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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마제 (175)화 (175/425)

남궁마제

나아갈 진(進) 따를 화(化) : 환마제 여시(4)

주루에 앉아 밖을 바라보니 더 가관이었다.

노예를 사고파는 불빛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화 일행의 뒤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주루와 기방의 불빛이 이어지는 차였다.

“이 시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군.”

“음…….”

남궁구의 말에 누구 하나 입을 쉽게 떼지 못했다.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수련도 마다않고 해 오며 험하게 살아왔다 여겼건만, 어쩌면 자신들은 진짜 험한 것은 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때 진화가 무심한 듯 말했다.

“양주에는 노예시장이 없다.”

“갑자기 자랑인가?”

“스스로를 지켜 낼 강한 힘이 없다면, 세상은 어디나 지옥이 될 수 있다. 비참하게 짐승처럼 살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나. 그저 어쩔 수 없이 몸이 꺾이고, 의지가 꺾이고…… 죽는 거다.”

진화의 말에 일행은 다른 의미로 조용해졌다.

진화가 광마제의 제물실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이 없었기에, 진화의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듯했다.

그때, 남궁구의 입이 실룩거렸다.

“현오 자식, 우리더러 오향육림 시켰냐고 묻는데?”

“그 냄새를 저기에서까지 맡다니, 대단한 놈.”

남궁교명은 식탁 위의 오향육림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지근거리라지만, 이렇게 사람과 주루가 많은 곳에서 일행이 시킨 음식 냄새를 정확하게 맡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걸 듣는 놈이 더 대단하지 않나?”

팽가 형제가 놀랍다는 듯 남궁구를 보았다.

그때, 밖을 보고 있던 진화의 눈에 현무단과 적호단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이 보였다.

진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진화뿐 아니라 일행도 현무단과 적호단을 보고 있었는지, 표정들이 굳었다.

“……뭔가 이상한데요?”

남궁교명 또한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내가 가서 알아보고 올까?”

남궁구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진화가 미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갑자기 현무단과 적호단이 노예시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놀란 남궁구가 일어나려는 것을, 진화가 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남궁구를 잡고 그 앞의 술잔을 제 앞으로 당겨 왔다.

“주변에 눈이 너무 많아. 지금 움직이면 일행인 것이 알려진다. 조용히 기다려.”

진화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하는 말에, 일행이 뻣뻣하게 굳었다.

잠시 후, 적호단주가 주루의 앞을 지나는 척 진화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장가 부락이 습격당했다.

진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숫자가 많아. 장가 부락의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우리는 저쪽으로 이동한다. 너희들은 남아서 현오의 위치만 파악해 둬라. 곧바로 구하러 갈 거니까 걱정 말고!

적호단주의 전음에 진화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잔을 따르는 척, 조용히 일행에게 들은 것을 전했다.

“뭐?”

“우리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현오는 어떻게 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현오를 꺼내 올 수 있다.”

남궁구와 남궁교명이 깜짝 놀라는 동안, 팽가 형제가 현오를 가둔 감옥을 부수는 데 자신감을 보였다.

진화가 놀라서 팽가 형제를 만류했다.

“안 돼! 두 번은 시도하지 못하는 일이야. 지금도 사방에 감시하는 눈이 깔려 있으니까. 적호단주의 말처럼 조용히 현오의 행방만 파악한다. 절대 놓치면 안 돼.”

말보다 주먹이 빠른 팽가 형제를 말리느라 말이 급해졌지만, 내용만은 단호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진화에겐 장가 부락의 일보다 이쪽이 더 중요했다.

정의맹 무단이야 동맹 세력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진화는 아니었다.

물론 진화에게 그런 의무가 있더라도, 진화는 이쪽을 선택했을 거였다.

“환마제의 행방을 좇는 일이야. 저쪽은 적호단과 현무단이 갔으니 괜찮을 거다.”

적호단과 현무단이 갔으니, 여기서 진화와 일행이 더 간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현오와 우리의 정체를 들키는 날엔, 이 인림 자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거다. 그러면 우리는 환마제를 쫓을 가장 확실한 방법을 잃는 거고. 그러니까 현오를 놓치지 마.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우리만으로 괜찮을까? 이러다가 우리가 현오를 놓치면…….”

“만약 현오가 저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차라리 환마의 제물로 죽으면 다행이지만, 최악으로 천살지체가 저들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지. 그땐 현오가 일찍 죽길 바라야지.”

진화의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 일행이 원성이 터져 나왔다.

“와, 인정사정없는 도련놈.”

