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보배 진(珍) 꽃 화(花) : 용이 잠드는 곳(3)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무림에서 빠지지 않은 화두였다.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이라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제왕검 남궁강일 것이다.
광마제의 생존으로 빛이 바래지긴 했으나 어쨌든 귀천성 역천마제와 광마제를 모두 상대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답변자가 사파인이라면, 사패천주 낭아왕 한구혈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야말로 역천마제를 주저앉힌 일격을 가한 인물이라 전해졌으니까.
하지만 적아의 구분 없이 솔직하게 말하라면, 단언컨대 천하제일인은 귀천성주 역천마제 파륜이라 할 것이다.
십이좌회의 목숨을 건 협공에도 역천마제는 살아남았다.
아니, 그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두 명을 죽이고 두 명은 불구로 만들었다.
정과 사, 관부의 모든 고수들이 합세하고 귀천성의 전진을 겨우 막아 내었을 뿐이었다.
그런 역천마제가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니.
그 소식만으로도 전 무림이 들썩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제왕검과 사패천주, 역천마제를 말할 때, 진화는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의천검주 제왕밀검 남궁호명.
남궁호명이 세간에 모습을 감춘 지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파 무림에는 여전히 의천검의 전설이 떠돌고 있었고, 남궁세가에서는 제왕검과 비견되는 존경을 받는 유일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의천검주가 사실 남궁가주와 불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십 대 중년인인 것을 뉘가 알까.
의천검주 남궁호명은 전쟁터의 수많은 전설과 제왕검 못지않은 위명을, 십 대부터 겨우 약관 남짓한 나이에 이룩했다. 남궁가주와 남궁경이 제왕검의 부재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는 사선을 넘나들며 남궁세가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가주와 남궁경이 나이 비슷한 숙부를 깍듯하게 존중하는 이유였다.
“스승님.”
그 대단한 사내가 이번 생에 진화의 스승이었다.
‘세대를 뛰어넘어 제왕검에 비견되는 사내가, 남궁세가 구석에서 장작으로 이쑤시개나 만들고 있을 줄 누가 알까.’
진화는 저를 본체만체하고 이쑤시개 깎기에 집중하고 있는 남궁호명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남궁경보다는 작지만 남궁가주보다는 큰 체구.
서른 남짓해 보이는 호방한 얼굴의 젊고 건장한 사내가 쪼그려 앉아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심지어 손에 든 것은 도끼였다.
“대체 검은 어디에 두고 도끼로 그러고 계십니까?”
“내 검은 네가 가져갔잖느냐, 돌려주러 온 게냐?”
“설마요.”
“망할, 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지랄이야? 세상에 물어봐라. 대체 어느 막돼먹은 제자 놈이 스승에게 내기로 검을 따 가는…… 헉!”
이쑤시개 수천 개를 완성한 남궁호명이 그제야 진화에게 고개를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실로 꼬박 삼 년 만에 보는 제자.
“어찌하여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냐!”
남궁호명이 진화를 향해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진화도 눈살을 찌푸렸다.
“반갑게 맞아 주시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질겁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입술 내밀고 툴툴거리지 마라. 귀엽잖아!”
“……그게 왜 문제입니까? 어머니는 좋아하시던데…….”
진화가 슬그머니 입술을 집어넣으며 구시렁거렸다.
“역시, 어찌 보일지 다 알고 그러는 것이었지. 빌어먹을 놈! 네 속에 뭐가 들었는지 뻔히 아는데, 껍데기가 반짝반짝하다고 해서 속을 성싶더냐? 다른 사람은 다 속아도, 나는 안 속는다.”
질색하는 남궁호명을 보며, 진화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말처럼 남궁호명만큼 진화에 대해 잘 아는 존재도 없었으니.
정의무학관으로 떠나기 전까지, 진화는 깨달음을 얻은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남궁호명과 깨달음을 나누고 검을 나누었다.
진화는 제 육체와 무공을 알기 위해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여야 했고, 남궁호명은 그것을 모두 받아 주었다.
그러니 어쩌면 남궁호명이야말로,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진화가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진화는 진심으로 남궁호명을 스승으로 받아들였고, 남궁호명도 그런 진화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남궁호명은 진화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안이 그렇게 흉측해진 것이냐?”
남궁호명이 슬쩍 진화를 스쳐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진화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편한 얼굴로 남궁호명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 * *
삼 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들려줄 이야기도 많고 나눌 말도 많았다.
