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마제
떨칠 진(振) 칼날 번쩍거릴 화(錵) : 사문을 기만한 자(3)
한때는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었다.
작은 소국에 버금가는 넓은 땅에, 많은 사람들.
외국 상인과 여러 민족이 섞여, 무림 또한 수없이 많은 중소 문파들이 있었다.
지금이야 도문인 종남파를 구심점으로 하여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종남파에서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따로 일국이나 다름없는 면족 부락이나 장족 부락도 있습니다. 해서 어느 문파, 어느 세가에서 참전했는지 각자가 명단을 만들어서 전투마다 기록하는데, 각 문파나 세가의 전력이나 다름없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겠습니까.”
종남파 무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현무단원에게 매달리고 있는 여인을 보며 말했다.
“명단을 종남파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당혜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종남파는 도문이지 않습니까. 여긴 검문도 있고 권문. 심지어 중원과는 다른 불문도 있습니다. 그런 문파들은 전쟁 때문에 협력하는 것이지, 결코 종남파의 아래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종남파 무인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귀천성에 넘어가지 않은 것도, 그자들의 그 고집 덕이죠. 결코 다른 곳에 굽히는 법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경조군이나 장안수비군도 장족과 면족 부락에는 군을 들일 수도 없는 것을요.”
사천당문도 고집과 자존심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겠으나, 이곳 서북쪽은 또 달랐다.
애착이 강하여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동등하게 생각하기에 위에 서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진화는 종남파 무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이곳의 방식이자 질서라면, 새롭게 이곳에 온 진화 일행이 존중하고 적응해야 할 것이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저 여인의 사정이었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왜 이곳에서 동생을 찾는 것입니까?”
“아, 성가포목이라고 큰 상회의 큰 영애입니다. 동생은 얼마 전 면족 장로의 아들과 약혼하면서 그 집으로 들어갔고요. 그런데 면족 장로의 아들이 전사하는 날, 동생도 사라졌답니다.”
“약혼자가 전사한 날, 사라졌다고요?”
종남파 무인의 말에 진화 일행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으니, 따라 죽은 것이 아닙니까?”
나하연의 말에, 당혜군과 현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 무인의 말과 전후 사정을 듣자면, 누구나 그렇게 추리할 것이었다.
“그게 좀…… 누군가 백열문도들이 성가 둘째 영애를 끌고 간 것을 본 적이 있다는 말도 하고…….”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간 것이라면, 굳이 시체조차 찾지 못할 곳에서 죽을 이유가 없겠지요. 오히려 함께 묻히길 원했을 테니, 그 집 안에서 목을 매는 것이 더 합당했을 겁니다.”
진화의 말에 종남파 무인이 흥분하며 동의했다.
“그겁니다! 그 성가 둘째 영애가 그렇게 없어질 사람이 아니거든요. 유명했습니다. 면족 장로의 아들과 그 영애…… 그러니 언니가 환장을 하는 게지요. 못된 인간들이 둘째 영애가 도망갔다는 소문도 퍼뜨리고, 면족에서는 도망갔을지도 모를 사람의 위패를 사당에 올려 줄 수 없다 하고. 그 와중에 전투 중에 둘째 영애를 본 사람이 있고, 면족 장로 아들도 그 영애를 구하려다 죽었다는 말까지 나오니…… 어휴.”
“그럼 면족에서 명단을 보여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게 힘들게 되었습니다. 면족 부락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서, 명단도 없어졌거든요. 방법이라곤 그때 전투를 했던 한수문의 명단을 보는 것인데, 확실치도 않은 것 가지고 한수문에서 명단을 공개하겠습니까?”
종남파 무인의 말을 들어 보면,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닐 듯하긴 했다.
한수문에서 양보를 해 주면 좋겠지만, 이렇게 위험한 때에 함부로 ‘하라, 마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단에 없는 죽음이나 실종이 근래에 크게 늘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거 일일이 찾아 주느니, 안쪽에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배신자를 찾는 게 더 빠를 겁니다!”
“배신자요?”
종남파 무인이 흥분해서 한 말에, 진화 일행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본 종남파 무인도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말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안쪽에서 하도 수상쩍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아서……. 허, 참. 말이 너무 많았네요. 숙소는 저쪽입니다.”
종남파 무인이 발걸음을 급히 하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서, 소담한 별채가 앞에 멈춰 섰다.
“저곳입니다. 그럼 편히 쉬다 저녁에 식당으로 오십시오.”
종남파 무인이 꾸벅 인사를 사고 돌아갔다.
진화 일행은 곧바로 별채로 가지 않고, 잠시 종남파 무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허어, 참으로 이상하지요?”
“성안에서 수상쩍게 사라지는 사람이 많다니…… 역시, 귀천성 놈들이 제물을 납치한 것이 아닐까요?”