“악마.”

“나쁘다.”

“음…….”

남궁구와 팽가 형제는 진화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장난 섞인 비난이 쏟아 냈다.

남궁교명은 끝내 일을 열지 않았지만, 그건 온갖 비난과 험한 말이 담긴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정신 차려. 누가 온다.”

진화가 일행의 비난을 가차 없이 끊었다.

실제로 누군가 현오가 있는 감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나와 있는 걸 알고, 장가 부락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건가? 그렇다면 아직 내부 첩자가 남아 있다는 말인데…….’

진화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홍등의 붉은 불빛이 활활 타오르는 듯 환한 방.

금포를 걸친 노인이 인림을 바라보고 섰다.

그때, 한 사내가 들어와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상 어르신.”

“무슨 일이더냐?”

“적호단과 현무단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진화의 예상대로, 이미 많은 이들이 정의맹 무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놈들이?”

사내의 말에,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노인은 마상 노인이라 불리는 이로, 이곳 인림을 비롯한 인근 노예시장의 대전주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노예 상인들 태반이 노인의 새끼 상인들이라.

노예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노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상 노인은 갑작스레 나타난 정의맹 무인들 소식에 더 말을 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곳곳에 적호단과 현무단 놈들이 보인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뭘 하고 있다지?”

“그저 주변 시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순결한 젊은 노예를 사 가는 사람을 물어보고 있다고 합니다.”

새끼 상인들의 연락책을 맡은 사내가 공손하게 답하자, 마상 노인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곧 마상 노인이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손을 저었다.

“흐음. 일단 알았으니 나가 보거라.”

그러자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그리 두어도 괜찮을는지요. 상인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거래 상대를 묻지 않는 것은 이곳의 불문율인데, 정의맹이 그것을 침범하고 있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내의 걱정스러운 말에, 마상 노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허!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나라 군대도 어쩌지 못하는 밑바닥이다. 고작 정의맹 놈들이 뭘 할 수 있다고. 곧 사라질 인사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답도 해 주지 말라 전해라.”

마상 노인의 말투에는 정의맹에 대한 비웃음마저 실려 있었다.

곧 사라질 인사들이라니…….

사내는 주인의 말이 이상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도 세상을 내다보는 주인이 아니었던가.

모르는 것이 없는 주인이니, 주인의 말처럼 그들은 곧 사라지리라.

“예.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마상 노인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사내 또한 이내 안심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나가고.

마상 노인이 자신의 앞에 잔을 하나 더 놓았다.

마치 한 사람이 마주 앉은 듯, 잔에 차를 채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상 노인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놈들이 검은 책자를 얻었다더니,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 순간.

“장부를 보고 그것도 모를 바보는 아니지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기척도 없이, 노인이 잔을 놓은 자리에 웬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마상 노인의 두 배는 족히 될 듯 거대한 사내였다.

“하필 이런 때에 정의맹 놈들까지 끼어들다니…… 이러다 제물을 구하는 데에 더 시간이 걸리면 큰일이네. 주인님의 인내심이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어.”

“방해가 된다 싶으면, 놈들을 전부 죽이겠습니다.”

사내가 시커먼 살기를 피워 올렸다.

그러자 마상 노인이 펄쩍 뛰었다.

“안 돼! 주인님의 대법이 완성될 때까지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 곁을 지킨단 말인가!”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족에 마침 새로 출산한 아이도 제법 있더군요. 마지막 일곱을 채울 수 있을 듯합니다.”

“오오, 그거 정말 다행이군.”

사내의 말에 마상 노인이 진심으로 반가운 얼굴을 했다.

제 주인의 인내심이 극에 달하면서, 점점 그를 상대하는 것이 힘들어지던 차였다.

가장 어려운 조건 하나를 넘었으니, 이렇게 되면 전 노예시장을 쓸어서라도 동남동녀의 정기를 채워 넣으면 되리라.

“혼현마제께서 주인님의 최종 제물을 가지고 오신다니, 이제 곧 끝이 나겠구먼.”

점점 대업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마상 노인이 감회에 젖었다.

그리고 곧 다시 사내에게 당부했다.

“그때까지, 한시도 여시 님의 곁을 비워선 안 되네.”

“예.”

마상 노인의 말에, 사내가 듬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오히려 마상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했다.

“놈들은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사내의 물음에, 조금 생각을 하던 마상 노인이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허허허! 일이 참 공교롭게 되었네.”

“예?”

