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꽂을 진(縉) 꽃 화(花) : 널 죽이는 이유(3)
사방이 강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같은 바위산.
주변 땅은 겨우 열 사람 정도 나란히 설 만한 얕은 강변뿐이었다.
그 뒤로 깎아 놓은 듯한 높은 바위 절벽은 족히 다섯 장은 넘은 듯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겨우 한 사람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그러나 길은 필요 없었다.
맨몸으로 절벽을 뛰어내린 백매단주의 증언에 처음부터 길 같은 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 전장에선 돌발 상황에 따른 유연한 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임기응변보다 철저하게 준비된 작전이 힘을 발하는 법이었다.
두 배들이 선두에 있는 적호단주의 판단을 기다렸다.
마침내 선두 배에 붉은색 신호기가 올랐다.
촤라라라라락---!
후우우우웅---!
먼바다를 다니는 대양선에서나 쓰이는 강철로 된 닻과 사슬이 세 사람의 손에서 지푸라기처럼 출렁거렸다.
적호단 남궁진혜와 선우도 황보견, 마라승 각우.
하나하나가 중원에서 힘으로는 당해 낼 자가 없다는 이들이라.
후우웅-----!
촤라라라라라---!
쿵! 쿵! 쿵!
다섯 장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 위에 강철로 된 닻 세 개가 박혀 들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강철이라니! 이 비열한 자식들!”
바위산 꼭대기에 있던 능교가 바위를 뚫고 박힌 그것을 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처음부터 그의 예상을 벗어난 대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신호 보내라!”
능교는 결국 복잡한 문제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공적도 공적이지만, 그보다 소중한 건 제 목숨이라.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라!”
능교의 명에 광룡귀면대가 급히 움직였다.
한 병에 여느 민가 일 년 치 수입과 맞먹는 귀한 것이었지만, 재물은 어차피 다시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광룡귀면대원들이 쇠사슬에 기름을 붓고, 흘러내리는 기름에 불을 붙였다.
한편, 꼭대기에서 일어나는 사정을 아래에서도 눈치챘다.
‘병신 같은 새끼. 그러게 감당도 못 할 걸, 나서길 왜 나서.’
붉은색 거미 귀면을 쓴 광룡귀면대 부대주, 지주비(蜘蛛妃)가 겁을 먹고 벌써 손을 뗀 능교를 비웃었다.
그리고 거미 귀면을 쓴 수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위산 틈틈이.
백매단주가 뛰어내린 것과 같은 구멍이 나 있었다.
지주비와 그 수하들이 그 구멍에서 정의맹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오랜만의 전투에, 거미 여왕이 배를 불릴 생각으로 들뜬 웃음을 흘렸다.
촤라라라라---!
사슬이 출렁였다.
“가자!”
바위산을 둘러, 거미 여왕은 자신과 거미들만 아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쳐 놓았다.
설령 적들이 발견한다 해도 특수하게 만든 장갑을 끼지 않고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이니.
그녀와 수하들은 간신히 바위틈에 매달린 놈들을 하나하나 수확하면 그만이리라.
촤라라라라라---!
출렁이는 사슬 소리가 먹잇감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전부 죽여라-!”
특수하게 만든 장갑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사냥감을 조각조각 뜯어 놓아 주리라.
거미들의 여왕의 눈동자에 탐욕이 들어찼다.
* * *
사슬을 타고 순식간에 불길이 내려왔다.
강철에 불이 붙었다면 틀림없이 기름이라.
남궁경옥은 물론 두 번째, 세 번째 배의 선장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무인들을 보았다.
선원들은 기름에 붙은 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느니.
기름에 붙은 불은 물로도 끌 수 없었다.
오히려 물에서 분리된 불붙은 기름이 사방으로 번지거나,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땐, 사슬이고 뭐고, 배 안의 모두가 강물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과 불안은, 마라승 각우가 사슬로 뛰어오르며 말끔히 사라졌다.
“내 뒤를 따라라!”
각우는 그대로 사슬 위를 내달리며, 불길을 밟아 꺼뜨렸다.
그의 별호를 생각해 본다면, 그가 화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
그는 평생 전신을 철사장으로 단련한 소림 최고의 무승이었다.
“먼저 가지.”
