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칼날 번쩍거릴 화(錵) : 사문을 기만한 자(1)
“그래요, 그대들 정파 명문이란…….”
“욕심쟁이, 우후훗.”
“푸하-!”
현오와 남궁구가 재담꾼들처럼 초산하를 흉내 내는 모습에, 결국 일행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서 웃는 게, 그냥 웃음으로 긴장감을 털어 버리는 것이었다.
전투를 치르고 난 뒤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흑사문 때문이 아니라, 초산하와 대치하며 다들 제법 긴장했었기 때문이다.
“다들 사패천은 처음 보나?”
“살인술사 초산하 같은 거물은 처음이었지.”
남궁교명의 대답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진화도 이전 생까지 통틀어 사패천의 주요 인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이 좋아 정사연합이지, 귀천성이 없었다면 정의맹의 칼날은 사패천을 향했을 거다. 그건 그놈들도 마찬가지고.’
진화가 비릿하게 웃으며 검은 책자를 보았다.
“그 영감탱이, 눈빛 봤어? 완전 살벌하더만.”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거 봤지?”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지.”
남궁구의 말과 함께,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진화를 향했다.
그때까지도 진화는 검은 책자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필사본을 준다고 했지만, 온전하게 다 준다곤 하지 않았지.’
누가 보면 재밌는 소설을 발견한 듯 해맑은 표정.
그러나 진화를 보는 일행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뒤통수 칠 모양이군.”
“저쪽에서 흑사를 심문하고 알려 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걸 우리 도련님이 믿을 거 같아?”
“……그럴 리 없지.”
함께한 지 어언 삼 년.
일행은 이제 진화의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 * *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일행은 일찌감치 달소항으로 나왔다.
“도련님.”
“며칠 동안 폐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먼 길 조심해서 가십시오.”
남궁범과 남궁금영을 비롯한 청해상단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진화 일행을 배웅했다.
“나, 저 표정 안다. 사흘 묵힌 변비가 나흘째에 뻥 뚫린 것 같은 표정이군.”
“……닥쳐, 미친년아.”
나하연과 당혜군의 귓속말이 안 들리는 척, 일행이 배에 올랐다.
나하연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남궁범이 진화의 등을 떠미는 듯도 했다.
우연의 일치로 딸의 납치를 막은 은인인 동시에, 일거에 흑사문을 멸문시키고 사패천과 대치하면서 그의 생명에 심각한 위협이 된 존재.
특히 그 모든 일에 대한 보고가 남궁범의 차지가 된 것을 생각하면, 남궁범의 태도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책자는 구, 네가 전하면 되겠군.”
“아, 그렇지. 가는 길이니까. 그자들이 흑사를 심문한 건, 정의맹으로 전서를 보내기로 한 거야?”
“친절하게 정의맹과 남궁세가로 각각 보내 준다더군.”
초산하가 검은 책자의 필사본을 가져가면서 베푼 친절에, 진화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번에는 단지 서로 죽일까, 말까의 선택지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에도 같은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상대가 베푸는 친절을 믿으라니.
‘현오가 풀만 먹는다는 말을 믿지.’
진화의 시선이 현오를 향했다.
“…….”
배에 오르자마자 청해루에서 싸 온 음식을 먹고 있는 현오를 보자니, 조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머릿속으로 다시 초산하가 한 말이 맴돌았다.
-그 검은 책자처럼, 각 마제들마다 제물을, 납치 대상을 거래한 장부가 있습니다. 그걸 찾으면, 제물들을 본래 어디서 데려왔는지 알 수 있지요.
‘내 출신을 알고, 날 현혹하려는 수작이겠지. 그게 아니라도 사방에 널린 것이 노예 상인들이고 인신매매를 하는 놈들이다. 그놈들을 어찌 다 찾을 거야? 게다가 우리는…… 이미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난 일이야. 못 찾아, 절대로.’
진화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다시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본래 누구였는지…… 우리에게도 진짜 부모, 형제가 있었겠지? 만약 지금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좋은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지금도 애타게 자식을 찾고 있다면?’
진화의 마음이 흔들렸다.
‘……현오가 굳이 숨어서 육식을 하는 땡중이 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진화의 시선이 고기전을 뜯고 있는 현오를 향했다.
살욕을 식욕으로 승화한다고 했던가.
점점 승복이 꽉 끼는 몸을 보자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진화는 남궁구에게 검은 책자를 전하면서 초산하가 한 말도 전했다.
