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과거와의 조우(4)
우뚝 솟은 바위산 하나.
오르는 입구도 없고, 길도 없는 곳.
심지어 한쪽 절벽의 아래에는 세찬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절벽 사이사이 소나무와 잡초가 강한 생명력을 뿜고 있는 아주 작은 틈.
약속된 인간들만이 겨우 찾아낼 수 있는 길이었다.
“후우, 젠장!”
온몸에 말라붙은 흙을 털어 내며,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절벽을 밟고 올랐다.
혹시나 미행이 있을까 봐, 제대로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한참 거미처럼 절벽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풀과 나무가 무성해지는 지점이 나왔다.
양손으로 짚을 만한 곳에 튀어나온 뾰족한 돌.
양손에 힘을 줘서 돌을 잡고 뛰어오르자, 비로소 바위산 꼭대기가 나왔다.
밖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산림이 우거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우람한 근육질의 광룡귀면대원 둘이 사내를 알아보았다.
“능교 님을 뵙습니다.”
“열어.”
능교가 만사가 귀찮다는 말투로 명했다.
짜증 섞인 능교의 반응에, 근육질의 대원들이 서둘러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둘이서 나무 기둥을 잡고 누르자.
스으으으-.
거대한 바위가 조금씩 옆으로 밀리더니, 땅속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간다. 잘 닫아.”
“충.”
능교가 잠깐 심호흡을 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거대한 바위산 전체가 광마전이었다.
무사들의 숙소부터 연무장, 식당까지.
꼭대기에 난 입구를 시작으로 바위산 안쪽이 마치 개미굴처럼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다.
능교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흉악한 쥐를 닮은 가면을 쓴 인영이 다가왔다.
“아, 놀라라! 서이, 이 쥐 새끼 같은 년아. 기척 좀 내라고 했잖아!”
능교가 인영을 알아보고 얼굴을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포악한 얼굴의 검은 가면 안에서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이(鼠二)라 불린 인영은, 작고 가녀린 체구에 어울릴 법한 여린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는 아주 어린 소녀 같았지만, 서이는 수귀 가면을 쓴 지 십 년이 넘은 이들 중 하나였다.
“아, 씨! 대주가 나 온 거 벌써 알아? 귀도 밝네.”
“…….”
능교가 대주 무맥을 비꼬듯 말했다.
서이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뒤를 돌아 앞장섰다.
서이가 안내한 곳은 흑면마룡 무맥의 전용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입구에는 마룡이 새겨진 철문이 있었다.
서이가 먼저 철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자, 능교가 그녀의 손을 매섭게 내리쳤다.
철썩.
“가만있어, 이년아.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능교의 말에 서이가 그를 재촉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꿀꺽.
능교가 문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며 주춤거리는 사이, 서이가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철컹!
“어! ……이 간신 년. 나중에 보자.”
마음의 준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가게 생긴 능교가 서이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문을 지나치며 그녀의 귓가에 협박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의 서이가, 능교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시 문을 닫았다.
철-컹!
유독 크게 울리는 듯한 문소리.
능교가 속으로 서이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개 같은!’
퍼---억!
“커억!”
순식간에 복부를 때리는 충격에, 양팔로 막고도 모자라 능교의 몸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쿵.
땅으로 떨어진 능교가 바닥을 구르는 위로, 무맥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왔다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겁게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끄응. 개새끼!’
능교는 신음과 함께 욕지거리를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무맥이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능교가 몸을 바로 했다.
속은 욕지거리로 진창이 되었지만, 무맥을 마주하자니 심장만 두근거렸다.
검은 가면 아래, 단단한 목.
우람하진 않지만 맹수처럼 탄력 있어 보이는 근육질의 몸.
최근 생긴 듯한 상처 외에는 땀에 젖은 피부가 청년의 그것처럼 싱그러웠다.
‘괴물 같은 인간!’
능교가 무맥의 몸을 보며 조용히 경악했다.
무맥은 능교가 광룡귀면대에 들어온 이십 년 전에도 대주였다.
그가 광룡귀면대에 들어온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라.
십 대에 광룡귀면대에 들어와 말도 안 되게 짧은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한들, 마흔을 넘겼을 나이였다.
그런 자의 몸이 약관도 안 된 청년처럼 싱그럽다면, 그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능교가 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의맹 놈들이 쫙 깔렸었습니다. 원구와 웅사가 데려간 놈들뿐 아니라, 원구, 웅사마저도 어떤 놈에게 당했는지 죽어 있었고요.”
최대한 담담하고 명확한 목소리를 꺼내려 애썼다.
대주인 무맥이 보고에 자질구레한 감정이나 변명을 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펄-럭.