“마침 놈들이 이곳 인림에 왔더군, 우리가 장가 부락을 공격하는 날에.”

마상 노인의 말에 사내가 의아한 눈을 했다.

그에 마상 노인이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며 말했다.

“놈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는가. ‘왜 하필 자신들이 없을 때에 왔을까?’ 하고!”

“아!”

그제야 마상 노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사내가 탄성을 터뜨렸다.

“허허허! 참 공교롭지만 재미있게 되었네. 당분간 정의맹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여시 님의 보필에만 신경 쓰게.”

마상 노인이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곧 노인의 말처럼 노예시장에 적호단과 현무단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때부터 긴장이 풀린 듯 노예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참에, 술래가 없는 술래잡기나 시켜 볼까? 대법이 완성되기 전까지, 당분간 재밌게 놀아 볼 수 있겠군!”

장안만큼이나 크고 넓게 퍼진 무법지대를 지배하는 노인에게, 사람을 가지고 하는 놀이만큼 자신 있는 것은 없었다.

밖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원성 소리, 그와 상반된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상 노인이 홍등보다 붉게 눈을 빛냈다.

* * *

“팔렸다!”

놀랍게도 현오가 팔렸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낡았지만 단정한 승복, 피둥피둥 뽀얀 살집까지.

염불을 외거나 만두를 팔 게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현오가 제일 먼저 팔려 나갔다는 사실에, 일행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천성 놈들이 확실해.”

“저놈이 동정 아니면 쓸모 있는 구석이 어디 있다고. 동정 보고 데려가는 거지.”

“진짜 장점이라곤 그거 하나뿐인데, 나쁜 놈들!”

점점 인색해지는 동료들의 말에, 진화는 어느 쪽이 더 나쁜지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다만 현오가 갇혀 있는 감옥 수레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누군가 진화 일행에게 다가왔다.

“하하, 참 성격들도 급하십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시지요.”

친근하게 다가온 중년인이 앞을 가로막자, 진화 일행이 날카로운 기세로 그를 경계했다.

“웬 놈들이지?”

남궁교명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현오 님이라면 제 수하들이 쫓을 겁니다. 그편이 더 안전할 것이고요.”

“음, 좋아.”

중년인의 말에, 남궁교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중년인의 코앞에서 살기를 번뜩였다.

“이제는 진짜로 정체를 밝혀라. 안 그러면 죽는다.”

서슬 퍼런 눈빛이 중년인을 찌를 듯 몰아붙였다.

그에 중년인의 뒤에 있던 호위무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서려 했지만, 그들이 걸음을 떼기도 전에 팽가 형제의 주먹이 먼저 닿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남궁교명의 검이 중년인의 허리를 향해 반쯤 나와 있었다.

그리고 시퍼런 단도 하나가 그 아래에 자리했다.

중년인의 시선이 단도와, 단도를 들고 있는 남궁구를 향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아저씨, 성함은?”

남궁구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참, 처음 당해 보는 무섭고 민망한 협박이군요.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중년인이 아래에 있는 단도를 보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호위무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적호단주에게 들은 것 없으십니까?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그곳?”

“그분들 한 분, 한 분, 따르는 세력이 있지요. 제왕검께는 남궁세가가 있듯이 말입니다.”

눈을 찡긋하는 중년인의 말에, 일행은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십이좌회.

환마제를 잡는 데에 십이좌회 중 하나가 나선다더니, 그 사람의 세력인 듯싶었다.

다만 십이좌회에는 세간에 진짜 이름과 배경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있어, 정확한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좀 더 위층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제가 초대하지요.”

중년인이 자리를 청했다.

그러자 일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진화에게 모여들었다.

중년인을 살피던 진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은 그제야 중년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허어, 이거 참. 제가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는 얼굴인가요? 어딜 가도 제법 호남형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말입니다.”

중년인의 능청에도, 일행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진화가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기자, 일행들도 말없이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남궁구는 단도를 넣지 않은 채, 중년인에게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허허허!”

중년인이 그런 진화 일행을 보며 기가 찬 듯 웃었다.

그때, 호위무사로 있는 한 사람이 중년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왜 말리신 겁니까? 회주님께 무례가 도를 넘었습니다. 아무리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라지만, 너무 건방지지 않습니까!

-허허허, 이 사람아, 내가 처음 당해 보는 무섭고 민망한 협박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뇌전이 자네들과 내 발밑에서 번뜩이더군.

-네?

호위무사의 놀란 전음을 들으며, 중년인이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궁세가의 소공자가 생각보다 훨씬 매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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