두 번째 배에서는 선우도(渲友刀) 황보견이 도를 뽑아 들고 사슬 위를 달렸다.
타고난 완력과 신체 조건으로 권을 중심으로 한 무공이 발전한 황보세가에서, 쾌활삼도(快活三刀) 하나로 고수의 반열에 오른 자였다.
선우도 황보견이 도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고, 불길을 밀고 올라갔다.
진화가 탄 배에선, 적호단주 팽치가 나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진화가 사슬에 손을 대었다.
“뭐지?”
“제가 먼저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진화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적호단주가 선뜻 진화에게 양보했다.
이미 진화가 경지를 넘어선 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남궁의 공자가 익힌 무공을 생각한다면.
아니나 다를까.
파지지지지지직----!
퍼-엉!
쇠사슬을 타고 오른 푸른 불꽃이 기름에 붙은 불과 만나 거세게 타올랐다.
순식간에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불은, 또 한순간에 꺼졌다.
기름에 붙은 불은 끄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태울 것을 없애 버리는 것이라.
검게 그을린 사슬에는 기름 한 방울 남지 않았다.
“그럼.”
“아아.”
진화가 먼저 사슬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슬을 타고 달리며 검을 빼 들었다.
‘능교!’
광룡귀면대 중에서도 능교는 특이한 놈이라.
목숨과 이성을 광기에 내놓은 광룡귀면대에서, 놈은 유별나게 겁이 많았다.
그래서 광룡귀면대 부대주 중 유일하게 싸우기 전에 이런저런 수작을 즐겨 사용했으니.
진화는 능교가 사슬 끝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진화가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였다.
끼이이이익---!
아래에서 귀가 찢어질 듯 불쾌한 금속성이 들려왔다.
이전 생에서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지주비!’
진화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자, 어느덧 바위산에 거미 귀면을 쓴 광룡귀면대원들이 까맣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벌써 바위산 주변에 줄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사슬을 오르는 정의맹 무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누님!’
진화가 몸을 돌렸다.
그때.
쉐에에엑---!
제 목을 노리는 기척에, 진화가 재빨리 검을 세웠다.
카---앙!
진화가 검으로 쳐 낸 그것을 확인했다.
톱니 모양의 날을 가진 수리검이었다.
보통의 수리검과 다른 특이한 날이었지만, 진화에게는 제법 익숙한 모양이었다.
‘능교!’
진화의 눈동자에 번개가 쳤다.
하지만 밑에 아직 남궁진혜가 지주비와 그 수하들 사이에 있었기에, 진화는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복수는 진화의 인생 그 자체였지만, 남궁세가와 가족들은 진화가 두 번의 생을 모두 바칠 정도로 그의 삶보다 중요했다.
“누님!”
진화가 검을 휘두르며, 사슬을 타고 다시 내려갔다.
쉐에에엑---!
진화의 검기가 그의 시야를 방해하던 보이지 않는 강철의 거미줄을 끊어 버렸다.
“으아아아악!”
세 명의 광룡귀면대가 땅으로 떨어지는 사이로, 진화가 남궁진혜를 발견했다.
채----앵!
“이 쌍년이! 너 거기 안 서!”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듯, 남궁진혜의 고성이 절벽 너머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주비가 자유롭게 바위산을 휘저으며 남궁진혜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카-앙!
남궁진혜가 검을 휘둘러 채찍 끝을 잘라 버렸다.
그때 남궁진혜의 양발은 바위 절벽에 난 작은 틈을 딛고 있었고, 그녀의 왼팔은 터질 듯한 이두와 삼두를 빛내며 바위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안정적인 자세.
심지어 몇 번 더 검을 휘두른 남궁진혜는 주변의 광룡귀면대보다 더 거미 같은 자세로, 왼손과 양발을 바위에 박아 가며 절벽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짜증 나는 년! 잡히면 머리채를 다 뜯어 놔 주마!”
남궁진혜가 고성을 지르며 지주비의 뒤를 쫓았다.
쉐에에엑---!
남궁구가 세 개의 사슬 위로 천풍신법을 아슬아슬하게 펼치며 강철 거미줄을 끊어 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진화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챙! 챙챙--!
태연한 진화와 달리 전투가 정의맹에 압도적으로 흘러가고 있진 않았다.
