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다할 진(盡) 불 화(火) : 원수와 적(3)
“커헉!”
무맥이 피를 쏟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가슴을 보았다.
가슴 가운데로 삐죽 나온 마룡미의 송곳을 보며 천천히 쓰러졌다.
“이런…….”
광마제가 안타깝다는 듯 쓰러지는 무맥을 보았다.
그런 광마제에게 진화가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혼낼 건가?”
전형적인 삐뚤어진 소년의 물음 같은 말.
실제로 진화가 제물실에 있을 적, 광마제는 단 한 번도 진화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진화가 간수들을 죽였을 때도.
그도 그럴 것이, 광마제에게 진화는 그를 위해 태어난 기적 그 자체였다.
진화가 무슨 짓을 한들, 그에게 화가 날 리 없었다.
광마제는 이번에도 진화를 혼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허허허허! 그럴 리가. 네가 제 발로 내 앞에 와 있는데.”
진화를 향해 광마제가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진화가 자란 모습을 보자니, 자신이 잠들어 있던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에도 자신의 제물은 다시 제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혼현마제가 혼란스러운 듯 진화와 광마제를 보았다.
무맥은 마룡미에 발린 독 때문에 끊임없이 검은 피를 뱉으면서도, 고개를 광마제를 향해 돌리려 애를 썼다.
마치 한 번이라도 광마제를 더 보겠다는 듯한 몸부림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여기저기 불가해한 놈들 천지로구나!’
혼현마제가 세 사람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커헉. 주, 주군……!”
무맥이 광마제를 향해 마지막 손을 뻗었다.
광마제는 무맥에게도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아이가 살아 있구나, 저렇게 완벽하게. 네 임무는 훌륭하게 마쳤구나.”
“컥! 가, 감사…….”
십이좌회의 습격을 막아 내지 못해 제물을 빼앗기고, 주군까지 깊은 상처를 입었던 지난 과오.
그것을 털어 주는 광마제의 말에, 무맥이 마침내 입가에 미소를 달고 죽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화가 미간을 구겼다.
“저자는 한 일이 없어. 내가 내 발로 왔으니까.”
“그러냐.”
“당신의 부스러기들도 전부 죽였어.”
“호오. 많이 강해진 모양이구나.”
마치 투정 부리는 손자와 그것을 받아 주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날이 오가는 것이, 혼현마제는 그들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광마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날 죽일 수는 없다.”
“지금은.”
진화의 눈빛도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곧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도 날 죽일 수 없지. 당신 부스러기들이 다 죽었으니, 날 끌고 갈 수도 없을 거야.”
한눈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진화의 눈 속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그리고 곧 새파란 검기가 광마제를 향해 날아갔다.
쉐에에에엑---!
퍼---엉!
광마제와 혼현마제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자리를 피했다.
광마제가 누워 있던 침상이 산산조각이 났다.
“허허허! 그래, 오랜만에 놀아 보자는 게로구나!”
광마제의 손에서 검은 강기가 쏘아졌다.
채—앵!
펑!
진화는 검으로 광마제의 검은 강기를 쳐 내고, 다시 광마제에게 달려들었다.
채-앵!
챙! 챙! 챙!
진화의 검과 광마제의 손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고 돌벽이 흔들렸다.
“허허! 제법이로구나!”
광마제가 진화의 검을 여유롭게 막아 내며 말했다.
섬점십삼검뢰 여여일식은 남궁세가 검법 중 몇 없는 공격 일변도의 연속기였는데, 진화는 광마제의 호흡에 맞춰 기운의 강도를 조절하기까지 했다.
힘의 강약을 몰아치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조절하는 건, 시전하는 자나 당하는 자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광마제는 진화가 경지의 벽을 넘었을 뿐 아니라, 싸움에 몹시 익숙해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이만한 경지라니! 허허허! 역시, 역시 혼돈지체가 답이었어!’
광마제의 눈 가득 광기와 같은 희열이 가득했다.
“허허! 허허허허허! 내가 틀리지 않았음이야! 허허허허허!”
광소를 터뜨리는 광마제를 보며, 진화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저 웃음소리!’
진화의 귓가로 광마제의 광소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살면서 진화가 가장 많이 들었던 웃음소리가 바로 광마제의 것이라.