남궁호명은 훌쩍 자란 제자의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꼈고, 진화는 남궁호명의 모습에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음을 실감했다.
“광마제를 만났습니다.”
“그놈을?”
“죽이진 못했습니다.”
“흥, 당연하지.”
진화의 말에, 남궁호명이 새로 만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코웃음을 쳤다.
“경지 하나 넘었다고 그 영감탱이를 죽일 수 있을 거였다면, 대전쟁 때 벌써 의천검을 그 영감탱이 내장에 쑤셔 넣었을 거다.”
“많이 약해졌더군요.”
“……네가 그 영감의 강함을 안다고?”
남궁호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를 알아보고도 잡지 못했습니다, 혼현마제도 함께 있었는데.”
“둘이나 있는 데에 갔다고? 네가 미친 게로구나!”
진화의 말에, 남궁호명이 콧김을 뿜었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무모했다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약해진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허! 애초에 그자가 얼마나 강했는지 네가 알기는 하고?”
진화의 덤덤한 말에 남궁호명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의 말투에는 싸늘한 냉소마저 섞여 있었다.
“널 구해 올 때부터, 그 영감탱이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제왕검의 천검지뢰를 단전에 뚜드려 맞고도 산 거야. 기가 막힌 영감탱이지! ……전성기 때의 그 영감을 본 적이 있었다. 도무지 손을 뻗어도 닿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전부 다 그랬다. 우리는 전부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지옥의 마신! 흐흐흐! 역천마제 하나로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광마제는 유일하게 역천마제에 버금가는 자였으니까. 그런 두 놈이 편을 먹었어! 그런 불공평한 싸움이 어디 있냐, 미친 새끼들! 콧대 높은 정파와 반골투성이 사파가 손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고, 황제까지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싸워야 했으니까. 그런 자들이었다.”
“…….”
진화의 시선이 남궁호명의 손에 가 닿았다.
그는 아주 잠깐 이전의 역천마제와 광마제에 대해 떠올렸을 뿐인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고통스러워서였다.
시일이 이토록 지났음에도, 남궁호명은 여전히 그때의 고통이 생생했다.
“사부로서가 아니라 그 시절을 아는 동료로서 충고한다면, 복수는 꿈도 꾸지 말고 그냥 튀어라. 그게 편할 거다.”
“그래도 사부는 싸우실 거잖아요.”
“다 데리고 튀기에는 남은 식구가 너무 많으니까.”
남궁호명의 단호한 대답에 진화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처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는 노총각이면서 책임 의식이 강하시네요.”
“뭐야, 이 자식아? 너, 그렇게 생겨 가지고 못된 말 좀 하지 말랬지!”
“하하하, 그러니까 이제라도 장가 좀 가세요.”
“됐어! 괜히 뉘 집 귀한 딸을 고생시키라고.”
진화의 비수 같은 농담에 남궁호명 또한 진화의 볼을 잡아당길 듯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서로에게 짓궂게 굴며 잠시 웃음을 나누었지만, 이내 씁쓸하게 끝이 났다.
남궁호명이 혼인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진화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죽을 겁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진화가 남궁호명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에 남궁호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살고 나면 그때 말해라.”
“정말 그때까지 총각으로 있으려고요? 씨가 남아 있어야 자손도 볼 텐데, 그때쯤이면 사부는 다 늙어 비틀어진…….”
“야! 내가 너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눈 동그랗게 뜨고 악담 하지 말랬지!”
또다시 날아든 진화의 비수에 남궁호명이 버럭 했다.
그렇게 잠시 아웅다웅했다.
그사이 남궁호명은 안정을 찾고 진화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남궁호명의 손 떨림이 멈추고 날카롭던 진화의 속이 가라앉았을 즈음.
남궁호명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안 그래도 귀천성 놈들이 역천대법을 준비하며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진화의 대답에 남궁호명이 피식 웃었다.
“아니, 전쟁은 정의맹에서 시작할 거다.”
“……네?”
남궁호명의 단정적인 말에 진화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누구보다 전쟁과 귀천성을 두려워하는 정의맹이 전쟁을 시작할 거라니.
진화로선 쉽게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에 남궁호명이 피식 웃었다.
