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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164)화 (164/425)

남궁마제

떨칠 진(振) 칼날 번쩍거릴 화(錵) : 사문을 기만한 자(2)

종남파 장문에게 인사를 한 진화 일행은 곧바로 다시 산을 내려와야 했다.

진화 일행의 얼굴엔 허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네. 나도 보고할 것이 있어서 종남 본문에 올라왔지만, 이렇게 다시 내려가잖나?”

흑백의 도복을 입은 사내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선한 인상의 사내가 바로, 정의맹 육 대 무단 중 하나인 현무단 단주 옥화혜검(玉華慧劍) 운해라.

청수검 무현 이전의 무당제일검 출신으로, 오래도록 종남파 영역의 전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남궁세가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종남파 영역도 매우 넓어. 전 황조 때부터 사람도 많고, 그만큼 무림 문파도 많은 곳이니까. 종남파 외에도 정의맹 소속으로 지켜야 할 문파가 아주 많으니, 장안 저자에 본부를 두는 편이 유리하지.”

현무단주 운해의 말에 진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창천쌍용의 위명은 이곳에서도 들었네. 소가주인 창천신룡에 이어서 창천화룡이라 불린다지? 남궁의 홍복이네. 제왕검께서 쌓은 덕이 그리 돌아갔나 봐. 허허허!”

유쾌하게 웃는 현무단주의 모습에 진화가 조금 이상한 듯 보았다.

남궁가주와 비슷한 연배인데, 하는 행동이나 언행, 웃는 모습은 영판 할아버지 연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비단 진화의 느낌만은 아닌 듯.

“중늙은이 같군요.”

“애늙은이가 나이가 들면 더 늙은이가 되는 모양이군.”

“부처님 앞에서 시간은 그저 똑같이 흐를 뿐이지. 아미타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당혜군과 나하연, 현오가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진화와 현무단주의 귀에서 고스란히 들렸다는 것인데.

“허허허, 유쾌한 친우들일세.”

“송구합니다.”

자애롭게 웃어넘기는 현무단주의 모습에, 진화가 대신 사과를 했다.

“허허, 괜찮대도. 내려가면 부단주가 관도생들이 묶는 방으로 안내를 해 줄 걸세. 이 년 전, 남궁진혜가 다녀간 이후로 아무도 받지 않았으니, 방은 여유가 있을 거네.”

“……송구합니다.”

뒤끝은 있는 성품인 건가?

뒤끝인지, 그냥 한 말인지 아리송했지만, 어쨌든 진화는 이번에도 대신 사과를 했다.

종남파 무인도 그렇고, 방금 전의 장문인까지.

남궁진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표정이, 다들 지금 현무단주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립고 아련하기보다, 아찔하고 아득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

진화와 현무단주는 산을 내려갈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산을 다 내려왔을 즈음.

저자거리 쪽에서 빠르게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단주님--!”

현무단원이 말도 멈추지 않고 큰 소리로 현무단주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산임방 쪽에서 전투입니다!”

“뭐? 얼른 가지!”

순식간의 일이었다.

현무단원은 달리던 말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현무단주는 저자와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진화와 일행이 놀라며 현무단주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입니까?”

“적이네! 산임방이라고, 종남파 영역 남쪽에 있는 제법 큰 문파일세.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곡물 창고를 가지고 있고!”

현무단주가 최대한 빨리 경공을 펼치며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진화가 별 무리 없는 얼굴로 그의 옆에서 달리고 있었고, 그 바로 뒤쪽으로 나하연과 당혜군, 현오가 최선을 다해 따라오고 있었다.

‘창천화룡이라 했던가? ……경공만으로는, 일단 헛소문은 아니군.’

다시 진화를 본 현무단주가 짧게 감탄했다.

하지만 산임방에 도착했을 때.

현무단주는 그가 감탄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 * *

챙—! 챙챙-!

“어서! 어서 불부터 꺼라!”

진화 일행이 내렸던 포구에서 멀지 않은 작은 나루터.

