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아름다운 돌 진(瑨) 칼날 번쩍거릴 화(錵) : 명문이란(4)
마침 해가 뜨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들 앞으로 해가 뜨고 있는 하늘은, 마치 노을이 지는 하늘처럼 느껴졌다.
일출이나 일몰이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건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왜 그것을 다르게 느끼는 걸까.
해와 하늘은 그대로인데 말이다.
결국 사람이었다.
지금 남궁범이 일출을 보며 일몰을 느끼는 것도, 오늘의 일출이 여느 때와 달랐던 게 아니라 그가 여느 때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라.
어슬렁어슬렁.
‘허! 흑사문에 쳐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밤 사냥을 나가는 맹수 같지 않은가.’
남궁범은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진화 일행을 보며 강가를 노닐던 산군을 떠올렸다.
어느 산골에 숨어 있지 않은 이상, 흑사문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청해상단에서 쳐들어온다는 것을 들었는지, 흑사문 앞으로는 무기를 든 사내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새벽부터 바빠야 할 달소항 근처 저자에는 평소와 달리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숨은 시선들만이 흑사문과 청해상단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 그새 많이도 모였네.”
“도련님, 이제 어쩔 거야?”
모두 진화를 보았다.
어쨌든 남궁세가의 일인 데다, 얼마 전에 했던 동의제에서도 진화가 동의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본인이 힘 좀 쓴다고 착각하는 깡패, 양아치, 하류 인생들이야. 젊은 시간 낭비하고 있는 망종들이지.”
진화의 말에 반대편 흑사문의 사내들이 술렁거렸다.
남궁세가에서 온다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라, 진화의 말이 모두에게 들렸기 때문이다.
“저 계집이 뭐라는 거야!”
“니미, 말이면 단 줄 알아?”
“아미타불…… 때론 진실이 더 가혹한 법이지. 상처받겠군.”
욕지거리를 뱉는 흑사문 사내들을 보며, 현오가 작게 혀를 찼다.
그에 남궁교명이 흑사문 사내들을 비웃었다.
“상처? 쓰레기는 상처받아 봐야 쓰레기일 뿐이다.”
남궁교명의 싸늘한 혹평에, 현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진화 시주에게 말한 것이네. 저 방망이로 만두 하나 못 빚는 짐생들이, 여인이 둘이나 있는데 진화 시주에게 계집이라 하지 않나? 안타까운 일일세. 아미타불.”
“…….”
현오의 말에 남궁교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옆에서 뿜어지는 당혜군의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쓸데없는 곳에서 시간 보낼 필요는 없지. 죽이지 말고 길만 뚫자고.”
진화가 제 왼쪽에 선 팽수, 팽신 형제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던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호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어요!”
당혜군이 순식간에 은화대침(銀花大針)을 날렸다.
파파파팟---!
“크아아아악-!”
“으악!”
사천당문이 자랑하는 만천화우(滿天花雨)가 하늘에서 쏟아져, 사내들의 미간에 박혔다.
“으악! 내 눈--!”
“사, 살려 줘!”
“몸이 이상해! 살려 줘-!”
순식간에 벌어지는 아수라장.
눈앞에서 사천당문의 진수를 보게 된 남궁범과 청해상단의 무사들이 놀란 눈으로 당혜군을 보았다.
남궁범은 어젯밤 자신의 딸과 술을 나누던 새초롬한 처자가 왈패들의 눈알에 침을 박아 넣는 것을 보며, 턱을 다물지 못했다.
“괜찮아. 도련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걸, 우리는 알잖아.”
남궁구가 진화의 어깨를 토닥였다.
* * *
수십 명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것도 그들의 체구 반밖에 안 될 것 같은 가녀린 여인에게.
흑사문의 앞으로 가는 진화 일행을 보는 시선들이 한층 더 숨을 죽였다.
뚜벅뚜벅.
진화와 일행이 앞으로 걸어가자, 검은 옷을 입은 사호위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본래 겁에 질린 먹잇감을 둔 호랑이는 풍채를 가리지 않고, 속도를 내어 달려들지도 않는다.
다만 천천히 걸어가서 얼어붙은 먹이를 한입에 삼키면 될 뿐이라.
팟-, 쿵!
진화의 손짓에 흑사문의 현판이 떨어져 내렸다.
진화가 현판을 밟고 올라섰다.
“들어갈까.”
진화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앞마당에 있던 사호위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움츠러들었다.
그때, 안에서 사호위들과 같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왔다.
“멈춰라!”
진화가 천천히 사내를 보았다.
“본인은 흑사문의 총관 조상호라 하오. 어떤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화부터 하시지요. 정파 명문을 자처하는 남궁세가의…….”
큰 키에, 광대가 툭 불거질 정도로 마른 사내였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이리저리 진화를 살피며 흔들리는 눈동자라.
