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마제 (168)화 (168/425)

남궁마제

권위를 떨칠 진(震) 따를 화(化) : 남궁이 없다는 건(1)

“살려 주십시오, 장문인!”

“살려 주십시오! 저희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몇 남지 않은 종남파 무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그들은 바닥에 흐르는 핏물이 전신을 적시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종남파 장문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참극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정녕, 정녕……!’

종남파 장문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두에게 배신당한 슬픔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더 큰 것일까.

“허!”

현무단주와 현무단원들도 살려 달라 빌고 있는 저들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옆에서 현오가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저렇게 묻힐 피였으면 싸우다 묻힐 것을. 쑥떡 같은 인간들! 쯧.”

현오의 욕지거리도 들리지 않는 듯, 종남파 무인들은 그저 장문인에게 매달렸다.

가만히 널브러진 주검들을 보던 종남파 장문인의 지선이 그들에게 닿자, 종남파 무림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쿵. 쿵.

“장문인, 살려 주십시오!”

쿵.

“살려 주십시오!”

종남파 무인들이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소리치고, 머리를 땅에 찧었다.

현무단주와 현무단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문인, 살려…… 헉!”

소리치던 자의 목에 서늘한 칼날이 닿았다.

“장문인-!”

그 옆에 있던 자가 곧 죽을 듯이 악을 질렀다.

하지만 곧 그자에게도 칼날보다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자격 없는 자들은 떠들지 마라.”

진화가 여전히 검을 빼 들고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건 장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종남파 장문인에게도 말했다.

“……!”

이 자리에 자격이 없는 자는 이들만이 아니다.

진화의 말에 종남파 장문인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현무단주 또한 진화에게 달리 말하지 못했다.

* * *

장안 정의맹 본부.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이 머물고 있는 별채에 사람이 찾아왔다.

벌써 두 번째였다.

“아직 오지 않습니다. 급한 일입니까?”

“아, 아닙니다!”

당혜군의 날카로운 반응에 종남파 무인이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저 식사 준비를 어떻게 할까 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식사? 흥, 챙겨 주지 않아도 찾아 먹을 인간들이니, 그 인간들 식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식사라는 말에 당혜군이 부쩍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히익!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종남파 무인이 도망치듯 나가자, 그 모습을 보며 당혜군이 혀를 찼다.

“뭐 저렇게 겁이 많아?”

“네가 짖는 걸 보면 누구라도 겁을 먹을 거다.”

“닥쳐!”

내내 신경질적인 당혜군을 보며, 결국 나하연도 표정이 굳었다.

“그날인가?”

팟-!

나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찻잔을 잡았다.

찻잔은 던지되 소리는 지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날은 아닌 듯싶었다.

“대체 이 인간들은 왜 아침부터 말도 없이 사라져?”

“찾는 사람이 많군.”

“그러니까…… 자꾸 이상하게.”

당혜군이 창밖을 힐끗 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전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식사 때문에 두 번이나 찾아와?”

심지어 식사 시간도 아니었다.

변명이 너무 궁색하지 않은가.

게다가 밖에서 느껴지는 시선도 이상했다.

당혜군이 좀 전의 종남파 무인에게는 일부러 신경질을 내어 쫓아 보낸 것이었다.

감시받는 기분이 들어 영 찝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밖에 나갔을 때, 자꾸 우릴 살피고. 계속 별채 주변을 사람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어. ……이상하지?”

당혜군이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물었다.

그에 나하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 ……내가 이제 남성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후우, 닥쳐.”

당혜군은 나하연과 뭔가 의논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나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왔군.”

놀란 당혜군이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진화와 현오가 돌아오고 있었다.

현오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갔다.

“네가 개냐? 남궁진화의 개라도 되게?”

당혜군은 황당하다는 듯 나하연을 나무랐다.

그런데 나하연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섭도록 냉정하게 굳은 얼굴.

“왜, 왜 그래?”

“피 냄새다. 어떤 버러지들이 남궁 공자에게 덤벼들었군.”

나하연이 살벌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 * *

업무차 들른 김에 슬-쩍.

“오늘도 본 산에 갔다고?”

종남파 도복을 입은 장년인이 지나가는 말인 듯 물었다.

그에 현무단주가 사람 좋게 웃었다.

