 재로 흩어졌다.
그런 진화를 향해 같은 정의맹 무인들조차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남양으로 임무를 나온 정의맹 무인들 중 진화에게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매번 사방에 피를 뿌리며 난도질을 하거나 뇌전으로 고문하듯 귀천성도를 죽이는 진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출신은 못 속이는가 보군. 저리 악독한 손 속이라니!”
“허어, 남궁세가에서 일어난 비사를 듣지 않았나. 지금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다 저자 때문이지!”
“허어, 이 사람이 그래도! 듣겠네!”
소곤거려도 다 들리는 소리, 조금 더 크게 말한다고 더 거슬리고 하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멸문은 다 재앙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저 때문이니까.
그저 당장 빌어먹을 제 목숨을 끊을 수 없으니, 화풀이하듯 저놈들이라도 죽여 대는 것뿐이었다.
진화는 그저 묵묵하게 검에 묻은 피를 닦았다.
“남궁세가도 멍청하지.”
멈칫.
“요즘 같은 세상에 불쌍하다고 거둬 줬다니 말이 되나?”
“이, 이봐,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되나? 청성도 이전에 남궁세가의 도움을 받았잖나?”
“그러니까! 제왕검만 믿고 오만했던 게지. 도와줄 여력도 없으면서 나서길 왜 나서? 그렇게까지 하면 누가 고마워할 줄 알고. 따지고 보면 남궁세가 때문에 지금 다 이렇게 고생이잖아! 그때 진 빚 때문에 이런 곳까지 와서. 그 잘난 제왕검도 독에 당해서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왜, 왜? 헉!”
진화가 마음 놓고 떠들던 사내의 뒤에 섰다.
그리고 적의 피를 잘 닦아 놓은 검을 사내의 목에 겨누었다.
사내는 청성파 현문대 부대주로, 남궁도에게 재물을 바치고 남궁세가 무인들을 빌려 간 자였다. 그리고 일전의 전투에서, 진화의 뇌막 뒤에 숨어서 목숨을 보존한 자였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이게 무슨 짓 같은데?”
진화가 검을 사내의 목에 조금 더 가까이 찔러 넣었다.
챙-! 챙--!
주변에서 검을 빼 들었다.
그것을 보며 당당해진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자가 미친 게요! 미친 게 분명하오! 뭣들 하시오? 이자를 붙잡지 않고! 내 이 일에 대해 정의맹과 남궁세가에 반드시 따져 물을 것이오!”
소리를 지르는 사내를 보며, 진화는 잠시 그의 목을 날려 버리는 상상을 했다.
이자를 죽이면 주변에 모든 이들이 나를 공격할까.
그럼 주변 모든 이들을 죽이면?
미친 것이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궁세가에 기대어 남궁세가를 갉아먹은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진화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상상을 하며,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적이다--!”
마침 잘되었다.
진화가 검을 돌려 뇌기를 발출했다.
퍼---엉!
벽을 부수고, 그리로 밀려 들어오는 귀천성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쉐에에엑----!
스읏-!
살아 숨 쉬는 놈들의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기에, 닥치는 대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었다.
쉐에에에엑--!
“아아악!”
손가락, 팔, 다리…….
머리통이 높이 날아가 떨어졌다.
허리 위가 잘려 나간 누군가의 하체가 내장을 줄줄 흘리며 서 있고, 목을 잃은 시신은 바닥을 구르며 피 비를 뿌리고 있었다.
가주님, 누님, 사방에 널려 있던 가솔들의 죽음처럼.
비릿한 혈향이 온몸을 적시고 눈앞까지 가렸지만, 그날의 비극을 돌려주려는 듯 진화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푸른 번개가 치는 진화의 눈에, 방금 전까지 진화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내가 귀천성도의 검에 허겁지겁 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다.
마치 도와 달라는 듯 진화를 향해 애원하는 눈빛.
진화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에엑-----!
진화는 귀천성도와 사내, 두 명 모두를 베어 버렸다.
베고 또 베었다.
그날의 생존자는, 또다시 진화 한 사람뿐이었다.
사람들이 더욱 수군거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날 진화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검을 얻었으니까.
진화는 복수를 갈구했다.
남궁세가를 나락에 빠뜨린 놈들의 목을 치고, 남궁세가의 불행을 밟고 선 제갈세가는 주저앉히고 싶었다.
제갈지현을 어두운 방구석에서 비참하게 썩어 가도록 처박아 두고, 제갈세가가 바닥을 벅벅 긁으며 기는 꼴을 두고두고 비웃으며.
