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아름다운 돌 진(瑨) 칼날 번쩍거릴 화(錵) : 명문이란(2)
금판수호 남궁범의 본명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세가에 큰 공을 세우고, 가주인 남궁성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고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남궁세가에는 실제로 직계와 혈연관계인 방계보다 남궁범처럼 성을 하사받고 ‘남궁’이 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전에 남궁문이나 남궁백도 남궁도에 의해 거둬지면서 성을 하사받았고, 남궁세가의 장로 자리까지 올랐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남궁도와 함께 축출되었지만, 그들의 자리를 대체한 인물들도 모두 남궁과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그만큼 남궁세가는 인재를 세가에 영입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능력만 있다면 그들을 가문의 요직에 앉혀 주었다.
일각에서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외부인을 요직에 앉히는 남궁세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반란을 주도한 건 직계 출신 남궁도였으니, 세가에 대한 충성심과 혈연은 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했을 뿐이었다.
남궁세가는 여전히 외부 출신의 인재를 중용했다.
그것이 양주의 수많은 인재들이 지금도 남궁세가로 모여드는 이유였다.
하지만 남궁범은 좀 달랐다.
그는 본래 돈을 받고 표사 노릇을 해 주던 낭인이었다.
남궁범이 남궁세가에 발을 들이게 된 것도, 대전쟁 때에 표사로 고용되어서였다.
남궁범이 진화와 일행을 위해 만찬을 마련했다.
“거기서 제왕무적단주가 표사들에게 외치더라고. ‘어서 검 들어, 새끼들아! 저기 있는 표물이 네 고향에 있는 처자식들 먹여 살릴 돈이라고! 네놈들이 죽어도, 저것만 있으면 처자식들은 먹고산다!’ 어찌나 살벌하게 외치는지…….”
“그래서요?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 무사들이 검을 들었나요?”
“하하하하! 아닐세. 그 뒤에 말이 더 남았어. 그 뒤에 제왕무단주가 ‘네놈들 목숨값으로, 마누라는 재가하고 자식새끼는 계부만 찾겠지! 부모님은 남은 자식이라고 동생 새끼만 찾을 거고! 애먼 놈들만 호강하는 거다! 그러길 바라는 거야?’라고 하는 거야.”
비정한 현실 세계 이야기였다.
“…….”
처자식이나 부모와 관련이 없는 현오를 제외한 모두가, 진화를 보았다.
진화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눈을 피했다.
남은 가족의 행복을 빌어 주진 못할망정, 나 없인 모두의 행복도 없다는 마음가짐.
완전 소인배 같지 않은가.
“그 말에 표사들 눈깔이 다 뒤집혔지. 죽기 직전인데 웃음이 나오더라고.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제왕검의 아들이 외친 게 그런 말이라니. 하하하하!”
남궁범이 지금 생각해도 유쾌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죽기 전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좀 낫다.
하지만 진화는 알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온전한 진심이라는 것을.
남궁경을 알고 있는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진화의 눈을 피하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완전 솔직하지 않나?”
“네?”
“목숨이 경각에 달한 표사들에게 거창한 대의나 정의, 충성심 따윈 전혀 와닿지 않았어. 다들 살고 싶은 놈들뿐이었거든. 그 위험한 전쟁 중에도 먹고살려고 더 위험한 일을 하던 미친놈들에겐, 살아갈 이유 말고는 어떤 말도 필요 없었지. 그런데 그걸 제왕검의 아들이 알아줄 줄 누가 알았겠어?”
남궁범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 전투에서 이기고 우린 표물을 실은 배를 띄웠지. 나는 그길로 장강에 있는 청하상단에 들어갔네. 밑에 놈들을 굶겨 죽이진 않겠구나 싶었거든. 그런 내가 지금 청해상단의 책임자가 되어서 남궁세가 장로 노릇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결국 남궁경의 이상한 연설에 감화되어 남궁세가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진화는 조금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남궁범을 보았다.
남궁구의 말에 따르면 청해의 물범, 주판알 튕기는 물귀신으로 불린다 했다.
그만큼 능력만큼이나 탐욕도 있는 사람 같았는데, 본인의 말을 들으면 강호의 낭만에 빠져서 남궁세가 장로까지 오른 사람 같지 않은가.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어이쿠, 도련님, 이것도 드셔 보십시오! 금호에서 잡은 홍웅어로 만든 겁니다.”