진화가 기억을 가진 첫 순간부터,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의 몸을 헤집으며 끊임없이 들었던 소리였다.
아마도 이전 생의 진화였다면, 웃음이라 하면 광마제의 이 섬뜩한 광소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의 진화는 저를 보며 매일 아침 환하게 웃어 주는 부모를 가졌다.
저를 볼 때마다 웃어 주는 가족을 가졌다.
지금의 진화는 저 웃음소리가 이전처럼 공포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광마제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진화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전 생에 제가 죽기 직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찢으면서 들었던 그 광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 많이 웃어 둬라. 그 웃음이 비명으로 바뀔 때가 머지않았으니까.’
진화가 전신의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당신은 이미 틀렸어.”
진화의 검에서 강기가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듯 솟아올랐다.
섬전십삼검뢰 붕격우산--!
콰-앙!
쾅!
쏟아지는 빗줄기가 태산을 무너뜨리는 법이었다.
진화는 옷자락을 적시듯 광마제를 몰아붙이고, 마침내 작은 바윗돌 하나 빼내듯 광마제의 팔뚝을 베었다.
쉐에에엑-!
“이놈-!”
광마제의 옷자락이 떨어지고, 갈라진 살결 사이로 피가 흘렀다.
웃고 있던 광마제의 표정이 진중하게 변하고, 어깨부터 손까지 검은 기운이 거대하게 피어올랐다.
마치 운무 속에 흑룡이 꿈틀대듯 검은 강기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운의 소용돌이로 만들어진 난폭한 흑룡이 곧 진화를 향해 이를 드러내었다.
그들의 싸움에서 물러나 있던 혼현마제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광마제의 싸움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로구나. 저것이 역천제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광룡귀천공(狂龍歸天功)인가!’
혼현마제가 광마제의 무공을 샅샅이 살피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크아아아아---!
광마제가 권강을 뿜고, 흑룡이 입을 벌리고 진화를 향해 날아갔다.
진화 역시 검을 들고 뛰어올랐다.
“타아아앗---!”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한 번개가 흑룡의 머리를 찍듯이 갈랐다.
콰과광----쾅!
콰-앙!
거대한 폭발이 지축을 흔들었다.
금이 가 있던 천장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혼현마제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쳐 내고, 급하게 앞을 살폈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멀쩡하게 서 있는 인영.
광마제였다.
그리고 그 앞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혼현마제는 그 사람이 진화라 확신했다.
‘설마……?’
먼지가 사라지고, 두 인명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무릎을 꿇고 있던 진화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굳은 얼굴을 한 광마제가 진화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날 죽이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노기를 참는 듯한 얼굴로 광마제가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은 그렇겠지.”
처음과 같이, 진화는 담담했다.
진화의 답에 광마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혼현마제 또한 진화가 말하는 ‘지금은’이라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위험을 자초한 것이냐?”
광마제는 마치 진화를 걱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평생 광마제를 죽일 생각만 하며 살아왔던 진화가 그 속을 모를까.
광마제는 진화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이리라.
진화가 광마제를 향해 여유롭게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듯, 지금은 당신도 날 끌고 갈 수 없다고.”
진화의 시선이 힐끔 혼현마제를 향했다.
혼현마제는 광마제와 진화의 사이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진화가 광마제의 최종 제물인 이상, 광마제의 앞에서 진화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도 없었으니.
혼현마제는 당장 진화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눈을 하고도, 한쪽으로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진화가 씨익 여유롭게 웃으며, 광마제를 마주 보았다.
“내가 무맥을 죽였어. 그만한 자를 다시 만들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시간이 걸리겠지. 아직 많이 아파 보이네. 늙었으니까 몸의 회복도 느릴 거야.”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이냐?”
“시간은 내 편이야.”
진화의 말에 광마제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제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혼현마제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광마제를 확인하러 온 것이란 말인가! 저를 죽이지 못할 거란 확신만으로, 목숨을 걸고?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온 것이라고?’
실제로 진화를 알아본 무맥은 진화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화는 오랜만에 깨어난 광마제와 손 속을 나누고도 대등하게 서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러 온 것이구나! 광마제의 상태를 확인하고, 광마제를 죽일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려 한 것이야! 광마제, 대체 무슨 괴물을 키운 것이냐!’