-사패천이 쫓고 있는 사람은 권마제 태금호라더군. 이 검은 책자는 제물을 거래한 일종의 장부다. 그자의 말에 따르면, 각 마제들마다 찾는 제물이 다르니, 이런 장부를 찾으면 제물들의 배경이나 놈들이 찾는 자를 미리 알 수도 있을 거라 했다.
진화의 전음에 남궁구가 눈을 크게 떴다.
-배경을 알 수 있다고? 그렇다면……!
전하지 않아도 남궁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진화는 남궁구를 향해 피식 웃었다.
-난 처음부터 관심 없어. 사파 놈이 하는 말을 믿을 생각도 없지만, 내 배경이 궁금하지도 않아.
-하지만 도련님…….
-나는 남궁진화야, 죽었다 깨어나도 남궁진화다.
진화의 단호한 전음에, 남궁구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뿌리가 궁금하지 않을 사람이 없건만.
남궁구는 진화가 뿌리도 잊을 만큼 남궁세가에 마음을 두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는 오로지 사실만 말했을 뿐이었다.
‘진짜 죽었다가 깨어났는데도, 나는 남궁진화가 되었지.’
게다가 진화가 이전 생에 뇌왕이라 이름을 떨칠 때에도 장부에 관한 말은 들어 보지 못했었다.
그게 초산하의 말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진화는 다만, 현오의 기회는 없애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필요하지 않는 말이었지만, 혹시 현오는 간절하게 원하는 일일 수 있으니까.
뱃길로 반나절을 올라왔을까.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내릴 준비를 했다.
종남으로 가는 여정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여기까지 였다.
“낙양에서 적호단에 합류하는 건가?”
“에궁, 어쩌겠나. 부처님께서 불쌍한 중생들을 굽어살피실 것이네.”
“견디다 보면 끝은 있을 거다.”
“낙양 천담상회에서 최고급 옥색 비단 좀 사다 주세요.”
“…….”
진화와 현오, 나하연이 차례로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와중에, 당혜군이 실속을 차렸다.
“왜, 왜요? 천담상회의 최고급 옥색 비단은 낙양점에서밖에 안 판단 말이에요!”
당혜군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남궁구와 남궁교명, 팽가 형제가 당금 중원 최대의 격전지라는 종남파로 가는 진화 일행의 위로를 받으며 내리는 곳은 중원에서 가장 호화로운 도시, 낙양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적호단에 합류해서 한동안 남궁진혜의 밑에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다들, 목욕탕에 끌려가는 개 같군.”
“……욕이야?”
“후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하연과 당혜군, 현오가 배에서 내리는 일행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진화는 그저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 * *
낙양에서 큰 물줄기를 따라 하루.
진화 일행은 종남산으로 가기 전, 장안 저자를 지나고 있었다.
“진화, 진화, 저기 보게!”
“어머! 천담상회가 여기에도 있었네!”
현오와 당혜군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안의 저자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눈이 돌아갔군.”
“난 그대에게 눈이 돌아갔다오.”
“…….”
나하연은 나하연대로 진화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으니.
여기서 불행한 사람은 진화, 한 사람뿐인 듯했다.
“우리, 저기! 여기서 조금 쉬다 가세! 응? 으응?”
“그래요! 우리 잠시 쉬었다가 가요!”
똑같은 말이었지만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현오의 쉬다는 ‘먹다’라고, 당혜군의 쉬다는 ‘사다’라고 들린 것이, 비단 진화의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현오와 당혜군의 성화에 못 이긴 진화와 나하연은, 그들을 따라 천담객잔이라 적힌 곳에 들어갔다.
“천담?”
“용케 두 사람을 고루 만족시켰군.”
아니나 다를까.
현오는 앉자마자 음식을 시켰고, 당혜군은 앉기가 무섭게 바로 옆에 있는 상회로 달려갔다.
정신없는 하루였다.
진화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하루이기도 했다.
진화가 ‘남궁’과 연관 없는 사람들하고만 움직인 것은, 광마전을 나온 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전 생에도 진화는 항상 남궁세가 무인들과 함께 움직였었다.
감시 겸 보호를 위해서였다.
“혼자 이렇게 먼 곳에 온 것은 처음입니까?”
“아, 예.”
“하하하, 저만 믿으십시오.”
“……나하연 낭자도 초행이 아니십니까?”
“난 언제든 그대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음흉한 살쾡이처럼 이때만을 기다렸소! 두 남녀가 낯선 외지라니! 그것도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싹트는 애틋한…… 윽! 퉤! 현오-!”
진화에게 수작을 걸던 나하연이 현오가 먹다 튀긴 고기 양념을 닦아 냈다.
그게 하필이면 나하연의 입가에 튄 터였다.