“네가 정말 정의맹의 윗대가리들을 너무 띄엄띄엄 보고 있구나. 정치질이나 하면서 정의맹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도, 나름 그 무지막지한 귀천성을 한번 주저앉힌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귀천성 잔당 놈들을 효과적으로 누르고 있었기도 했고. 질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안 하니까 그 안에서 땅따먹기나 하고 앉았지. 그렇게 악다구니를 해서라도 힘을 모아,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면서.”
“세력을 온존하려 했던 것이 모두 전쟁을 대비해서라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면? 흐흐흐, 본래 가진 놈들이 더한 법이다. 정파야말로, 중원에서 누대로 기득권을 가졌던 세력이야. 그들이 정의롭기만 했다면 그럴 수 있었겠느냐. 광룡귀면대를 치면서 꽤 많이 죽었다지?”
“……거기서 광마제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한 사람이, 저만이 아니었던 거로군요.”
남궁호명의 말에, 진화는 대번에 정의맹주와 제갈가주를 떠올렸다.
진화가 만난 정의맹주는 선한 미소를 짓는 자애로운 스님인 동시에 끝내 천살지체를 교화하여 숨기고 있던 사람이었고, 제갈가주는 가문을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를 사람이었다.
그리고 문파의 이득에 따라 야합과 반목을 밥 먹듯이 하는 이들 또한.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수십, 수백의 희생 따위에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을 자들이다. 이번에 정의맹 놈들도 혼현마제와 광마제의 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귀천성이 제힘을 찾기 전에 놈들을 끝장내려 하지 않겠느냐.”
남궁호명의 말에 진화의 표정이 굳었다.
저번 광룡귀면대를 괴멸시킨 일도, 모든 문파들이 공로를 나눠 가지면서 무림의 긴장만 고조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의맹과 정의무학관 모두, 모든 임무를 귀천성을 추적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정해진 수순처럼 진행되었다.
‘큰 그림을 그린 것인가…….’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전 생에 남궁세가와 몇몇 문파를 귀천성에 내던지고 자신들의 세를 불리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찾든, 못 찾든, 먼저 전쟁을 시작하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허허, 글쎄.”
진화의 말에 남궁호명이 웃음소릴 흘렸다.
어느새 남궁호명의 눈은 청림 밖, 가주전으로 향했다.
“한동안 우리 남궁세가도 소란스러울 것이다.”
“싸울 준비를 하느라고요?”
진화의 물음에 남궁호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잖아. 그놈들과 싸우느니 도망치거나 숨는 게 낫다고. 나만 해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남궁세가에도 귀천성과 싸워 이겨 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쯤에서 발을 빼고 세가의 안위만 도모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그래. 도망을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지. 귀천성 놈들은 우리가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해서 내버려 둘 자들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직 그걸 모르는 자들이 있어서 문제지.”
남궁호명이 복잡한 눈빛을 하고 청림 밖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복잡한 다툼이 싫어서 이 청림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이제 와서 저 소란 속에 끼어들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스승님, 만약 스승님을 독살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뭐, 인마?”
“어지간하게 먹는 것으로는 안 되겠지요?”
“허허허허허! ……질문의 의도가 뭐냐?”
저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스승을 독살하는 법을 묻는 제자를 보라.
남궁호명은 제 속이 충분히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다.
“너 그렇게 선한 얼굴로 물으면, 내가 깜박 속아서 대답해 줄 줄 알았느냐?
“대체 스승님같이 따로 사는 독거남을 어떻게 중독시킬 수 있을까요?”
진화는 끝까지 진지하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 남궁세가의 위기 속에 사라진 인물 중에는 그의 스승인 의천검주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다음 날.
이전처럼 청림의 오두막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진화가 남궁호명을 깨웠다.
“아우, 어린놈이 아침잠도 없어. ……헉! 뭐, 뭐냐?”
남궁호명은 눈을 뜨자마자 시퍼런 칼날이 제 목에 닿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드디어 이 스승을 암살하려는 것이냐?”
“이상한 소리 마시고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 상황에?”
검을 들고 눈을 빛내는 진화를 보며, 남궁호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쉐-엑
목을 스치고 지나간 검풍에 남궁호명이 놀란 눈을 떴다.
남궁호명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제가 드디어 스승님을 죽일 방법을 알아낸 듯합니다!”
“……어, 나도 알 것 같구나.”
남궁호명이 황당하다는 듯 진화를 노려보았다.
그때, 진화가 태연하게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검도 제가 한 번 더 쓰겠습니다.”
“……허!”
남궁호명은 너무 기가 막혀서 숨을 내뱉는 것조차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