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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147)화 (147/425)

남궁마제

다할 진(盡) 불 화(火) : 원수와 적(1)

“밑에 있던 년이랑 좀 다르네.”

꼭대기로 올라온 남궁진혜가 상황을 살펴보다 꺼낸 첫마디였다.

남궁진혜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거구로 유명한 팽치에 뒤지지 않는 큰 키와 체격.

흉포한 곰 가면을 쓰고, 곰만큼 우람한 상체를 드러낸 사내가 혼자서 정의맹이 보낸 고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저 바위에 뭔가 있나?”

남궁진혜는 사내 그리고 그와 싸우고 있는 정의맹 고수들이 아닌, 사내의 뒤편을 보았다.

방금까지 싸우던 지주비와는 기세부터 다른 사내.

그자가 아까부터 바위를 빙 둘러가며 싸우고 있지 않은가.

남궁진혜의 본능이 거대한 바위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진화부터 찾자.”

남궁진혜는 위기에 빠진 듯 보이는 자신의 상관을 외면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상관인 팽치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팽치의 위기보다 그의 옆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이들을 더 믿은 것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팽치의 주먹이 빗나간 빈틈을, 마라승 각우가 빠르게 메웠다.

* * *

쉐에에엑---!

파-앗! 팟-!

각우의 금강붕산권에 돌이 깨지고 흙이 튀었다.

다만 목표로 했던 사내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각우의 주먹을 피했다.

“타아아앗!”

각우를 미끼로 적호단주 팽치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퍼---엉!

팽치의 파갑추를 피할 수 없던 사내가 양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힌 여파에 흙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그때, 각우가 그 틈을 노리고 사내의 옆구리로 오형권을 날렸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동작이지만, 디딘 발부터 몸통의 회전까지 전신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파핫--!

탁. 타-악!

사내가 다리를 뻗어 각우의 주먹을 막았다.

무릎부터 유연하게 원을 그리며 정강이로 각우의 팔을 감쌌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각우의 오형권에 실린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흐음! 하아앗!”

사내는 각우에게 받은 반발력까지 실어 양 상박 사이에 감아 놓았던 팽치의 팔을 부수려 했다.

“차아앗-!”

팽치가 사내의 양팔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주먹을 꺼내고, 각우가 빠르게 몸을 뺐다.

“이놈-!”

그들의 사이로, 선우도 황보견이 달려들어 일격을 내리쳤다.

타—앙!

사내는 팽치의 팔을 부수려던 기세 그대로, 주먹을 뻗어 도면의 쳤다.

그리고 빠르게 안으로 파고들어, 달려드는 황보견의 가슴을 때렸다.

퍼-억!

“크윽!”

황보견이 기운이 흐트러지며 울컥 올라온 피를 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적호단주 팽치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어! 대단한 놈이군.”

황보견과 각우, 그리고 자신까지.

무림의 내로라하는 고수 셋을 상대하면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사내를 보며, 팽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각우나 팽치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거기에 유연함까지 갖췄다.

심지어 상대의 힘을 흘리고 내공의 강약을 조절하는 건, 수십 년을 묵은 구렁이만큼 절묘했다.

“네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

“…….”

사내는 그저 무심한 눈으로 세 사람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팽치의 물음에 대한 답은 각우가 알고 있었다.

“웅호(熊浩). 예전 이름은 창명호, 창가장 최고의 후기지수였지.”

각우가 회한이 어린 눈으로 웅호를 보았다.

정확히는 웅호의 머리에 있는 큰 상처 자국.

이마의 반을 덮은 화상 자국을 보며, 각우는 웅호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각우가 열다섯 살쯤. 

처음으로 나간 전쟁터였다.

창가장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익주 북부를 지켜 내야 하는 임무. 하지만 정의맹이 패배하면서, 각우를 비롯한 정의맹 무인들은 살려 달라며 손을 뻗는 이들을 외면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때,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죽은 누군가의 곁에서 울고 있던 소년.

각우는 사형제들과 함께 도망치면서도, 소년의 울음소리 때문에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소년을 만났을 때.

소년은 웅귀면을 쓰고 각우에게 형제보다 가까웠던 사형의 목을 부러뜨렸다.

그날 이후, 각우는 웅호의 상처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희생자였다가 적이 되었고, 다시 원수가 되어 만났구나.’

각우가 착잡한 심경이 어린 눈으로 웅호를 보았다.

‘그날, 내가 네 손을 잡고 도망쳤더라면, 너는 정의맹의 고수가 되었을 것이고 내 사형도 죽지 않았을까?’

수백 번도 했던 생각.

하지만 전쟁에서 생겨난 비참한 악연이 어디 한둘일까.