남궁세가를 방패처럼 쓰고 버린 다른 모든 문파들은 모조리 남궁세가를 대신해서 적의 앞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살려 달라 아우성치는 꼴을 면전에서 구경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귀천성은…….
‘모두 죽이리라!’
어떤 방식,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죽이리라.
귀천성 놈들을 죽인다는 일념 하나로 진화는 검강을 얻었고, 뇌전을 얻었다.
모든 원수들에게 복수할 순 없었지만, 귀천성도들만큼은 죽일 수 있었기에.
진화는 원수들이 씌워 주는 피투성이 왕(王)의 관도 기꺼이 뒤집어썼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복수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것인데.
* * *
“우리의 수가 많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냐, 쳐라-!”
원숭이 귀면을 쓴 원구의 외침에, 광룡귀면대원들이 넓게 퍼졌다.
진화의 왼쪽으로 현오와 남궁구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팽가 형제와 남궁교명이 있었다.
그들은 살기를 뿜으며 달려드는 광룡귀면대를 보며 잔뜩 긴장한 듯 굳어 있었지만, 겁먹지 않고 일 년 동안 그랬듯 서로의 위치를 느끼며 검을 들었다.
촤아아아아---!
광룡귀면대원들이 가시옥쇄를 던졌다.
그 모습에 팽수와 팽신이 바닥에 있던 거대한 나무를 들었다.
“크아아아아---!”
후-웅! 훙-!
팽가 형제가 나무를 휘둘러 가시옥쇄를 쳐 냈다.
그 틈으로,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달려 나갔다.
쉐에에에엑----!
거세고 치명적인 푸른색 검기와 그 곁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돌풍 같은 검기.
이번 세대, 특히 홍의생들을 달리 황금 기수, 역대 최강의 기수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의 검기가 광룡귀면대의 움직임을 트는 순간, 현오의 금강분산권이 날아들었다.
파파파파파팟- 펑-!
강한 기운이 땅을 폭발시키며, 흙과 돌이 튀었다.
그 사이로 다시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에엑---!
팽가 형제 또한 나무를 휘두르던 거력으로 광룡귀면대원들의 몸을 때렸다.
퍽! 퍽!
창궁대연검의 검기가 급소를 베고, 혼원권의 강기가 살과 뼈를 떡처럼 짓눌렀다.
처음에 왔던 인원은 진화의 천뢰우전으로 반 이상이 줄었고, 남은 인원으로는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현오와 남궁구, 남궁교명 그리고 팽가 형제는 약간 긴장하긴 했지만, 상대의 급소에 검을 휘두르고 피가 터진 곳에 주먹을 내지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겨우 약관 남짓한 나이였지만, 하나하나 절정을 넘어서는 무위에 죽음을 무시하고 싸울 줄 알았으니.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잘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자 서로 다른 사문 출신임에도 함께 싸우는 데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일 년 조금 넘는 짧다면 짧고, 길다 하면 긴 시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서로 함께 움직이는 법도 익혔기 때문이다.
그사이.
진화도 검을 들고 움직였다.
쉐에에에엑---!
섬전십삼검뢰는 이전 생에 뇌왕의 특기라.
진화가 섬전십삼검뢰를 주로 사용한 것은, 그것이 천뢰제왕신공 중에서도 바로 근접 거리에서 싸울 수 있는 초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쉐에에엑-!
섬전십삼검뢰 여여일식이 웅사의 들숨과 날숨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파팟!
“크윽!”
진화의 검에 팔이 베인 웅사가 물러나고, 원구가 뛰어들었다.
챙-! 챙챙챙!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한 건곤권을 칼을 들어 막아 내며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포악한 공격을 해 대는 원구의 눈빛이 필사적인 반면, 진화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원구의 급소만을 노리고 있었다.
검과 건곤권이 맞붙으며 튄 불꽃이 원구의 눈에 튀면서 눈을 깜박인 순간.
번뜩.
진화가 검을 꺾은 채로 검집째 기운을 실어 원구의 명치를 찍었다.
퍼억-!
쿵!
“으-악!”
간발의 차이로 명치를 피한 원구가 배를 잡고 뒤로 굴렀다.
“젠장!”
원구가 복부를 잡고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마치 내장이 끊긴 듯 순간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검에 뚫린 것보다 고통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복부를 잡고 있던 손바닥을 펼쳐 보았을 정도로.
“크읏……!”
원구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진화를 노려보았다.
