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성낼 진(瞋) 불 화(火) : 과거와의 조우(5)
정의맹의 분위기가 고요했다.
“그럼 잘 들어가. 나중에 보자고.”
“어어, 그래.”
늘 그렇듯 일상을 나누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인사하며 헤어지는 정의맹 무인들의 표정에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랜만에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
그러나 전쟁의 시작은 아니었다.
제갈가주와 군사부는 혼현마제의 출현이나 광마제의 생존에 대비해서 십좌회에도 협조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망간 혼현마제는 큰 힘을 쓰지 못할 것이고 광마제는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제갈가주는 귀천성의 부활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지만, 벌써 십수 년째 이어진 평화에 익숙해진 이들을 설득하기엔 현실성이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이번 광마전을 토벌하는 데에는, 광룡귀면대와 대주 무맥을 목표로 꾸려지게 되었다.
급박한 일정에 거의 모든 문파들이 많든 적든 무인들을 지원하는 터라, 양청현 전체가 술렁였다.
남궁세가는 이번에도 양청현에 있는 창궁무애단원들을 선발했고, 책임자로는 호명기를 임명했다.
“늙으면 죽어야지.”
“하하, 숙부님, 아직 지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맥에 맞서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팽치 그놈은 일주일 만에 날아다니더만. 적호단주는 이번에도 포함이지?”
약간의 질투가 섞인 농담으로, 남궁조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남궁진휘도 남궁조의 마음이 고마워서 겨우 웃음을 보였다.
“적호단주 경격권 팽치와 마라승 각우, 선우도 황보견이 책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선우도 황보견?”
의외의 이름에, 남궁조가 의아한 듯 물었다.
“황보세가와 청성파가 이번 전투에 꽤 적극적입니다. 제갈세가가 약해진 틈을 뚫고 수로 유통에 뛰어들고 싶어 합니다.”
“허! 제갈성질 놈이 자식 농사 잘못 짓고, 어지간히 얕보였군. 오왕부와 사돈을 맺었는데도 황보세가 놈들이 덤빌 정도면…….”
남궁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서로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지만, 또 그만큼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편이라.
남궁조는 제갈세가가 서서히 기울어 가는 모습이 고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얼굴이었다.
“오대세가라는 명성이 주는 이득이 적지 않으니까요. 황보세가에서 우리에게도 슬쩍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남궁세가가 오왕부와 제갈세가의 결합을 대신 경계해 주길 바라는 듯하더군요.”
“허! 간 큰 놈들이네. 감히 남궁세가를 이용할 생각을 해?”
“우리와 좋은 관계, 나아가 동맹을 맺고 싶어 하는 모양입니다만…… 글쎄요.”
남궁진휘가 말을 아끼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남궁조가 슬쩍 물었다.
“왜, 부담스러우냐?”
남궁조의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현재 남궁진휘는 군사부에서 매일 제갈가주와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다.
그런 와중에 황보세가가 제갈세가의 눈치 따윈 전혀 보지 않겠다는 듯 대놓고 접근하고 있으니, 남궁진휘로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남궁진휘와 제갈가주는 성격부터 일 처리 방식까지 부딪히는 것이 없어, 부자지간보다 다정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남궁조가 장난스레 물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남궁진휘가 코웃음을 쳤다.
“황보세가 정도로 부담스러울 리가요. 단지, 감히 남궁세가를 이용하려는 주제에, 던지는 조건들이 가소로워서 문제지요.”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남궁진휘의 모습에, 남궁조의 턱이 떨어졌다.
“허! 제갈 그놈이랑 성격이 비슷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서, 싫으십니까?”
“됐다! 상대편에 있는 그놈은 완전 짜증 나는데, 내 편일 때는 그만큼 든든하거든. 흐흐흐!”
남궁조의 대답에 남궁진휘도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다시 대화가 비었다.
남궁진휘는 남궁조 덕분에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거운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남궁조가 먼저 툭 던지듯 말문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 심지어 믿기지는 않지만 우리 중에 그 녀석이 제일 강할걸.”
말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남궁조 또한 걱정을 놓지 못한 얼굴이었다.