창고로 보이는 몇몇 건물에 불이 붙었고, 산임방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물을 나르며 불을 끄고 있었다.

퍼-엉!

“죽어라!”

“이 더러운 귀천성의 주구들!”

나루터와 작은 배, 창고 할 것 없이 무인들이 얽혀서 싸우고 있었다.

현무단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산임방의 가장 큰 창고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채-앵!

순식간에 검을 빼 든 현무단주가 전투 중인 곳에 뛰어들려는 찰나.

쉐에에엑----!

푸른 검기가 가장 큰 창고에 쏘아진 불붙은 짚단을 공중에서 베어 버렸다.

“으아아악-!”

불붙은 짚이 흩어지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상복처럼 새하얀 무복을 입은 무사들과 검은 무복의 무사들.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나하연과 당혜군, 현오와 달리, 진화는 현무단주보다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쉐에에엑-! 쉐엑-!

“크아아아악!”

마치 땅에 누운 듯 미끄러지며, 진화의 검이 새하얀 천으로 감싸진 다리를 잘랐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어떤 이들은 아예 발목이 끊어져서 바닥에 나뒹굴었고, 어떤 이들은 종아리에서 폭포 같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진화가 구름을 찢는 번개처럼 백의를 입은 사람들 사이를 휘저었다.

그리고 붉은 핏방울이 사방에 떨어지는 사이로.

파지지지직----!

새파란 불꽃처럼 뇌전이 번뜩였다.

핏방울 아래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검을 놓쳤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현무단원들마저 당황하는 순간, 현무단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적이 주춤하고 있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한눈팔지 마라!”

현무단주의 목소리에 현무단원들이 기세를 끌어 올리며 적들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아이고, 이 아까운 것을…….”

현오는 곡물이 모두 쏟아진 빈 자루를 들고 있었다.

퍼---억!

“먹을 걸로 장난치면 천벌받는 것도 모르는가!”

퍽! 퍽! 퍽! 퍽!

오합권의 힘이 실린 자루에 맞는 순간, 백의에 백두건을 한 사람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타다다다-탁!

당혜군의 만천화우가 이제 막 불씨를 맞은 곳에 박히면서 불을 껐다.

그리고 나하연이 빈 자루 두 개에 물을 담아 공중으로 뿌렸다.

비가 쏟아지듯, 강물이 불이 붙은 창고와 짚단 위로 떨어졌다.

현무단주나 몇몇 현무단원들이 눈을 크게 뜨며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오늘 막 인사를 온, 그것도 정의무학관 동의생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전투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사람은…….

파지지지지지직----!

새파란 번개가 종남파 무인의 목에 사슬을 감은 채 당기고 있는 무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끄아아아아악----!”

귀가 아플 정도로 끔찍한 비명과 함께, 종남파 무인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번개의 주인을 찾았다.

그때.

파바박---! 팍! 푹! 푹!

방금 전까지 종남파 무인의 목을 감고 있던 사슬이, 조각조각 나뉘어 푸른 화살처럼 적들의 가슴팍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푸-욱!

“크으읏!”

백의를 입은 무인 하나가 팔을 뚫고 박힌 것을 보며 신음을 내었다.

핏발이 선 부리부리한 눈과 산적처럼 덥수룩한 수염.

팔 전체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 겨우 비명만 참은 사내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빛내며 사슬 조각을 던진 범인을 찾았다.

“네 이놈--! 더러운 정파의 요물 따위가 감히 이 쌍적파에게 암기를 날려-!”

하얀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무복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사내가 진화를 향해 쌍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죽여 주마-!”

분노한 곰처럼 뛰어드는 사내를 보며, 진화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후-웅!

왼손에 있던 도끼가 진화의 몸을 양단할 듯하다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고.

부-웅!

오른손에 있던 도끼가 진화의 머리를 쪼갤 듯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진화의 왼 손가락 두 개가 사내의 도끼를 잡았다.

“죽어라.”

