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과거와의 조우(2)
“…….”
“주, 죽이지 마시오! 나, 나는 정의맹 백매단 소속이오!”
“…….”
“사, 삼 조 오경원이오!”
“…….”
“광마전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놈들에게 포로로 잡혔고, 겨우겨우 탈출해서 이곳에 온 것이오!”
“……안 물어봤는데…….”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 오경원과 그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사내를 보며, 진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건 고문하기 전까지는 말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 급하게 진화를 쫓아온 일행이 도착했다.
“도련님, 너는……!”
“우리는 정의맹 백매단 소속 삼 조 오경원 외 일 명이오! 광마전에 잡혀 있다 급히 탈출한 것이니, 제발 이자가 우릴 죽이지 않게 해 주시오!”
“…….”
남궁구가 뭔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오경원이 소리쳤다.
숨도 쉬지 않고 하는 말에 남궁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진화를 보았다.
뒤따라온 일행도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 자칭 백매단원들과 진화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진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오경원과 그의 뒤에 있던 사내를 겨눴던 검을 거두었다.
“후유…….”
“휴…….”
오경원과 사내가 눈에 띄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일행의 눈초리가 진화에게 향했다.
이쯤 되니 진화는 살짝 억울해졌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진화가 투덜댔다.
하지만 진화의 말처럼, 오경원과 사내의 상처는 피딱지와 함께 검은 때가 덕지덕지 붙어서 시일이 꽤 지난 것인 듯했다.
게다가 광마전에 잡혀 있다 탈출했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듯, 상처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으니.
등가죽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선명한 채찍 자국.
손톱, 발톱 중에 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탈수가 온 것인지 피부는 물론 입술도 말려 올라가 있고, 눈 밑의 경련도 있었다.
보기 딱했던 듯 남궁구가 자신의 수통을 오경원에게 건넸다.
“가, 감사하오!”
오경원이 수통을 뒤의 사내에게 먼저 건넸다.
뒤의 사내는 오경원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한쪽 어깨는 억지로 끼워 맞춘 듯 벌겋게 부어올라 있고, 손은 나뭇가지를 부목 삼아서 천으로 묶어 놓았지만 곧 썩을 듯 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핏발 선 눈.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오한이 있는 사람처럼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진화의 눈이 오경원과 사내를 번갈아 살폈다.
‘진짜 백매단이 맞나 보네.’
오경원은 본인도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사내를 배려했다.
물을 건네주는 태도가 매우 공손한 것이, 몸에 밴 습관 같았다.
아마도 오경원보다 직급이 높은 자일 것이다.
게다가 저 사내.
아닌 척, 남궁구가 준 수통에 있는 정의무학관의 표식을 확인했다.
진화의 눈이 사내의 발을 향했을 때.
“도련님, 넌 제발 말 좀 하고 가!”
“아니면 혼자 몰래 가지 않겠나? 내가 보고도 못 본 척할 수 있게 말일세!”
남궁구와 달리 현오가 불평을 쏟아 냈다.
뒤에 있던 남궁교명과 팽가 형제 또한 남궁구와 현오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도 찔린 것이 있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남궁교명이 정중하게 오경원과 사내에게 물었다.
“광룡귀면대가 귀하들을 쫓아온 것입니까?”
“놈들이 벌써 쫓아왔다고?”
오경원과 사내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방금 전 귀하들을 기다리는 듯한 광룡귀면대 무인들과 마주쳤었습니다.”
“마, 마주쳐?”
이번에는 오경원과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모두 처리했습니다.”
“……!”
남궁교명의 말에, 오경원과 사내의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척 봐도 일행 모두 약관을 넘기지 못한 듯한데, 광룡귀면대를 모두 죽였다고 말하니.
진화와 일행, 오경원과 사내는 이제 중요한 기로에 섰다.
진화와 일행은 오경원이 하는 말을 들었고, 오경원과 사내 또한 진화와 일행이 입은 옷과 수통과 같은 지급 물품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서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릴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라면……?’
지독한 불신.
바로 어제까지 죽음의 기로 앞에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경계심이었다.
진화 일행 또한 방금 전까지 광룡귀면대와 싸우며 끓어오른 피가 채 식지 않은 터였다.
“하나, 둘, 셋, 하면 각자 신원을 알만한 물건 하나씩 내놓을까요?”
“……그러지.”
남궁구의 제안에 오경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다가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하나, 둘, 셋!”