진화가 조상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일행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전부 죽여도 되겠군.”
조상호가 어떤 의도로 앞에 나섰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진화는, 이들을 죽이러 온 것이라.
쉐에에엑-----!
“우아아악!”
진화의 손짓 한 번에, 조상호는 물론 그의 곁에 있던 사호위들이 쓰러졌다.
진화가 쓰러지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정의무학관 동의생들은 들으라. 귀천성과 거래를 했거나, 그들의 명을 듣는 자. 무림의 인도를 해치는 자들을 이유 불문하고 섬멸하라!”
“추-웅!”
진화의 명이 떨어지자, 진화의 뒤에 서 있던 일행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진화 일행의 임무는 종남파에 합류해서 귀천성과의 전쟁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정의맹과 정의무학관 무인들에게 귀천성의 섬멸은 절대적인 하나의 임무였으니까.
콰-앙!
팽수의 철혈백사십퇴가 사호위들이 쌓아 놓은 목책을 부쉈다.
“크아아아아--!”
나하연과 팽신이 그 위로 뛰어들어 사호위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퍼-억! 쾅!
팽신의 혼원권이 사호위 서넛을 한 번에 터뜨린다면.
파파파파팟-!
나하연은 수십 명을 차례로 지나며 주먹이 닿는 족족 상대의 뼈를 부쉈다.
쉐에에엑-!
남궁교명이 무지막지한 돌풍처럼 사호위들 사이를 휩쓸고 지난 후에는.
“어허! 소나무 십장생이다--!”
퍽! 퍽!
현오가 작은 각목을 양손에 쥐고, 사호위들의 머리를 터뜨렸다.
피가 터지고 내장이 흩날리는 잔인한 난리판이라.
신나게 싸우는 일행을 두고, 남궁구가 슬쩍 진화의 곁으로 왔다.
“귀천성이라니. 도련님, 대체 뭐야?”
진화가 죽어 가는 사호위들 사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궁구도 하는 수 없이 진화의 주변을 지키며 진화를 따랐다.
“배에 실은 노예들.”
“노예들?”
“보통 노예는 한곳에서 잡은 일가 출신이거나 한곳에서 이동시키는 비슷한 행색일 경우가 많은 법인데, 그 배의 노예들은 이상하리만치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여자와 남자밖에 없었지.”
“……!”
진화의 말에 남궁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화는 남궁구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만년독물에 집어넣을 이천 명의 동남동녀. 팔현마제에 역천마제까지, 아홉이지. 순결한 젊은 피들만 그 많은 수를 어디서 모으고 있겠어. 게다가 아무 원한도 없이, 얼마 전 생일을 맞이한 남궁세가 장로의 딸을 잡겠다고 장원에 침입해? 원한은 없어도 그만한 이유는 있겠지.”
마침내, 진화가 천천히 흑사문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교명인가 싶을 정도로 싸늘한 얼굴을 한 남궁구가 그 뒤를 따랐다.
“어딜-!”
“너야말로! 가시는 내 님 걸음을 방해 마라-!”
퍼-억!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뭔가가 곤죽이 되는 듯한 소리.
나하연이 조상호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땅에 머리부터 내려치는 소리였다.
암살자의 가벼운 몸이 평생 상대를 부수기 위해 단련한 힘을 당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
단번에 조상호의 머리가 부서지고, 순식간에 핏물로 채운 가죽 주머니 같은 형체만 남았다.
그리고 그걸 당혜군이 터뜨렸다.
“윽. 끔찍하군.”
퍼-억!
“크아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주십시오!”
아수라장을 뒤로 안으로 들어온 진화가 이 층을 보았다.
“구, 보이는 놈들은 전부 죽여라.”
“충!”
진화의 말에 남궁구가 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방에 숨어 있던 사호위들이 뛰쳐나왔다.
남궁구의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지났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천풍검법 하해광풍(夏海狂風).
쉐에에엑--!
한여름, 바다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남궁구의 신형이 움직일 때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사호위들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검을 잡고 있던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건물 안에 울리고, 짙은 혈향이 번져 나갔다.
그리고 진화는 새파란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날려, 이 층 창문을 뚫고 나오려는 그림자를 때렸다.
“조용히, 네 발로 걸어 나와.”
진화가 안에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얼굴에 있는 검은 뱀 문신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그때, 눈치를 보던 흑사가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진화가 순식간에 흑사의 목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컥!”
“뱀이 아니라 쥐 새끼로구나.”
당황한 흑사의 얼굴을 담은 진화의 눈동자에 푸른 번개가 내리쳤다.
파지지직--!
“크아아악!”
진화의 손에 목이 잡혔던 흑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툭.