전술학 시간에도 항상 공성이 수성보다 배는 어렵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수성을 하는 쪽이 지형지물의 장점을 모두 가져가는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광마전이 있는 곳답게 수상에서와 달리 정의맹 무인들보다 많은 인원이 꼭대기에서 정의맹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악!”
챙-!
“죽어라, 이 악귀들아!”
“크아아악!”
무기가 부딪치고, 저주 섞인 고성과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다.
귀를 찌르는 죽음의 소리에 모두가 광기에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진화는 누가 얼마나 죽어 가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전투를 이끌고 승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도, 이젠 진화의 몫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몇 사람의 안전을 확인한 진화는, 마음 편하게 제가 원하는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파지지지지직---!
진화가 숲이 우거진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겁쟁이가 숨을 곳은 뻔하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챙-! 챙!
진화가 뇌전을 실어 수리검을 받아쳤다.
퍽! 쩌---억!
수리검이 박힌 나무는 그대로 양쪽으로 쪼개졌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결국 인내심이 다한 듯 능교의 목소리가 진화의 정면에서 들렸다.
진화가 대답 없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바닥에 떨어진 능교의 수리검을 들었다.
능교가 쓰는 수리검은 두 가지 종류였는데, 하나는 톱니로 된 날이 네 개가 붙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손가락을 끼우는 고리가 달린 단창과 같은 것이었다.
진화는 단창같이 생긴 수리검의 고리를 약지에 끼우고, 그것을 돌리면서 자유롭게 양손을 오가게 만들었다.
휘-익!
푹!
“커억!”
진화의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풀숲에 있던 광룡귀면대원의 옆에 나타나 순식간에 목을 찔렀다.
그리고 다시 나무 위로 뛰어오른 진화가 양과 원숭이 귀면을 쓴 광룡귀면대원들의 목을 베었다.
오로지 목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달려들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이는 진화를 쫓다 보면 죽음은 한순간이었다.
게다가 단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라면, 경지를 넘어선 진화에게 보법의 정교함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기의 힘을 빌려 공간을 접듯 보폭을 벌리고, 숨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스며들어 저항 없이 움직이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
푹!
“컥!”
스-윽! 슥-슥-!
기척을 느끼기도 전에, 섬뜩한 소리와 함께 광룡귀면대원들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금강불괴를 이루지 않는 이상, 목은 어디를 찔리든 어디를 베이든, 모든 사람에게 치명적인 급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능교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휙휙- 손가락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진화의 수리검 사용법이었다.
수리검을 약지에 넣고 순식간에 쇄골과 목, 관자놀이를 꿰뚫는 기술.
그리고 곧바로 수리검을 돌려 새끼손가락에 넣고 경동맥을 길게 베고 지나는 연속기.
모두 능교가 주로 사용하는 광룡살예(狂龍殺例)였다.
심지어 경동맥을 깊이 베는 것보다 길게 베어서 출혈을 늘리는 건, 능교의 습관이었다.
“너, 너…… 대체 누구냐!”
깊은 숲이 고요했다.
능교는 등 뒤를 조여드는 불안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면 속 눈동자엔, 경악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때, 알려 준 대로 잘하는 것 같나?”
“너, 대체 누구…… 아니, 너! 그 눈!”
진화의 되물음에 비명 같은 고성을 지르던 능교는, 그제야 진화의 눈을 발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
살기가 자욱하게 드리우는 구름처럼 일렁이고.
그 속에서 수십, 수백 개의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마치 천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혼돈(混沌).
능교가 진화를 알아보았다.
“너, 그 제물실의 괴물!”
“이 수리검. 네가 알려 준 거잖아. 네 덕분에 내가 간수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데.”
진화가 능교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다른 모든 이들이 남궁세가를 위한 복수였다면, 능교 하나만은 오로지 진화를 위한 복수라.
진화는 자신을 괴물로 만든 유년의 원수를 보며, 그가 회수하지 못한 수리검을 하나 더 주워 들었다.
양손에 두 개의 수리검.
“이야, 이거 옛날 생각나는걸. 처음에는 뭣도 몰라서, 그냥 머리를 찍었는데. 지금은 어떨 것 같아?”
진화가 자유자재로 수리검을 움직이며 손가락 사이로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