그가 일어서는 동안 웅사가 진화의 검에 유성추를 감고 있었다.
그때.
씨익!
원구의 눈에 진화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웅사, 피해--!”
원구의 외침과 함께 웅사가 손을 놓고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벼락은 눈 깜박하는 사이에 떨어졌다.
파지지짓---!
퍼-억!
간발의 차이로 유성추는 놓았지만 뇌기는 피하지 못한 웅사가 튕겨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툭.
웅사의 가면이 두 동강이 나며 떨어졌다.
화상을 입은 듯 흉측한 얼굴과 함께, 창백한 피부 위로 자색으로 타들어 간 혈관들이 드러났다.
“큭! 커억. ……읏.”
결국 마지막 숨을 내뱉지 못하고 웅사의 고개가 떨어졌다.
“…….”
원구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렸다.
천천히 저를 향해 걸어오는 진화를 보는 눈이 하염없이 떨렸다.
“자, 잠깐! 내가 이, 이대로 끝날 것 같아? ……흐이익! 사, 살려 줘! 날 살려 주면 지원대가 오는 길을……!”
쉐에에엑---!
원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인내심 없는 푸른 검기가 그의 팔을 베었다.
“크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
정확하게 어딜 끊어야 하는지 알고 노린 듯, 마치 짚단 인형의 팔처럼 원구의 팔이 싹둑 잘려 나갔다.
“넌, 그 영감이 부리는 놈들답지 않게 말이 많네.”
진화가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천뢰제왕신공은 보법보다 검술 위주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달리 말하면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린 진화의 몸놀림은 모두 검을 쓰기 위한 것이라.
파지지직---!
쉐엑! 샤샤샤샤샷-!
거센 비가 태산을 무너뜨리듯.
섬전십삼검뢰 붕격우산의 연속기가 원구의 앞에 쏟아지듯 번뜩였다.
그리고 비가 그쳤을 때.
“끄……어.”
입을 벌리는 순간, 원구의 몸이 목각인형처럼 산산조각으로 쪼개지며 떨어졌다.
* * *
흥건한 핏물과 허옇고 검은 내장 조각, 그 주변에 흩어진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리고 언뜻언뜻 사람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팔다리의 흔적.
원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진화가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마침 팽수와 팽신 형제의 파갑추(破甲錘)가 마지막 남은 광룡귀면대원의 가슴을 부순 참이었다.
“……허!”
현오가 진화의 뒤에 있는 시신을 보며 신음하듯 감탄을 터뜨렸다.
남궁구와 남궁교명 또한 인상을 찌푸리다 금방 눈을 돌렸다.
끔찍하긴 하지만 적을 동정하진 않았다.
몇 번을 경험하든 상관없이 생사를 건 적과의 전투는, 그들을, 칼끝을 밟고 선 무림인으로 만들었다.
“놈들의 지원이 있다는군. 뒤로 물러날 사람?”
진화의 물음에, 일행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보았다.
“흐흐. ……이제 좀 재밌어졌는데, 빠질 수야 없지.”
현오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남궁구가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윽! 이 땡중아! 천살성이네 뭐네 험한 소문도 도는데, 대머리에 피 칠갑을 하고 그렇게 웃지 마!”
“그건 소문이 아니라 진짜다.”
“진짜? 천살성이? 아니면 대머리가?”
“형님, 둘 다 맞는 말이다. 천살성인데 대머리인 거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발 저 입이 악한 중생들을 용서하소서.”
남궁구에 이어 남궁교명과 팽가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진화는 그들이 발을 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았다.
오히려 긴장이 풀린 듯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주고받는 것에, 진화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우리 지원도 곧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볼까?”
진화의 말에 모두가 숲 한쪽을 보았다.
어느 쪽 지원이 먼저 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 알면, 광마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겠지.’
지금 당장 광마제를 이길 수 있을까.
골백번도 넘게 생각했다.
제왕검과 다른 이들의 협공에도 죽이지 못한 광마제가 아니던가.
다만.
‘확인해 볼 수 있겠지. 놈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 이번엔 내가 정의맹을 이용해서.’
숲 한쪽을 보는 진화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때.
푸스슥!
풀숲이 흔들린 소리뿐 아니라, 사람의 기척이었다.
“저기다!”
진화가 제일 먼저 튀어 나갔다.
그리고 달려온 사람들을 발견했다.
“……누구십니까?”
진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피투성이로 헐벗은 거지들은, 아무리 봐도 광룡귀면대의 지원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