“백열문 놈들이, 아니 성안의 흑사문 같은 무리가 제물을 납치해서 귀천성에 넘기는 것일 수도 있겠지.”
종남파 무인의 말을 들으며, 현오와 당혜군, 나하연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진화 또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다만 한 가지 더.
‘왜 이 당연한 생각을 종남파 무인이 안 하고 있는 걸까? 정의맹에선 귀천성이 제물을 납치하고 부활하려는 걸 사전에 저지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는데……. 설마, 종남파에서는 모르고 있는 건가?’
진화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이 지나왔던 본부 쪽을 보았다.
* * *
숙소는 방 두 개와 응접실, 식당, 작은 연무장이 있는 알찬 장원이었다.
각각의 방은 침대만 다섯 개씩 놓여 있어서, 마치 정의무학관의 숙소와 흡사했다.
“순간 모든 여정이 꿈이고, 지금 숙청관인가 했네.”
“그렇게 소림이 싫은가?”
“어허! 아무리 진실 된 생각인들, 입으로 나오는 순간 경망스러워질 수 있음이네!”
결국 싫다는 말이었다.
아니, 싫은데, 싫어하는 것을 말로 시키진 말라는 건가?
“으아아아-. 바글바글한 사형제들이 없으니 침상 두어 개를 붙여도 되는군!”
진화는 벌써 침상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현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본래 누구인지 찾아서 스님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러면 소림을 떠날 건가?”
진화의 말에 현오가 뒹굴거리던 그대로 뚝- 멈췄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는?”
“나는 상관없잖아.”
“하긴. 넌 지금도 남궁세가니까. 남궁세가보다 대단한 집안은 찾기 힘들지.”
듣기에 따라 비꼬는 듯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진화는 가만히 현오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현오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는 어차피 천살지체잖아.”
진화의 눈이 커졌다.
진화는 설마 이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소림이 어떻다거나 앞으로 스님으로 사는 것 혹은 진짜 부모님이나 형제에 대한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어릴 적 살욕이 끓어올라 광증이 터지면, 장문인이 나를 품에 끌어안고 주무셨어. 그다음에는 사형제들이 나를 포개듯 붙어서 자 주었지. 평생 소림 밖으로 나가신 적 없는 숙수님이 먹어 보지도 않은 만두를 그렇게 잘 만드는 건 어떻고.”
“…….”
“원래 불행한 게 있어야 조금 행복해도 크게 느끼는 법이야. 불자의 몸으로 육식을 하고 만두를 먹으니까 더 맛있는 거라고. 귀하게 자란 너는 모를 맛이지.”
현오가 고개를 들고 개구지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진화도 마주 웃었다.
“결국 소림이 불행하다는 거군.”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돼!”
현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발했다.
진화는 그런 현오를 무시하듯 밖으로 나갔다.
“현무단주를 뵙고 오지. 그동안 좀 씻도록.”
“그래. ……헉!”
진화의 말에 가볍게 대답하던 현오가 낭패한 듯 제 침상을 보았다.
한차례 전투로 피투성이 되었다는 걸 잊고 침상에 뒹굴었던 것을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현오가 품에 안았던 베개는 벌써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으허허헉! 내 베개!”
현오의 비명을 들으며, 진화가 입가에 작게 미소를 달고 숙소를 나왔다.
‘한 번도 친부모나 형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군.’
진화의 얼굴이 서서히 식어 갔다.
* * *
“들어가겠습니다.”
진화가 현무단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왜, 쉬지 않고?”
현무단주 운해가 일어나서 진화를 맞으면서 의아한 듯 물었다.
긴 여정에 종남산까지 갔다가 전투까지 참여했으니, 아무리 젊은 후기지수들이라도 지칠 것이었다. 해서 일부러 배려한 것이었는데, 곧장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갑자기 전투가 벌어질 텐데, 한시라도 빨리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 둬야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진화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하, 요즘 기수들은 책임감이 강하군. 좋은 마음가짐일세!”
진화의 말에 운해가 웃으면서 칭찬했다.
그런 운해를 보며, 진화가 덤덤한 얼굴 그대로 눈을 마주쳤다.
“아까 그 여인의 일도 궁금해서요.”
“음? 그 여인? 아, 그 성가의 영애 말인가?”
진화의 눈이 현무단주의 얼굴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안타까운 듯 일그러진 눈썹, 처진 입꼬리. 그리고 괴로운 듯한 눈빛까지.
표정과 눈빛에 실린 감정은 일치했고, 상황과도 맞아떨어졌다.