“아, 정의무학관 관도생들이 온 김에 정식으로 인사차 갔습니다. 앞으로 그들도 정의무학관으로 보고를 올려야 할 텐데, 아무래도 한꺼번에 처리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현무단주가 정의맹에 보내는 보고를 종남파에 맡긴 것과 같은 이유였다.

절차적인 번거로움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

저들이 현무단주에게 한 말이었다.

‘괭이 새끼에게 고기를 맡긴 것도 모르고……!’

그동안 제가 얼마나 호구 같았을까.

현무단주는 제 가슴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속에서 끓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시 호구처럼 웃었다.

“그건 그렇지요. 단주님께서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시는구려.”

“하하하! 이번에 온 사람들이 다들 보통이라야 말이죠. 남궁진휘가 정의맹의 부군사로 있으니,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잘 지내 둬야지요.”

남궁세가의 위세가 대단하니, 정의맹 육 대 무단의 단주인 자신조차 벌벌 떨어야 한다는 듯.

현무단주가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오, 남궁…… 그렇겠구려. 단주께서 이 지역을 위해 애써 주시니 참으로 고맙소.”

“뭘요. 우리 모두 같이 싸우는 동료가 아닙니까.”

“허허허! 맞는 말이오. 그러나 고마운 말이오. 내 서북 사람들을 대표해서 내내 현무단주에게 감사하오.”

“별말씀을요. 이곳이 하루하루 잘 버텨 주는 것에 정의맹에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현무단주가 진지한 눈빛으로 종남파 도인에게 말했다.

어색하리만큼 강렬한 감사에, 종남파 도인이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뭘, 우리 사이에…….”

종남파 도인이 현무단주의 집무실을 나갔다.

도인이 나가고.

탕-!

현무단주가 책상을 내리치며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다.

“종남파 일장로, 건복검(建福劍) 장류…… 네놈이 기만자렷다!”

현무단주가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일장로 장류가 나간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있던 현무단원에게 말했다.

“이 시간부로, 저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라.”

-충.

짧은 명과 함께 현무단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 하나하나 정의무학관을 거쳐 정의맹이 중원 전역에서 선발한 실력자들이었다.

각자의 특성에 맞게 육 대 무단으로 나뉘며, 현무단에 온유한 성품의 도문 출신 무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장안과 종남파 영역을 지원하는 데에 누구보다 협조적이었고, 잡음 없이 섞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러나 이제까지 모든 일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누가 계속해서 온유할 수 있겠는가.

현무단의 마음은 이미 우습게 보였을지언정, 그들의 실력마저 우스워질 이유는 없었으니.

분노한 현무단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현무단주를 만나고 돌아온 일장로 장류가 지친 듯 자리에 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뭐, 뭔가 아는 눈치였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이장로 허애일과 육장로 장건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에 일장로 장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뭔가 아는 눈치는 아니고, 그저 인사차 다녀왔다는군.”

“인사요?”

일장로의 설명에도 이장로와 육장로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은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인사는 첫날에도 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땐 정말 인사만 했고, 이제는 업무를 시작하니까.”

일장로가 짜증스러운 듯하다가, 순간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가 알려 준 대로, 종남파의 전서구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 줬다는군.”

일장로는 그들이 여전히 잘 속고 있다는 것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이장로와 육장로도, 완전히 안심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허허, 괜히 걱정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래서 죄짓고는 편하게…… 흠, 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실수를 할 뻔했던 육장로가 급히 말을 마쳤다.

일장로와 이장로가 육장로를 노려보았다.

“쯧! 사람이 경박하긴. 늘 말조심을 하라지 않았더냐.”

“송구합니다.”

일장로의 타박에, 육장로가 눈치를 보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를 불편해진 후였다.

“별일은 아니지만, 거슬리는군.”

일장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실 이 불편함은 비단 육장로의 말실수 때문이 아니었다.

“놈이 괜히 성가포목 계집과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편함을 모두 진화의 탓으로 돌렸다.

“남궁이라고 할 때부터 불길하지 않았습니까. 그놈들은 여기가 제집 안방인 양 날뛰니, 쯧! 건방져서 그렇습니다! 건방져서!”

육장로가 방금의 말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열심히 불만을 토했다.