“…….”
“……제발 이 친구 좀 말려 주겠나?”
오경원이 제 목에 닿은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보통 이럴 때 숨겨 둔 암기 같은 것을 꺼내지 않나?”
이전 생에는 이렇게 합의한 척, 다 죽였었는데.
‘이때까진 강호의 신의가 살아 있었나 보네.’
진화가 머쓱한 얼굴로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다행히 남궁구는 정상적으로 신분패를 꺼내 놓았다.
“모두 정의무학관 소속 홍의생들입니다.”
“남궁이로군. 그렇다면 이쪽이…… 남궁진화인가?”
범상치 않은 외모와 기세.
신분패를 내민 것은 남궁구였지만, 오경원과 사내는 진화를 먼저 알아보았다.
“본인은 백매단주 맹규일세. 정의무학관 관도생이라면 알아보겠지?”
사내가 꺼내 놓은 것은 백매단의 단원패였다.
마작패에 백매가 새겨진 그것은, 적진에서 같은 편을 알아보거나 비밀리에 접선을 할 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오경원은 심문을 당하면서 단원패도 털렸지만, 맹규는 끝내 그것마저 들키지 않은 것이다.
“확인해 보겠나?”
행정학을 배우면서 ‘정의맹 기밀 전서에 각자의 단원패를 찍는다.’며 표본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실물은 처음이라.
남궁교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단원패를 집어 들었다.
“단주인 걸 들켰다면 조리돌림 당하다가 죽었을 걸세. 항문 속에 잘 넣어 두었기에 망정이지.”
“으아아악!”
맹규의 말에 남궁교명이 기겁하며 단원패를 내던졌다.
“무슨 짓인가!”
“우욱!”
맹규가 남궁교명이 집어 던진 단원패를 잡아채며 화를 내었다.
하지만 남궁교명과 일행은 속이 좋지 않은 얼굴로, 남궁교명의 두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오경원이 남궁교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동시에 진화가 오경원의 어깨를 짚었다.
“광마전에서 탈출하신 것이 정말이군요!”
진화의 웃는 얼굴에 오경원이 화들짝 놀랐다.
“곧 주작단이 올 것입니다. 안심하시고 몸을 추스르고 계시지요.”
진화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분의 금창약도 있는데 좀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네. 주, 주작단은 어디 있나?”
진화의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맹규와 오경원이 어색한 얼굴로 진화의 친절을 거절했다.
진화 일행은 당연한 듯 광룡귀면대를 기다리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어서 정의맹으로 모시자.”
긴장이 풀린 듯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는 맹규와 오경원을 팽가 형제가 업고, 일행은 주작단과 관도생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드디어 광마전 놈들이 숨은 곳을 알겠구나!’
맹규와 오경원이 나온 숲을 향해 시선을 두었던 진화는, 미련 따윈 없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몸을 돌렸다.
* * *
백매단주 맹규와 단원 오경원의 등장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주작단주와 단원들이 그들을 알아봄으로써, 한 톨만큼 있던 불신도 말끔히 털어 버렸다.
주작단원들이 급히 그들을 정의맹으로 옮겼다.
그리고 주작단주와 무사부 각우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놈들의 지원대가 뒤를 쫓고 있다면 금방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놈들이 이쪽으로 발을 들이도록 할 순 없지요. 백매단주님을 발견했다는 곳에 저희가 가서 지키고 있어야겠습니다.”
주작단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백매단주와 오경원을 구한 것과는 별개로, 광룡귀면대가 다시 정의맹의 영역에 들어오게 둘 순 없었다.
주작단주의 생각에는 각우도 동의하는 바였다.
“정의맹에서 지원을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관도생들을 물린다면, 그동안 주작단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각우의 말이 맞았다.
백매단주의 뒤를 쫓는 광룡귀면대의 수를 모르니, 자칫 주작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럼 무사부님들의 도움만 받겠습니다.”
“아니요. 비록 관도생이라고는 하나, 그들 모두 실력 있는 무인들입니다.”
주작단주의 말에 각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각우의 말에 다른 무사부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무학관의 기본 취지는 진짜 무학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무학관은 귀천성과 싸울 수 있는 무인이 아닌, 귀천성과의 전쟁을 이끌어 갈 무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라.