남궁진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압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걱정을 놓을 수가 없네요. 게다가…….”
“알지. 손 속이 좀…… 과하지? 지져 죽이는 건 양반이고, 꼭 목이든 어디든 일단 날리려고 드니.”
“광마전 놈들에게 특히 심하지요.”
“어린 나이라도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 한이 보통 한이겠느냐.”
“예. 그래서 걱정입니다. 진화의 복수심이 자칫 진화를 다치게 하는 것은 아닐지…….”
곱디고운 나의 어린 동생.
가족들의 칭찬에 수줍어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요즘 부쩍 진화가 저를 구하러 달려올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간절한 표정이 있을 수 있을까.
남궁의 청명함을 꼭 닮은 맑은 눈에 번개가 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 번개가 진화가 흘리는 눈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되어 달라 말한 그때 이후로는 통 우는 것도 못 봤으니까.’
남궁진휘는 진화가 끔찍했던 기억을 다 가지고 속은 얼마나 곪았을지 걱정되었다.
‘진화야, 네가 복수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렴. 이 형이 누구도 너를 다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널 지켜 주마!’
남궁진휘가 진화와 가족이 된 날 했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다잡았다.
“그래도 진혜가 따라갔으니 좀 낫지 않느냐?”
“그래서 더 불안한 겁니다.”
“…….”
남궁진휘의 단호함에 남궁조도 부정하진 못했다.
* * *
그 시간.
남궁진휘의 우려대로, 남궁진혜는 진화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진화가 숨만 크게 쉬어도 감탄을 쏟아 내었다.
휘-휘-.
“아아, 우리 진화는 언제 요리까지 배웠대? 월영루 숙수보다 손놀림이 능숙하구나.”
“…….”
진화는 솥에 담긴 완탕이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 주고 있었다.
만두는 당연히 오성반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누님, 간 좀 봐 주실래요?”
“당연하지! 이리 주렴! 누님이 다 마셔 줄게.”
아니, 그냥 간만 봐 달라는 건데…….
남궁진혜에게 국자를 건네주며, 진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화의 귀는 아까부터 붉어져 있었다.
“후, 후루룩!”
만두 하나와 국물을 함께 입에 넣은 남궁진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거!”
“왜 그러십니까?”
남궁진혜의 반응에 진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전 생에 야전 요리 경험이라면 모자랄 것 없이 쌓았지만,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처음 해 본 것이었다.
“미쳤어! 너무 맛있어!”
남궁진혜가 소리를 지르며 진화를 껴안았다.
아니, 진화가 남궁진혜의 품에 갇혔다.
성장기를 맞아서 이제 남궁진혜와 비슷할 정도로 자랐지만, 남궁진혜에게는 우람한 이두근과 삼두근이 있었다.
“커헙! 누, 누님.”
진화의 귀 끝이 터져 나갈 듯했다.
그때, 한쪽에서 적호단원들과 놀고 있던 남궁구가 끼어들었다.
“형님들, 식사합시다!”
남궁구는 진화와 남궁진혜의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이거 먹어도 되는 거야?”
“어휴, 우리 도련님 음식 안 드셔 보셨죠? 만두도 오성반점 거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무조건 맛있습니다!”
남궁구가 넉살 좋게 완탕을 떠서 한 사람씩 전달했다.
“어서 드세요! 지금 아니면 기회 없습니다. ……윽!”
꾸욱.
신나게 완탕을 푸던 남궁구의 손목이 붙잡혔다.
남궁구의 손목에서 급히 핏기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신나서 만두를 받으러 온 적호단원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여, 영애?”
“영애는 무슨, 본래대로 누님이라고 해.”
“적당한 거리 두기가 편한데요.”
“이 세상이랑 적당히 거리 두고 싶냐?”
남궁진혜의 말에 남궁구가 자연스럽게 눈을 깔았다.
여자에게 처음 잡힌 손목이건만, 당장 부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완탕 가득 풀까요?”
“진화 거까지 두 그릇. 그리고 남겨. 더 먹을 수도 있으니까.”
“옙!”
남궁진혜의 말에 남궁구가 바쁘게 두 그릇을 펐다.
“진화야, 네가 끓인 완탕 먹자.”