이장로도 심각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자꾸 뒤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안 그래도 면족 부락 사람들이 오장로를 찾는다는데…… 저렇게 마음껏 뒤지도록 두면 안 됩니다. 작은 의문이 소문을 만들고, 결국엔 이상한 의심을 만들어 낼 겁니다.”

이장로의 말에 일장로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 분간 못 하고 계속 둘 수는 없지.”

“그 성가포목의 계집도 조만간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애초에 그 계집이 캐고 다니는 바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일장로의 말에 이장로가 눈빛을 번뜩이고, 육장로는 살짝 겁을 집어먹었다.

“두, 둘 다 죽일 겁니까?”

“둘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건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그놈은 남궁이니까.”

육장로의 말에 일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이장로가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본래 전쟁 중에는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놈들이 가장 먼저 죽지 않습니까.”

“전쟁이라…….”

“남궁진혜도 그렇게 거의 없앨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년이 성화문도 사십 명의 목을 따고 살아남을 줄은 몰랐지만.”

일장로가 아직도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이장로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러려고요. 게다가 남궁진혜 때에도 뒤탈은 없었지 않습니까. 놈이 쌍적파를 죽였습니다. 백열문 놈들이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이장로의 말에 일장로가 스르륵 입꼬리를 말았다.

“백열문이 그리 만만한 적은 아니지.”

“흐흐흐, 백열문에 전갈을 넣어 두겠습니다.”

“……다음 격전지는 성은곡으로 하지. 지난번의 복수라면, 거기가 딱이지 않나.”

“이런, 성가포목에 연이은 불행이 닥치겠군요.”

일장로의 말에 이장로와 육장로가 교활한 얼굴로 웃었다.

* * *

현무단주가 진화를 찾았다.

“놈들이 움직였습니까?”

진화의 물음에 현무단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아프다는 말을 믿은 모양이군요. 그 종남파 제자들이 의심을 사지 않고 잘한 모양입니다.”

“현무단이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허튼 말을 하거나 수작을 부린다면, 거기 있는 사람 전부를 죽이라고 했거든.”

“…….”

현무단주의 말에 진화가 말없이 현무단주를 보았다.

“자네가 갈 것인가?”

이번에는 현무단주가 먼저 물었다.

진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현무단주가 진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함께 가게 해 주게.”

현무단주의 부탁에 진화가 눈을 크게 떴다.

일전에 진화가 ‘자격’을 운운하긴 했지만, 현무단주가 진화의 명을 듣거나 부탁할 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현무단주의 행동에는 수치심이나 가식 따윈 한 톨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진화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간의 잘못을 이것으로 만회하려는 것이라면, 틀렸습니다. 이 일이 그에 대한 속죄가 되진 않을 겁니다.”

진화가 현무단주에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현무단주 또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회나 속죄가 아니네.”

“그럼요?”

“복수이자 분풀이일세.”

“예? ……허!”

현무단주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듯.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진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현무단주를 보면서, 적호단주 팽치를 떠올린 적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그 적호단주와 같은 반열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팽치였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사람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웃고 있는 현무단주를 보자니, 또 생각이 달라지는 듯도 했다.

“그런 것을 원하신 거라면,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진화가 현무단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당파 출신, 청수검 이전의 무당제일검이자 현 현무단주.

“고맙네.”

그가 살기를 번들거리며 진화의 손을 잡았다.

“어찌할 셈인가?”

“적은 모조리 죽이고, 배신자들도 모두 죽일 겁니다. 특별히 배신자들에겐 싸우다 죽을 기회도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명예와 목숨, 모조리 잃게 만들 작정이군.”

“그게 전쟁 아니겠습니까.”

전쟁은 본래 모든 존재를 걸고 싸우는 것이다.

진화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진화의 말에 현무단주가 슬픈 듯 웃었다.

어쩌면 자신도 전쟁의 참혹함에 겁을 먹고, 종남파 기만자들이 만들어 낸 가짜 전쟁에 안주한 것은 아닐까.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없듯, 최소한의 희생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무단주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리고 잊었던 참혹함을 떠올리며 물었다. 

“백열문부터인가?”

“예. 지금 갈 참인데, 가시겠습니까?”

마치 좋은 곳에 마실 가자는 듯 묻는 말에, 현무단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하게 따르지.”

현무단주가 오랜만에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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