혼현마제가 경악을 금치 못한 눈으로 진화와 광마제를 보았다.
“도망갈 테면 가 봐.”
진화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이노---옴!
이번에야말로 광마제의 얼굴이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광마제의 전신에서 검은 강기가 요동치며 주변의 바위들을 흔들었다.
진화가 긴장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손을 뻗어 단전 앞으로 단단하게 잡고, 얼굴을 가로지른 채 검날을 세운 모습.
마지막 순간에 광마제를 쓰러뜨린 제왕검을 빼다 박은 듯한 자세였다.
“감히! 주제넘은 꿈을 꾸는구나-!”
광마제의 두 눈이 붉게 빛나는 것과 동시에, 양손에서 흑룡이 꿈틀거렸다.
“피육으로 만들어진 육신 따위, 고쳐 쓰면 그만이다!”
크아아아아----!
이번에야말로 진화의 몸, 어느 한군데를 뜯어 삼킬 듯.
광포한 기세로 광마제의 팔을 휘돌아 나온 흑룡이 곧장 진화에게 날아갔다.
그런데 그때, 진화가 갑자기 검을 내렸다.
“……!”
광마제가 놀란 눈을 떴다.
‘죽을 셈인가!’
순간 그리 생각할 정도로, 혼현마제 또한 경악한 얼굴로 진화를 보았다.
그러나 진화가 검을 내린 순간.
그 뒤로 푸르른 청룡의 기운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퍼어어어어엉---!
어디선가 날아든 청룡의 기운이 흑룡의 목덜미를 물어뜯듯 광마제의 기운을 끊어 내고, 금빛과 붉은빛 강기가 광마제의 기운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진화야-----!”
음기와 양기를 다루며, 그 누구보다 넓어진 기감.
기어이 바위를 들어내고 제 누이가 온 것이다.
딱 맞은 시간에.
“이 허연 파 뿌리 같은 영감탱이가 누굴 건드려!”
무너져 내린 천장에서 남궁진혜가 뛰어내리는 모습에, 진화가 저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물러나지.
각우와 팽치까지 급하게 뛰어내리는 것을 보며, 혼현마제가 광마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놈의 말대로, 지금 당장 놈을 데려갈 수 없네. 잠시 물러났다 다시 기회를 찾으면 되네.
혼현마제의 전음에도 광마제의 눈은 진화를 향해 있었다.
“으악! 진화야, 괜찮아? 다친 곳은?”
남궁진혜가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듯한 진화의 모습에 고함을 지르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계집애가 으악이라니……. 쯧.”
“혼현마제 그리고…… 광마제가 살아 있었군!”
팽치와 각우가 온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혼현마제와 광마제를 경계했다.
-구훤!
혼현마제가 광마제의 이름까지 불렀다.
동시에 진화의 전음이 들렸다.
-도망가 봐. 지금은 당신을 죽일 수 없어 놓아주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그땐 당신을 죽일 거다. 이번엔 내 쪽에서 쫓을 차례야. 쥐 떼를 쫓듯 구멍 하나하나 찾아서, 당신의 모든 수족을 죽일 거다. 그리고 늙고 병든 당신의 몸도 찾아서 찢어 죽여 주지.
광마제의 눈이 커졌다.
어릴 적에도 광마제를 죽일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던 진화였다.
그런 진화가, 다음번엔 죽이겠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허허! 허허허허허허! 그래, 다음에 두고 보자꾸나!”
광마제가 광소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바위산이 흔들렸다.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벽이 무너집니다!”
“이런, 우리도 어서 빠져나가야 하네!”
“저들은……!”
“늦었어! 게다가 우리만으로 잡을 수도 없네. 어서 이곳을 나가지!”
바위산의 내부가 무너지는 소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급박한 상황에 팽치와 각우가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쿵! 쿵쿵---!
콰광---!
무너진 벽 너머로 강변이 보이고, 그 위로도 바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어서 가자!”
“진화야, 갈 수 있겠어? 누님에게 업혀!”
“저는 괜찮…….”
진화가 거절하기도 전에, 남궁진혜가 피 칠갑이 된 진화를 등에 올렸다.
그리고 팽치와 각우가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꼼짝없이 남궁진혜의 등에 업히게 된 진화까지, 모두 급하게 강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