관도생들이 정의무학관에서 익히는 것은, 전쟁에서 각자 사문의 무인들을 이끌고 정의맹의 지휘 아래에 유기적으로 협조하기 위한 전투적, 행정적 체계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선발시험을 통해 각자가 사문을 대표하는 무인임을 증명했다.
정의무학관은 필요에 의해 그들을 관리할 뿐,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정의무학관에 관도회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각우가 청의장 하후진과 홍의장 진화, 백의장 심원을 불렀다.
“백의생들은 안전을 위해 귀가 조치 하고, 청의생들과 홍의생들은 남아 싸우는 것으로 하지요.”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백의장 심원이 분한 얼굴을 했지만,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라, 주작단이 지휘하는 전투에서 작전대로 움직이는 경험이 부족해서라니. 그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은 주작단이 맡습니다.”
“우리는 근방을 포위하도록 하지.”
주작단주의 포위 작전에 무사부들과 청의장 하후진, 홍의장 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 움직이려는데, 진화가 주작단주를 불러세웠다.
“저기!”
모두가 진화를 보았다.
그러자 진화가 쑥스러운 듯 귀 끝을 붉히며 말했다.
“가는 길에 저와 동료들이 죽인 광룡귀면대의 시체가 있을 것입니다. 놀라지 마시라고…….”
“아, 미리 잠복하고 있던 놈들 말인가? 하하하, 걱정 말게. 놀라지 않겠네!”
늘 죽음의 선상에서 피를 보고 사는 주작단을 향해 시체를 보고 놀라지 말라니.
주작단주는 진화의 말에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주작단원들도 진화를 향해 귀엽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진화의 염려가 그런 귀여운 종류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 * *
기절한 듯 곱게 누워 있는 시체만 십여 구.
기껏해야 두셋 정도 잡았겠거니 생각했던 주작단주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그 뒤쪽에는 보기에도 끔찍하게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헉! 이, 이건 대체……!”
“끔찍……하군.”
허리가 뒤로 꺾이거나 사지가 이상하게 뒤틀려 죽은 시신부터,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난도질된 고깃덩어리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던 주작단조차 신음을 삼키며 말을 잃었다.
‘이걸…… 그렇게 수줍게 말했다고?’
주작단주는 귀 끝을 발갛게 붉히며 말하던 진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었다.
“단주님.”
“일단 백매단주가 발견된 장소에서 매복하지. 그리고 사 조, 오 조가 이 일대를 정찰하면서 수상한 길이나 입구가 보이면 신호하도록.”
“충!”
주작단주의 말에 주작단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땅 밑에 있던 눈도 빠르게 움직였다.
‘원구와 웅사가 다 죽다니…… 이제 어쩌지?’
사실 이미 결론은 하나였다.
도망.
하지만 주작단부터 시작해서 일대가 모두 정의맹 무인들에게 둘러싸였으니.
‘어쩌지? 어쩌지?’
눈동자가 맹렬하게 움직였다.
광룡귀면대원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연유를 파악하는 동안, 갑작스러운 정의맹 무인들의 등장에 급히 숨은 터였다.
대책 따윈 없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원구와 웅사라면 저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 둘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부대주들조차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실력자들인데, 흔적으로 보아 그런 이들이 한 사람에게 당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저는 죽음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맹렬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단호하게 빛났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불꽃을 쏘아 올렸다.
파다다닥-! 타탁!
빨간 불꽃이 튀며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신호를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광룡귀면대원들이 달려왔다.
“적이다--!”
“광룡귀면대다! 죽여라!”
광룡귀면대원들이 맹렬하게 달려들고, 주작단이 그들을 발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챙-! 챙-!
“저기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을 들으며, 땅이 꿈틀거렸다.
‘지금이다-!’
마치 두더지처럼.
지상의 일을 버려둔 채, 눈동자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챙! 챙--!
“주작단을 도와라!”
각우가 관도생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청의생들과 홍의생들도 검을 들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수적으로 유리한 정황이었지만, 관도생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각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관도생들을 살폈다.
그때, 유달리 한 명이 각우의 눈에 들어왔다.
‘응? 어딜 보는 거지?’
전투 중에 한눈을 파는 듯, 용맹하게 뛰어드는 홍의생들 사이에서 진화만 멀뚱멀뚱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각우가 당장 호통을 칠 듯 진화를 노려보았다.
때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화가 각우와 눈이 마주쳤다.
진화가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웃기는.”
전투 중에 한눈이나 팔다니, 나중에 두고 보자.
각우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