차디찬 목소리와 함께 진화의 손끝이 번뜩였다.

쉐엑! 

……퍼-엉!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빛이 사내의 몸을 통과했다.

그리고 사내는, 마치 명령을 받든 것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죽었다.

청명한 하늘과 같은 색의 무복을 입은 진화가 서늘하게 사내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와, 와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쌍적파를 마지막으로, 백의를 입은 적은 모두 죽거나 무기를 던지고 항복했으니.

실로 오랜만의 완승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귀천성 소속으로, 집요하게 종남파와 휘하 문파들의 곡식을 태우거나 빼앗으며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백열문이었다.

진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은 쌍적파는 백열문주의 오른팔로 이 일대에서 악명이 자자한 귀천성도라.

오랜만의 대승에, 아직도 피비린내가 가득한 전장에서 정의맹 무인들이 그간의 분노를 토하듯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 * *

진화를 제외하고, 현오와 당혜군, 나하연은 온몸이 피로 젖었다.

현무단주는 본부에 오자마자, 그들에게 숙소로 먼저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진화 일행이 숙소로 가는 길.

“와아아아아!”

“대단했습니다-!”

진화 일행을 향해 종남파 무인이나 그 휘하 문파의 무인들이 박수를 치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벌써 많은 이들이 진화와 일행을 알아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이곳의 무인들은 그저 당장의 승리를 만끽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때.

지나가는 진화 일행의 귀에 소란스러운 상황이 들어왔다.

“제발 제 동생이 있는지 확인만 하게 해 주세요!”

“어허, 여기서 이렇게 해서 될 게 아니라니까.”

소란이 있는 장소에는 단정한 경장을 입은 젊은 여인이 본부를 지키는 현무단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글쎄.”

“제법 귀한 집안의 영애 같은데…… 부리는 하녀도 보이지 않는군요.”

당혜군이 여인의 옷차림을 살피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녀의 말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제법 귀해 보이는 행색의 여인이 하녀도 하나 없이 종남파 본부에 있는 모습이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익숙해 보이는군.”

나하연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상황을 매우 익숙하게 넘기고 있었다.

진화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황 속에 진화를 거스르는 부적절함.

진화의 눈이 조용히 여인과 현무단원을 향했다.

* * *

한 달째 이곳을 찾고 있는 성가포목의 영애.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아는 이들이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지나치고 있었다.

동정하는 것은 쉬웠지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제발요! 있었는지 여부만 확인해 주세요. 아니, 제가 할게요!”

“큰일 날 소리! 참전 명단이라 함부로 보여 줄 수도 없는 거고, 볼 수도 없는 거라니까 그러네!”

“제 동생 이름만 확인하면 돼요! 그 아이가 없었다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고요! 제발요!”

여인의 부탁에 현무단원이 펄쩍 뛰었다.

‘명단에 이름이 없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

진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관계자가 아닌 사람에게 우리 전력을 보여 줄 순 없지. 결코 불가한 일을 거듭 부탁하는 여인…… 그런데도 짜증은커녕 곤란한 기색만 보일 뿐이라.’

진화의 시선이 여인을 상대하는 현무단원에게 닿았다.

그의 뒤쪽으로, 여인을 보자마자 조용히 등을 돌리는 현무단주가 보였다.

사람 좋게 웃던 그가 여인에게 보인 것은 차디찬 외면이었다.

“그렇게 죽을 아이가 아니에요! 대체 무공도 못 하는 아이가 전투에는 왜 나갔다는 거예요!”

결국 여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현무단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현무단주조차 저걸 외면한다? ……이상하군.’

신경을 거스르는 부자연스러움의 정체를 파악한 진화가 스르륵 입꼬리를 말았다.

“저기, 선배님, 잠시만요.”

웃음은 상대의 경계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진화가 순진한 신입 무사의 얼굴을 하고, 길을 가던 종남파 무인을 붙잡았다.

현무단주에게 묻기 전에,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현무단주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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