현실은 저 손에 사형이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각우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광마제의 광룡귀형권을 익힌 듯하지만, 창가장의 오호권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네.

방대한 무공에 대한 연구 또한 역사가 오랜 명문 대파의 힘이라.

각우의 전음에 팽치가 곧바로 의미를 파악했다.

-나한권으로 놈의 몸을 열어 주십시오. 단숨에 운문혈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팽치가 신중한 눈으로 웅호를 노려보았다.

선우도 황보견 역시 도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창가장의 배신자라. 그렇다면 더욱더 놓칠 수 없지!’

옥당혈을 격침당한 터라 여전히 내기가 진탕된 상태였지만, 중요한 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웅호는 갑자기 고요해진 팽치의 기세에 신경을 집중했다.

사납게 날뛰던 기운이 갑자기 정리된 듯 갈무리된 상태.

웅호는 그 모습이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전 고요한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대로 태풍처럼 거센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미타불! 우리의 악연도 여기서 끝내자꾸나!”

마라승 각우가 웅호의 곁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나한권의 요결은 극쾌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듯, 탄력적인 동작의 변환과 강인한 힘의 폭발력이 각우의 다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퍽! 퍽! 퍽! 퍽!

순식간에 몰아붙이는 각우의 공격에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던 웅호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나한들의 스승, 마라승 각우의 나한권은 다른 소림 무승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치명적인 반격이 돌아올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각우의 공격은 매번 급소를 노리면서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퍽! 퍽! 퍼억-!

“헛!”

웅호 또한 각우의 공격이 미끼라고 생각했지만,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팔끼리 부딪히는 순간까지도, 각우가 손가락을 세워 극문혈과 곡지혈을 노렸기 때문이다.

“내 가슴을 열겠다고?”

웅호의 가면 속, 눈빛에 불길이 일었다.

시종일관 냉정하던 그의 목소리에도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너희들이 창가장의 오호권을 그냥 두었을 리 없지.”

웅호는 각우의 의도를 꿰뚫어 본 듯, 각우의 생각을 비웃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각우의 주먹을 뛰어넘어 그의 목을 발로 찼다.

“크억!”

내공을 일으켜 순간적으로 목을 보호했음에도, 각우가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때 갑자기.

“지금이다---!”

약속도 하지 않고 튀어나온 목소리에 팽치의 눈이 커졌다.

뭐라 말리기도 전에, 선우도 황보견이 웅호의 가슴으로 도를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쉐에에엑---!

태산의 황호를 양단하듯, 황보견이 거센 도풍을 일으키며 웅호의 가슴을 향해 횡으로 도를 휘둘렀다.

채---앵!

“안 돼!”

팽치의 안타까운 목소리와 함께, 황보견의 선우도가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몰아치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황보견의 몸이 흔들렸다.

파파파팟-팟--!

“커헉---!”

황보견이 피를 뿜으며 나무에 처박혔다.

그때, 각우가 몸을 날리며 웅호의 뒤를 노렸다.

“악연을 끝내자고? 나야말로 기다리던 바다!”

웅호가 기다렸다는 듯 각우에게 발을 뻗었다.

퍼—억!

각우의 발과 웅호의 발이 부딪히며 서로를 밀어냈다.

“크읏!”

고통에 찬 비명이 새어 나온 건 각우 쪽이었다.

각우의 다리가 충격으로 경련했다.

각우가 다리의 고통을 억지로 외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웅호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안 돼-!”

퍼억---!

잔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우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웅호가 쓰러져 있는 황보견의 머리를 발로 차는 것이 보였다.

주르륵.

나무 기둥에 박힌 황보견의 머리에서 심상치 않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이놈---!”

각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웅호 또한 기다렸다는 듯 각우를 향했다.

퍼-억!

“이 업보를 어찌하려는 것이냐!”

“업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작은 문파의 멸문이나 무인의 죽음, 모두. 그저 전쟁의 수많은 승패 중 하나일 뿐이다.”

“창가장은 무림의 정의와 가문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귀천성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런데 네놈이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이냐!”

각우의 손에 금빛 기운이 어렸다.

퍼----억!

웅호가 각우의 대력금강장을 막아 냈다.

각우의 기운을 두 주먹으로 받아 내며, 웅호의 눈에서 갈무리되지 못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창가장은 패배했을 뿐이다.”

웅호의 양손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점점 불어나더니, 불이 붙은 듯 포악한 기세를 뿜기 시작했다.

“나는, 다신 패배하지 않을 거다! 크아아아앗-!”

웅호의 주먹에서 붉은 곰이 포효하는 듯, 거센 기운이 각우의 금강장을 단숨에 밀어냈다.

퍼-----엉!

웅호의 광룡귀형권에 각우의 자세가 무너지며 밀려났다.