“예, 누님.”
“어쩜 이렇게 맛있지? 우리 집 소가주 놈이랑 가족들한테도 자랑해야겠구나.”
“제가 다시 끓여 드리면 돼요.”
“요리까지 잘하다니! 진짜…… 평생 누님이랑 같이 살자!”
“예, 그러면 참 좋겠습니다.”
한쪽에 자리를 잡은 뒤, 남궁진혜가 본격적으로 호들갑을 떨고, 진화가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다른 적호단원들과 남궁구도 떨떠름한 얼굴로 적호단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 조장이 저렇게 싱글거리는 것도 신기하네.”
“조장은 그것만 신기하십니까? 전 저 마녀가 욕 없이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적호단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일 조장이 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누나가 저러니까 이해는 하지만, 저 남궁 공자는 순해도 너무 순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요. 지금도 오 조장의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잖아요.”
“말대꾸도 없습니다.”
“휴우, 오 조장 하는 걸 보면 집안에서는 어떨지 눈에 훤하다. 다들 애지중지하지?”
삼 조장이 안 봐도 뻔하다는 표정으로 남궁구에게 묻자, 남궁구도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왕무적단주님이 제일 심하실 겁니다.”
남궁구의 말에 적호단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저렇게 생긴 자식이면 나도 그러겠다만.”
“허유, 그래도 난 좀 걱정이야. 이 험한 세상에 저렇게 물정 없이 순하게만 커서 어쩌려고.”
“그건 그렇지.”
“그래도 저렇게 웃으면…….”
“흐흐, 그렇지.”
적호단원들이 지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진화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남궁구는 그저 말없이 완탕에 고개를 처박았다.
잠시 후, 밤이 깊어지고.
보초를 선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모닥불 주변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위가 고요하고 강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보초를 서고 있던 적호단원 두 명도 모닥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던 차였다.
뜨뜻한 온기가 얼굴을 데우니, 슬금슬금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진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스윽.
주변을 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 진화가 강가로 다가갔다.
“으, 응?”
보초를 서던 적호단원 하나가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적호단원의 눈에 누군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변을 보려는 건가?’
남궁진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 그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
강가에 선 진화는, 검은 물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이봐, 너흰 벌써 들켰어.”
진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촤아아아---!
강물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진화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그러면 그렇지.’
물보라 속에서 저를 향하는 검은 인영을 보며, 진화가 물보라를 향해 천뢰장을 때렸다.
파지지지지지직------!
번쩍이는 불빛과 요란한 소리.
보초를 서던 사람들은 물론, 자고 있던 사람들까지 검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적인가!”
“뭐야!”
남궁진혜는 깨자마자 진화부터 찾았다.
“진화야--!”
강가에 선 진화를 발견한 남궁진혜가 몸을 날리듯 진화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이것들은?”
“놈들의 정찰인가 봐요, 누님. 강 속에 있더라고요.”
진화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강물에 둥둥 떠 있는 검은 인영들을 보며, 남궁진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참, 바싹 튀겨진 생선 같네.”
기괴하게 비틀려 굳어 버린 인영들의 모습에, 남궁진혜는 진화가 천뢰제왕신공을 익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적호단원들은 할 말을 잃고 진화를 보았다.
“우리 진화, 잠귀도 밝지. 혹시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못 잔 거야?”
“아니, 잘 잤어요.”
“그래? 망할 새끼들, 왜 잘 자는 애를 깨워선…….”
“전 괜찮아요, 누님.”
남궁진혜는 다시 호들갑을 떨었고, 진화 역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는 적호단원들의 얼굴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한바탕 소동에 일행은 말없이 불가로 돌아갔다.
강물엔 여전히 검은 인영들이 둥둥 떠 있었다.
정말 무시하는 거든, 애써 모른 척하는 거든.
누구도 강을 향해 시선을 두지 않았다.
‘두더지같이 도망치던 놈은 역시 능교, 네놈이었구나. 참 네놈다운 방법이야. 끈질기고 집요하게, 상대가 지칠 때까지. 이번엔 누가 먼저 지칠지 두고 보자고.’
진화는 느긋하게 날이 새길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