마침 수련을 모두 마쳤는지, 무맥이 한쪽에 걸쳐 둔 피풍의를 걸치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덤덤한 말투가 능교를 재촉했다.
촤르르르르----!
마룡미의 끝이 무맥의 피풍의에 있던 어깨 장식에 끼워졌다.
무맥이 사용하는 무기는 두 가지라.
거대한 낫이 달린 창이 마룡의 송곳니, 마룡아(魔龍牙)라면, 마룡미(魔龍尾)는 마룡의 꼬리처럼 긴 사슬에 연결된 독이 발린 송곳이었다.
무맥은 맹독이 발린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 어깨 장식을 사용했는데, 어깨에 있는 마룡의 발에 송곳을 끼우고 긴 사슬은 어깨에 걸었다.
무맥이 복색을 챙기는 것을 보며, 능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혈향이 퍼졌고, 상황이 어찌 되었나 궁금하여 제가 먼저 움직이던 차였습니다. 원구와 웅사의 시체를 발견하고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갑자기 정의맹 놈들이 몰려왔습니다. 놈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놓친 놈들은 이미 정의맹으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손에 마룡아를 든 무맥이 능교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무맥의 눈동자는 덤덤하였으나, 능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무맥이 창을 등에 메지 않은 것은 꼭 누군가를 죽일 때뿐이라.
능교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러자 무맥이 덤덤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능교를 다그쳤다.
“그리고?”
“시, 신호를 보내 수하들을 부르고, 놈들이 싸우는 사이에 빠져나왔습니다!”
무맥의 재촉에 능교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도 능교는 제 행동에 변명을 늘어놓진 않았다.
“그래. 목표는 놓치고, 수하들은 모두 버려두고 왔구나.”
“백매단 놈들이 정의맹에 들어갔다는 걸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놈들이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미리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변명이 아니었다.
정말로 제가 전할 정보가 수하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 전에 목표를 잡았어야지. 놈들을 놓쳤다면 임무 실패다. 그런데도 네놈이 수하들을 미끼로 던지고 살아 나올 이유가 있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
그러나 수하들을 던지기 전에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말단 아귀면이나 수귀면 놈들보단, 제가 더 살 가치가 있으니까요.”
능교가 무맥의 눈을 마주 보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무맥의 말처럼, 능교는 실패자였다.
그러나 꼭 전달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정보였고, 거기서 누군가 빠져나올 것이라면?
능교는 ‘거기 있던 수하들 전부의 목숨보다 내 목숨이 더 가치가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판단.
그게 무맥이 저를 부를 줄 알면서도 수하들을 미끼로 던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훗.”
무맥의 가면 속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무맥의 손이 능교의 멱살을 쥐었다.
“큿!”
목을 죄는 고통과 함께 능교의 얼굴이 앞으로 딸려 갔다.
무맥이 제 눈앞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그리고 능교의 눈동자를 뚫을 듯 노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치…… 곧 정의맹 놈들이 몰려올 것이다. 필요한 만큼 수하들 데리고 가서 막아. 모처럼 주인님이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니,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큭! 추, 충. 큿!”
무맥이 멱살을 놓자, 능교가 떨어지듯 풀려났다.
“주인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음엔 같은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거란 경고와 함께, 능교는 겨우 무맥의 연무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철컹.
철문을 닫고.
“후아…….”
능교가 우글쭈글한 앞섶을 털었다.
“힘줘서 말하면 뭐 어쩌라고. 흥.”
능교는 안에서 겁먹은 것을 부인하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여유를 부리듯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필요한 만큼이라고 했겠다? 후후후후.”
무맥이 실수를 한 것이라.
절대 실패할 수 없을 만큼 수하들을 동원하리라 마음먹었다.
* * *
이미 먼저 와 있던 광룡귀면대원들을 처리한 건 진화 일행이었다.
도망치는 놈을 놓치긴 했지만, 그 뒤를 밟아 광룡귀면대가 이동한 경로를 알게 되었으니. 공(功)으로 과(過)가 상쇄되고 남았다.
게다가 때마침 백매단주가 먼저 의식을 차림으로써, 광마전을 찾는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설마 강가까지 동굴을 파 놓았을 줄이야.”
“나 참, 지들이 두더쥐야, 뭐야? 무슨 죄다 땅굴을 파 놓고 지랄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동굴을 살피는 적호단원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동안 의선문 경계만 맡느라, 답답해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광마전을 찾아 치는 것은 주작단이 아닌 적호단이 맡았다.
전투력만 따지자면, 적호단이야말로 정의맹 무단 중 수위를 다투는 곳이라.
“여기서 배를 타면, 반나절도 안 되어서 광마전이라는군.”
“배는?”
“백매단원들이 준비해서 온대. 그 전에 놈들이 올지도 모르니, 적호단은 이곳에서 대기하래.”