그리고 마침 당혜군이 들고 온 옥색 비단에도.
“이 미친 땡중이-! 진짜로 전쟁터에서 격전 끝에 돌연사 해 볼래?”
당혜군이 현오에게 망가진 비단을 휘두르고, 나하연은 계속 혓바닥을 닦아 댔다.
어쩐지 객잔 사방으로 그려진 탕화 속 모습 같았다
‘지옥 마구니들이랑 똑같네. 가시방망이를 휘두르고, 불 뿜어 대는 게.’
옛 나라의 수도인 동시에 도교의 성지라는 곳에, 객잔 장식으로 탕화가 그려진 것도 이상했다.
이상하고 낯선 외지.
그리고 지옥의 마구니 같은 동료들.
진화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피 튀기는 전쟁터로 가길 바랐다.
* * *
종남산.
귀천성이 남으로 익주와 교주, 형주 일부를 차지한 것과 달리, 북으로는 그다지 기세를 펼치지 못한 것은 장안을 잃지 않으려 무림 일에 끼어든 관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로 종남파는 관부에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뭐든 일방의 관계는 없듯, 장안 군부는 종남파 출신의 무인이 태반이라.
종남파는 여전히 관과 무림이 연합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과는 별개로, 가을 종남산은 입이 턱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중원 오악은 그냥 악산이었던 게지.”
현오의 감탄처럼 종남산은 숭산과 달랐다.
하늘을 향해 부처님의 제자들이 서 있다는 거대하고 신성한 분위기의 숭산 자락과 달리, 종남산은 그야말로 명필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써 넣은 글씨 같다고 해야 할까.
울창한 숲에 붉게 물든 단풍은 곱게 단장한 새색시 같았고, 숲으로 오르는 좁은 길도 졸졸졸 물소리가 들려와 정겨웠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도 압도적이기보다는 시원했고, 깎아지른 절벽도 그 사이사이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위태롭기보다 소박한 느낌마저 주었다.
거대하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신성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는 곳.
“하아!”
협곡의 끝자락, 작은 마을처럼 거대한 장원.
은자들의 성지라 불리는 종남파였다.
진화 일행이 계단을 올라 대문을 지나자, 검을 든 종남파 무인이 진화 일행을 세웠다.
“아……. 누, 누구십니까?”
하필 진화와 눈이 마주치면서 말을 더듬은 젊은 무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때, 현오가 나섰다.
“아미타불, 정의무학관에서 온 동의생들입니다.”
현오의 민머리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신분패가 되었다.
반지르르한 민머리와 터질 듯한 승복으로 신뢰감을 준 현오가, 종남파 무인의 경계를 사지 않게 천천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정의무학관의 발령서와 관도생을 증명하는 신분패였다.
“정의무학관 소속, 전부 확인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신분을 확인한 종남파 무인이 웃는 얼굴로 진화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제가 장문인과 현무단주님께 안내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올해 동의생은 네 분이시군요.”
종남파 무인이 오랜만에 보는 외지 사람에 들뜬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다행히 현오가 붙임성 좋게 대화를 이어 갔다.
“좀 적지요?”
“에이, 아닙니다. 이 년 전에는 한 분만 오셨는데요, 뭘. 하하하! 한 분만도 난리였지만요.”
“아…….”
이 년 전…….
현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종남파 무인이 힐끔힐끔 진화의 얼굴을 훔쳐보다, 말을 걸었다.
“한데, 고, 공자는 이름이 어찌 되십니까?”
“남궁진화입니다.”
“아…….”
이번에는 종남파 무인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조용히 걸어간 일행은 마침내 커다란 전각 앞에서 멈췄다.
태평전(太平殿).
“이곳이 장문인께서 계신 곳입니다.”
진화가 태평전의 현판을 보았다.
이전 생에서도 진화는 이 현판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부서지고 남은 반쪽짜리였지만.
‘종남파가 멸문당하고, 기세를 잃은 정의맹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났었다. 종남에서 찾아야 하는 건, 전쟁의 판도를 바꾼 배신자다!’
진화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건장한 사내가 진화 일행을 맞았다.
흑백의 도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사내는 신선이라기보다는 장군에 가까운 외모라.
“허허허허! 올해 정의무학관에서 온 손님들이구려. 종남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종남파 장문인, 신수일검(信水一劍) 견원이 진화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화가 일행을 대표해서 종남파 장문인에게 인사를 했다.
‘배신자…… 종남의 멸문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자가 바로 배신자일 터. 신수일검 견원은 종남파의 유일한 생존자였지.’
진화의 눈이 호탕하게 웃고 있는 사내를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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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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