만찬 내내, 남궁범은 민망할 정도로 살가운 태도로 진화의 접시에 생선 살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가 조금 난처한 눈으로 옆에 앉은 어떤 여인을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진화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하하하! 도련님, 괜찮습니다. 저 양반이 지금도 표행 나갈 때마다, 남은 재산 외동딸인 제가 다 먹을까 봐 꼭 살아오겠다고 다짐하고 가는 양반입니다. 늘 찬밥이라, 새삼 서운하지도 않습니다. 하하하하!”
남궁범의 딸이라고 한 남궁금영은 여느 사내 못지않게 호탕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남궁범이 코웃음을 쳤다.
“흥, 네놈이 서운할 것이 뭐가 있다고! 내 덕에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놈이.”
남궁범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궁금영은 부인과 사별하고 남은 유일한 가족이자 외동딸이라 했다.
남궁범이 그녀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그녀 자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남궁금영은 처음 보는 사내들 앞에서도 호탕하게 웃었고, 나하연과 술 내기를 할 정도로 술도 즐겼다.
무림에서도 이름난 미녀인 나하연과 당혜군에게 두툼한 풍채를 자랑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았고, 진화에게 곧 창궁무애단에 들 것이라 말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세간에서 여인들에게 요구하는 조신함이나 우아함을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본인은 물론 남궁범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 남궁금영의 생일에는, 뱃놀이 대신 수상전투대회를 열었다고 했다.
남궁금영이 그녀 자체로 있게 하는 것.
남궁범이 남궁금영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탁.
나하연이 남궁금영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으며 귓속말을 했다.
“너, 내 진화 공자에게 웃음 치지 마라.”
“응? 하하하! 내가 그랬나? 가만히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미모라. 그런데, 왜 우리 도련님이 네 진화 공자인가?”
탁.
“헛소리 말고, 남궁 공자님이라고 불러라.”
남궁금영이 나하연이 준 술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켜고, 눈을 번뜩이며 나하연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휴, 미친년이 둘이네.”
당혜군이 나하연과 남궁금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다시 경쟁적으로 술을 들이켜든 말든, 남궁범은 진화의 밥그릇에 고기를 쌓아 주기 바빴다.
“귀한 손님들이 와서 참으로 좋은 밤입니다. 벌써 안쪽에 침소를 마련해 두었으니, 편하게 먹고 마시다 가시면 됩니다! 허허허!”
남궁범은 말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오는 음식과 술로 진화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 * *
그 시간.
흑사문주는 남궁세가 지부가 있는 청해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얼굴 옆면에 있는 검은 뱀 문신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주변에는 흑사문 무인들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나 청해루 점원들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흑사문주는 태연하게, 앞에 앉은 인영의 잔을 채웠다.
“귀하가 찾는 제물이 저 안에 있다는군요.”
흑사문주의 앞에 앉은 인영은 검은 갓과 가림막으로 머리부터 발까지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가림막 안으로 인영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흑사문주의 말을 듣고,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탁자 위에 은자 하나를 더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은자를 본 흑사문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여기가 어딘지 모르십니까? 청해루, 남궁세가 지부입니다. 게다가 이번 제물이 그 청해상단의 책임자인 남궁범의 여식이랍니다. 이 일을 하고 나면, 우리 흑사문은 신양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흑사문주의 입꼬리에 닿아 있는 뱀 꼬리가 요사스럽게 꿈틀거렸다.
“요구 조건을 말해 보라.”
인영이 짧게 말했다.
본론을 요구하는 인영의 말에, 흑사문주가 입꼬리를 올렸다.
“애들 목숨값에, 흑사문 전체가 이주해서 자리를 잡을 비용까지 주셔야겠습니다. 어차피 마지막 제물이 아닙니까. 어쩌면…… 옮겨 간 곳에서도 같은 일을 해 드릴 수도 있고…….”
흑사문주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얼굴에 있던 흑사가 유혹적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인영이 금자 하나를 올렸다.
흑사문주의 눈동자가 커졌다.
“제물을 가져와라. 그럼 새로 정착한 곳에서 하나를 더 주지.”
“흐흐흐흐, 우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일 같은 시간, 수하들이 남궁금영을 데리러 갈 것입니다.”
흑사문주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금자를 손에 움켜쥐었다.
흑사문주가 그의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석도는 우대삼의 말을 듣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문주님이 미친 거 아닙니까?”
“어허, 목소리 죽이게!”
우대삼이 화들짝 놀라며, 석도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아, 놔 봐요!”
석도가 우대삼의 손을 떼었다.