어떤 사적인 감정이나 뭔가를 숨기고자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실종이 늘었는데, 그걸 도와줄 수는 없으니. 전쟁 중에 함부로 무사들을 뺄 수는 없지 않은가. 혹여, 여인이 안타까워서 나서고 싶은 것이라면 삼가게.”
현무단주가 엄한 목소리로 진화에게 경고했다.
‘삼가라?’
진화의 눈빛이 이채를 발했다.
“아까도 보았지만 언제 어느 때에 놈들이 습격해 올지 모르네. 그때를 놓치면, 그때마다 한 일가가 몰락하거나 문파가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네. 게다가 자네들은 겨우 넷뿐이네. 실력은 아까 확인했지만, 그런 무력일수록 개인적인 안타까움보다는 중요한 일에 써야 할 것이네.”
현무단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인의 일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 진화의 눈엔 그 외에 어떤 의도로 읽히지 않았다.
아까 여인을 외면했을 때와 달리 어떤 의심도 가지 않는 현무단주의 모습에, 진화가 슬쩍 운을 떼듯 말했다.
“중원 전체에 그런 일이 늘었습니다.”
“중원 전체에? 그런 일이라니?”
“실종 말입니다.”
“중원 전체에 실종이 늘었다고?”
현무단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화는 중요한 단어를 하나씩 추가하며, 현무단주의 반응을 살폈다.
“귀천성에서 제물을 모으기 시작했거든요.”
“제물이라고?”
진화의 말에 현무단주가 크게 놀랐다.
하지만 현무단주의 반응에 진화가 더 놀랐다.
“모르……셨습니까? 현무단에서?”
“몰랐네!”
현무단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간의 실종에 대해선, 정의맹에 보고하셨습니까?”
“늘 있어 왔던 일이네. 보고를 안 했을 리가 없지 않나?”
현무단주의 말에 진화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물론 귀천성이 제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정의맹도 최근에야 진화가 넘긴 장부를 보고 확신했다.
그 이전까지는 단지 추측만 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의맹 육 대 무단 중 하나인 현무단주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은 이상했다.
아니, 현무단주는 그렇다 쳐도, 정의맹이라면…… 정의맹의 군사부라면, 귀천성이 제물을 모으기 시작한 것과 현무단주의 보고의 연관성을 알아차렸어야 할 일이었다.
“중간에 보고가 누락되거나, 전서가 누락된 것이 아니라면요.”
진화의 말에 현무단주의 눈이 커졌다.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 진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정의맹과의 연락이나 보고는 종남파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본산에 있는 종남파 수뇌부에서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
“현무단이 따로 하는 보고는요?”
“현무단의 주요 업무가 이곳 전투를 지원하는 것이라. 결국 종남을 통해서 하고 있네.”
진화와 현무단주의 눈이 마주쳤다.
심각한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
진화는 현무단주가 정의맹의 일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확신할 수 없다면…….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정의맹으로 따로 그간의 보고를 확인하는 전서를 보내시죠. 그리고 종남파에도 똑같이 보고하시죠. 정의맹에서 직접 날아온 답과 종남파에서 전달해 주는 명이 같은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진화의 말에 현무단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오자마자 종남파 수뇌부를 의심하는 것을 꾸짖을 수도 없는 것이, 바보같이 배신자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라.
“따로 전서를 보내겠네.”
현무단주가 힘겹게 말했다.
괴로워 보이는 현무단주를 두고 나오면서, 진화는 별채가 아니라 장안 저자로 나갔다.
‘나도 확인해 봐야지. 저자가 눈앞에서 나를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진화는 조용히 천담상회로 들어갔다.
“천풍을 날려야겠네.”
당혜군이 그렇게 좋아하는 옥색 비단을 살피며 툭 던지는 말에, 천담상회의 점원이 조용히 진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옥색 비단은 가공도 특별하지만 누에부터 특별한 것을 먹여서 만드는 것이지요.”
“양주 합비 옥구룡차를 먹인다지?”
“……매응으로 보내겠습니다.”
진화가 점원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 * *
피----잉!
파다다닥! 파다다닥!
하늘을 날던 작은 새의 위로 나타난 그림자.
놀란 새가 파닥거리지만, 어느새 커다란 독수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새를 잡아챘다.
펄럭, 펄럭!
검갈색 독수리가 사냥한 새를 가지고 주인의 곁으로 갔다.
삐익-!
소리와 함께, 독수리가 웬 중년인의 팔뚝으로 가서 새를 내놓았다.
“옳지, 옳지.”
중년인이 독수리를 칭찬하며, 새의 발에 달린 쪽지를 꺼냈다.
“또 남궁이라 어쩐지 불길하다 했더니만.”
중년인이 혀를 차며 쪽지를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독수리는 다시 상공으로 날려 보냈다.
감히 독수리의 영역에서 함부로 날 수 있는 작은 새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