“그럼, 혹시 지금…….”
기분 좋게 동료와 대화를 나누던 적호단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너 이 새끼, 밤샘 대기 하는데 나 데리고 온 거냐?”
“엉. 헝헝허-!”
“웃지 마, 이 개쉐야! 어쩐지 나들이 가자며 날 끌어들이더라! 이 빌어먹을 웬수 새끼!”
“허허허! 동기 좋다는 게 뭔가. 대신 좀 있다 수하들이 지푸라기 구해 온댔어.”
“수하들한테는 미리 말했냐?”
“오랜만의 외유잖냐. 찬 데서 자면 입 돌아가. 이제 우리도 적지 않은 나이이니, 조심해야지. 내일 오전까지만 대기 타면 돼. 새벽에 백매단원들이 배 가져올 거고, 날 새는 대로 지원대도 전부 올 테니까. 그때까지 뽀송뽀송하게 대기 타자구!”
“다 늙은 새끼가 되도 않는 끼 부리지 마!”
이제 중년이 된 동기가 팔꿈치로 쿡쿡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찡긋하자, 적호단원이 허공으로 주먹을 날렸다.
잠시 후, 수하들이 보송보송 마른 짚을 들고 나타났다.
“대기 타는 사람은 우리만 있어?”
“아니, 이번 지원단에 포함된 남궁세가 신참들도 온다고 했어. 백매단이 구해 오는 배가, 남궁세가 쪽 배인가 보더라고.”
넓고 넓은 중원.
정의맹은 금전적인 것 외에도 연맹에 속한 문파나 세가의 지원을 필요로 할 때가 있었다.
이럴 때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약속된 정의맹 인장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의맹에 있는 각 문파나 세가의 대리인을 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새벽에 조용히 무인 수백 명을 태워 줄 배와 선원을 이용하는 일처럼 큰 건에 한해선, 대부분 후자의 방법을 이용했다.
“남궁세가면…… 남궁진혜?”
“야! 남궁세가 신참이라니까! 오 조장은 지금 적호단 소속이잖아!”
“그, 그렇지? 아닐 거야.”
적호단원이 동기에게 진심으로 역정을 내었다.
동기 또한 고개를 저으며 제 말을 부정했다.
“모처럼 외유인데, 새파란 후배가 아니라 서슬 퍼런 후배를 모시고 보초 설 순 없지.”
“왜 보초를 서?”
“…….”
“혹시…… 졌냐?”
“너도? 걔 곧 부단주 될 것 같아.”
“……젠장.”
철저한 실력 위주의 승급제 속에서, 남궁진혜는 빛처럼 빠르고 눈부신 출세 가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스치듯 그녀를 앞질러 보낸 적호단 선배 둘은, 씁쓸한 얼굴로 서로를 외면했다.
그때.
“조장님들---!”
수하들이 잔뜩 신이 난 듯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적호단 일 조, 삼 조의 조장들이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조원들이 짚 외에도 한 짐 짊어지고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짜식들, 오랜만에 외유라고 저놈들도 신이 났네.”
적호단 일 조 조장은 수하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왔냐? 왜 이렇게 신났어?”
“오다가 남궁세가 사람들이랑 같이 왔습니다. 오늘 같이 대기한답니다.”
“나, 남궁세가?”
웃으면서 말하는 수하의 뒤로,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이고-! 선배님들, 수고하십니다. 남궁구입니다!”
약관이나 되었을까.
호감형의 사내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저잣거리 장사의 왕보다 더 붙임성 있는 태도였다.
그 뒤로.
“안녕하십니까. 남궁진화라고 합니다.”
“아, 아, 예!”
‘수줍음이 많은 도련님이군. 새끼들, 저번에 소개받았던 여인들 앞에서나 그렇게 웃어 보이지.’
좀 쑥스러운 듯 인사하는 말간 얼굴에, 일 조와 삼 조 조장이 기분 좋게 웃으며 진화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나도 왔습니다.”
“……!”
“커헙!”
수하들 사이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사람을 보고 옆에서 동기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일 조 조장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리따운 여인이지만 저번에 저를 고자로 만들 뻔했던 사람이 아닌가!
-야, 웃어. 웃어!
동기의 전음에, 일 조 조장이 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하하하. 오 조장 아니신가? 여긴 왜…….”
“내 동생이 이렇게 험한 임무를 맡는다는데, 누님이라도 곁에 있어야지요! 내가 먹을 것도 많이 싸 왔습니다!”
남궁진혜가 수하들이 내려놓는 짐을 가리키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아, 하하하, 보호자를 데려왔구나. 하하하…….”
일 조 조장의 말에 진화가 귀 끝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일 조와 삼 조 조장은 그제야 수하들이 입만 겨우 웃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