우대삼의 호들갑에 목소리를 죽였지만, 여전히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눈앞에서 금덩어리를 놓치자는 말입니까? 부장님은 문주님께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그럼 어떻게 해! 내 목을 잡고 죽이려고 하시는데! 정 그러면, 네가 직접 가서 말해 보든지!”
석도의 타박에 우대삼도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버럭 했다.
그에 석도의 기세가 조금 눌렸다.
“주, 죽이려고 해요?”
“그래! 죽는 줄 알았다! 오줌 지렸다고!”
석도의 물음에 우대삼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펄쩍 뛰었다.
“아, 아니, 왜요? 좋은 건수를 물어 갔는데!”
“닥치고 시키는 일만 하래. 큰 물주를 물었는데, 괜한 일 하다가 일 망치면 가만히 안 둔대!”
“아, 그럼, 진짜 이대로 물러나요?”
“하아, 그럼 어떡해! 네가 가서 다시 말할래?”
“아, 아니. 나는 그냥 아까우니까…….”
우대삼이 버럭버럭하는 말에, 석도가 물러섰다.
눈앞에서 황금을 잃어버리는 기분이었지만, 문주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쓰벌, 내가 진짜 간 떨려서 못해 먹겠네.”
우대삼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사실 우대삼과 석도는 오랫동안 달소항에서 노예 거래를 해 오던 자들로, 거래하던 유통로가 흑사에게 먹히면서 흑사문에 들어간 경우였다.
상재가 밝고 경험이 많은 우대삼이 흑사의 눈에 띄어서 운반책으로 중용되고 있었으나, 애초에 충성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일단 좀 있어 봐.”
“왜, 왜요?”
“이번에 찾는 제물이 남궁범의 딸인가 봐.”
“예에? 그게…… 헙!”
크게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석도의 입을 우대삼이 급히 막았다.
“쉿-!”
끄덕끄덕.
석도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제 어쩌려고요? 남궁범 아니, 남궁세가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니까. 문주도 이번에 큰돈 뜯어내고 자리를 옮기려는 거 같더라고.”
“옮겨요?”
신양이 아무리 사패천의 영역이라도, 남궁과 척지고 이렇게 가까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흑사가 아니라, 흑사 할아버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인간이 큰 물주라고 했잖아! 흑사문도 다른 데 가서 거래를 계속하는 거지.”
“우리도요?”
“그럼,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것들을 운반해?”
“부장은 어쩌시려고요?”
“인마. 어차피 남궁 손에 죽으나, 문주 손에 죽으나. 우리도 이판사판이야. 어차피 흑사문이 신양 바닥을 떠나야 하는 거면, 우리도 떠야지.”
우대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들이 흑사문 소속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남궁세가와 척지게 되는 것이라면, 흑사문 소속인 그들도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었다.
우대삼도 결단이 필요했다.
“그 계집이랑 사내놈들이 간 곳도 청해루 장원이라며?”
우대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 그렇죠. 아! 설마……?”
“어차피 뜨는 거, 마지막으로 한탕 하자고. 제물만 제대로 넘기면, 문주도 모를 거야.”
오십 대 중반, 곧 환갑을 바라볼 나이. 이 바닥에 있는 대부분은 그 나이가 되면 죽거나 은퇴를 한다.
우대삼은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떠나기 전,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방 아니겠어?”
“그렇죠! 걱정 마세요. 제가 애들 모아 놓겠습니다.”
우대삼의 말에 석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날카로운 눈빛은 먹이를 발견한 쥐의 것처럼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 * *
다음 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진화가 스르륵 눈을 떴다.
소란해진 밤공기.
진화의 눈이 어둠 속에서 까맣게 가라앉았다.
공기 속으로 흩어지듯 진화의 신영과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진화의 방으로 검은 복면을 쓴 이들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없어?”
“난들 알아?”
매우 당황한 듯 속삭이는 목소리.
그들 사이로 진화가 시퍼런 칼날을 들이밀었다.
“웬 놈들이냐?”
시린 칼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이고, 그 빛 속으로 진화의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그때, 밖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소리를 듣자마자, 진화가 검을 비틀어 복면인의 목 가까이 들이밀었다.
인질로 잡힌 복면인과 진화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남은 이들은 당황한 기색을 금치 못했다.
“사내?”
“왜 사내야?”
그들로서는 설마 남궁범의 유일한 여식의 처소에 다른 이가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남궁범이 장원의 가장 귀한 처소에 진화를 모신 탓이었다.
그게 하필 남궁금영의 처소였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