정신없이 밀려 나간 각우가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각우의 눈에, 마무리를 지으려고 달려드는 웅호의 뒤로, 웅호의 기운보다 더 붉고 진한 기운이 보였다.

콰앙-!

마치 공중에서 내리치는 도끼처럼.

팽치의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이 웅호의 등을 내리치며 바닥에 박아 넣었다.

퍼엉-!

쿠웅!

팽치의 기운이 웅호의 등을 꿰뚫으며 바닥까지 내려 앉혔다.

웅호의 몸에서 새어 나온 피가 거미줄처럼 조각조각 난 돌바닥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각우가 웅호를 향해 짧게 불호를 외었다.

“원수를 갚은 건가요? 아니면, 원수에서 다시 원수로?”

각우와 웅호의 어떤 인연을 눈치챈 것인지.

팽치가 의미심장한 농담을 건넸다.

그에 각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덧없을 뿐이지. 슬픈 인연일세.”

“죽어야 끝나는 인연이라니, 끈끈하네요.”

“부디 사바의 고통에서 벗어났길 바랄 뿐이네.”

흔하디흔한, 강호의 은원 하나가 끝이 났을 뿐이었다.

저 밖에는 또 무수히 많은 은원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었다.

각우는 다만, 깊은 내면에 존재하던 자신의 원망과 죄책감을 털고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과 작은 은원을 나눠 가졌던 웅호가 내세에서는 평안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

“이런 젠장! 이 돌덩어리에 뭐가 있을 줄 알았어!”

누군가 웅호의 시신 곁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겨우 평온을 찾았을 웅호의 시신을 대충 발로 차서 굴리는 것이 아닌가.

“남궁진혜-!”

팽치가 각우의 눈치를 보며 소리쳤다.

피 칠갑을 하고 있었지만, 남궁진혜가 분명했다.

“단주, 와서 이거 좀 같이 들어요! 각우 사부, 이거 좀 들어요!”

각우의 얼굴이 웅호의 귀면보다 흉악하게 구겨지는 줄도 모르고, 남궁진혜가 팽치와 각우를 향해 소리쳤다.

“너, 대체-!”

“아, 아무래도 우리 진화가 안에 들어간 것 같아요! 이 돌덩어리가 문인 것 같은데, 빨리 좀 열어 봐요! 우리 진화 코털이라도 다치면, 내가 이 새끼들을 가만두나 봐라!”

“지, 진화?”

“남궁진화가 안에?”

남궁진혜의 말에 놀란 팽치와 각우가 달려갔다.

피에 젖은 웅호의 시체가 풀숲으로 굴러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전쟁 한복판의 현실이었다.

* * *

“형편없이 당했나 보군.”

광마제를 찾아 달려온 무맥의 귀로, 날카로운 비아냥거림이 꽂혔다.

“네놈은……!”

쉐에에엑---!

무맥은 제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마룡아를 휘둘렀다.

“감히,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무맥이 살기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광마제는 아직 깨어나지도 못한 모양이야.”

처음 보는 사내.

그 사내의 시선이 붉은 장포를 입고 누워 있는 노인을 향하자, 무맥이 다시 살기를 폭발시켰다.

“거기서 떨어져라!”

무맥이 뛰어올라 사내를 향해 마룡아를 휘둘렀다.

시퍼런 날이 사내를 베려는 찰나, 사내의 손이 노인의 목을 향했다.

우뚝.

무맥의 마룡아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

“천하의 광마제도 잘 때는 이렇게 평온한 모습이군. 밖에서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으드득! 네놈은 누구냐!”

무맥이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내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광마제의 최종 제물이 나타나서…… 죽이지도, 다치게 하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주인을 찾아온 건가? 눈도 뜨지 못한 주인에게 어떻게 할지 물어보려고?”

“네놈…… 큿!”

계속 비아냥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무맥이 마룡미의 사슬을 움직이려는 찰나.

스스스스슷---!

오싹한 기운이 무맥의 손을 훑어 오르듯 스치곤, 순식간에 목을 죄어 왔다.

무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져, 사내를 보았다.

공간이 일렁이며, 중년 사내의 얼굴 속으로 초로의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로 무맥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당신…… 혼현마제인가?”

무맥은 제 목을 감싼 서늘한 기운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왜 제 귀에는 방울뱀의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광마제가 죽으면 곤란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 어찌하겠나? 좀 도와줄까?”

새까만 눈동자가 요요한 빛을 내며 물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광마제와 그 앞의 혼현마제.

그때.

콰과광------쾅!

바위산을 뒤흔들며 다시 굉음이 울렸다.

무맥의 눈이 불안한 듯, 천장과 혼현마제 사이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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