진화가 바닥에 떨어진 검은 책자를 보았다.
“크윽!”
진화는 흑사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대신 혈을 짚었다.
그리고 검은 책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으……!”
다급해진 흑사의 눈동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진화가 검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갑술년 무진월 계미일 신시…….”
검은 책자 안에 쓰인 것은, 갑술년 무진월 계미일 신시에 태어난 사람들의 신변 사항과 금액으로 보이는 숫자였다.
“제물의 조건인가 보군. ……넌,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끄으으…….”
진화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흑사의 얼굴에 있는 검은 뱀을 발로 짓밟았다.
* * *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흑사는 특별히 창궁무애단원들의 손에 끌려 나왔다.
흑사문 안에 있는 사호위들 중에 생존자는 흑사, 한 사람뿐이었다.
“허어……!”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지옥도라.
“옛날 생각나는군. 강물이 시뻘겋게 끓고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걸 보며, 다시는 이런 걸 보지 않겠다고 남궁세가에 들어왔는데.”
“……싸우러 들어간 게 아니고 도망친 거였습니까?”
회한에 젖은 눈을 한 남궁범에게 부단주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내 주제에 싸우러 왔겠나?”
남궁범은 저를 한심하게 보는 부단주에게 당연하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그때의 제왕무적단주도 그랬지만, 진짜 무림 고수들은 정말 인외의 세상에 사는 듯하군.”
남궁범은 진화가 손도 대지 않고 떨어뜨린 흑사문의 현판을 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들에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궁범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제가 할 일들만 생각했다.
“부단주.”
남궁범이 심각한 얼굴로 부단주를 불렀다.
“안은 곧 사패천이나 정의맹에서 와서 정리할 거다. 그사이에 우리는 여기 왈패 놈들 전부 주워다가 가둬 둬라.”
“에? 이놈들을요?”
“어차피 사패천이나 정의맹에서는 신경도 안 쓸 떨거지들이야.”
“그런 놈들을 어디에 쓰시게요?”
“떨거지긴 하지만, 돈이 되는 떨거지잖냐. 흑사문이 없어지면 이쪽 인력시장이며 도방, 투기전을 관리하는 이들도 빌 것이 아니냐. 인신매매라면 모를까, 이미 손에 떨어진 것들을 뱉어 낼 정도로 이 몸이 성인군자는 아니지.”
남궁범이 청해상단의 부단주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순간, 남궁범의 생각을 알아차린 부단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남궁범을 보았다.
남궁세가의 모든 해상 운송을 담당하는 청해상단의 단주 된 자가 챙기기엔 너무 작은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뱉어 내기엔, 세상에 제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뱉어 내는 상인은 없었다.
게다가 티끌만큼 조잡한 것들을 모으고 모아서 결국 청해상단 단주까지 오른 사람이 눈앞에 있지 않았던가.
“장강의 물범이 먹는 걸 가리진 않았지요. 첫 상품은 이놈들입니까?”
“흐흐흐. 피해 보상에 우리가 입은 손해까지 계산해서, 값싼 노동으로 갚으라고 하게.”
청해상단의 단주와 부단주가 서로 눈을 맞추고 음흉하게 웃었다.
젊고 건강한 공짜 노동력!
그들은 천천히 손을 털며 나오는 진화 일행을 환한 미소로 맞았다.
“피곤하시죠? 얼른 돌아가서 따뜻한 목간 물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하지만 그때.
척. 척. 척. 척. 척.
흑색 천에 붉은색 자수 장식이 된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진화 일행과 청해상단의 무사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무사들의 가슴에는, 붉은색으로 사패천의 홍랑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 자리에 멈춰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패천 무사들과 같은 복장의 건장한 사내와 붉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중년인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습니다. 사패천 신양부 홍랑대부 초산하라 합니다.”
“…….”
하얀 피부에 마르고 주름진 얼굴.
십상시 얼굴이 저러할까.
하얀 피부에 마르고 주름진 얼굴.
가는 눈에 비치는 서늘한 눈동자가 소름 끼치고,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이 섬뜩할 정도로 비정해 보이는 자였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창천화룡을 뵙는군요. 오오, 친구분들의 명성이 못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화룡의 미모에 눈이 갔을 뿐이에요. 호호호호호-!”
목소리마저 귀가 아플 정도로 가늘었다.
초산하의 웃음소리가 진화를 비롯한 모두를 조롱하는 듯 들렸다.
“사패천이라. 그래서, 용건은?”
“호호호, 성격이 급하시군요. 별것 아닙니다. 애써 사냥하신 것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흑사가 가지고 있던, 공자의 손에 들린 그 검은 책자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마른 가지 같은 초산하의 손가락이, 진화의 손에 있는 검은 책자를 가리켰다.
그와 함께 진화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싫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